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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 아저씨

에세이 프로젝트#11

by 단단지

내 별명은 호들갑 아저씨다.


이 별명은 내 직장에서 5~6살 어린 동료들이 부르는 말이다. 벌써 아저씨란 소릴 듣는 게 싫지만, 사실 아저씨란 소린 10년 전에도 들었다. 군 입대만 해도 아저씨란 소릴 듣는 일반적인 남자의 삶에 아저씨는 상대적인 나이 많은 사람의 호칭일 뿐이다. 그렇지만 내가 어렴풋 상상했던 진짜 아저씨 나이에 근접해져서인지 스스로 찔리긴 하나보다. 그와 별개로 아저씨 앞에 붙는 호들갑은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왜냐면, 난 정말 호들갑 떨기 때문이다.


수많은 변수와 일을 하다 보니 매사에 호들갑이 늘었다. 언제 생길지 모르는 변수 때문에 머릿속으로 상황극을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특히나 찜찜하면 무조건 짚고 넘어가는 것이 병적으로 늘었다. 그렇게 내 호들갑은 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난 호들갑을 즐긴다. 여러 차례의 시뮬레이션은 인사이트를 늘려준다. 한 사안에 대해 깊이 고민한 증거이기도 하고 업무에 정말 도움이 된다. 특히 어느 때에는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상황을 예측해 던지면 걸리기도 하는데 그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예측한 범주에 사건이 걸려들면 그다음 스탭으로 떠올렸던 해결책을 바로 써먹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상황을 예측한 멋진 자라는 칭호는 덤. 누군가에게 보여질 해결사라는 이미지 그리고 내가 예측한 것이 들어맞았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은 호들갑의 참맛이다.


언제나 이 예측이 맞진 않는다. 사실은 그냥 넘겨도 됐을 일이지만 지나친 호들갑으로 상대방을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 내 호들갑을 부정적으로 마주한 동료는 아마 숨이 턱턱 막히겠지. 종종 나도 느낀다. 내 호들갑이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될 때가 있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이 일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큰일 날 거야"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에. 허나 별일 아니어서 내 난리부르스만 별것이었던 일도 많아서 지나고 보면 상대방에게 미안함이 드는 일도 흔하다.


그런 때에는 자중해야 할 텐데 라는 마음은 들지만, 어쩌다 무언가를 낚아오는 호들갑이란 그물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도구이다. 더군다나 정말 합리적인 이유를 대자면 내 업무에서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 때 뒤에 밀려오는 후폭풍은 어마어마하기에 더욱 호들갑의 매력에 빠져드는 듯하다. 아니 그냥 당연히 써야 하는 도구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노선은 정하기 힘들다. 호들갑을 안 떨자니 변수에서 오는 뒷감당이 무섭고, 호들갑을 떨자니 동료들에게 부정적인 상황인식만 늘어놓는 듯하고 말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필연적으로 성공해야만 어느 하나 감당하지 않는 평범한 상태가 된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백조가 물 위에 에서 보면 평온하고 해 보이지만 물밑에서는 엄청난 물장구를 치고 있다는 그런 말. 완벽한 줄타기를 해야 평범한 상태라니 참으로 어렵다.


사실 그래서 호들갑 아저씨라는 별명이 마음에 든다. 내가 호들갑을 떨어도 호들갑 아저씨라는 별명은 뭔가 재미진 사람으로 보여진다. 응당 호들갑 아저씨는 호들갑을 쳐야 제맛이지 하는 느낌이다. 부정을 위한 부정을 호들갑이란 이름으로 떨어댈 때 사람들이 별칭을 떠올리며 마냥 밉게만 보지 않아 준다면 얼마나 좋은 별명인가. 생각해 보니 그 별명을 만들어준 동료 96년생 변 모씨에게 감사하다.


어쨌든 난 호들갑 줄타기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느끼기에 부정을 위한 부정이 되지 않도록 긍정의 호들갑 권법을 선사하리다. 말이 쉽지 정말 깜깜하게 수련이 필요한 권법이지만, 내일도 다시금 시도해 보리다. 결국은 모두가 함께 잘돼 자고 하는 긍정의 호들갑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호들갑 아저씨는 내일도 누군가에게 호들갑을 떨겠지.


그래 난 호들갑 아저씨가 맞다. '긍정의'를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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