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사냥꾼에게 긁혀버렸다.

에세이 프로젝트#12

by 단단지

지난해부터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밈이 있다. '긁혔다' 이 밈은 소위 상대를 화나게 만들어 조롱할 때 쓰는 말이다. 실제로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터넷상에서 워낙 많이 사용되다 보니 최근에는 그 의미가 다소 옅어졌다.


내가 오늘 사용한 '긁혔다'의 의미는 옅어진 개념에서 다음과 같다. '기분 상할 일 까진 아닌데, 못 참고 스스로 화가 나버렸다'이다. 여기서 화가 나는 것의 정의는 외부로 표출하거나 말은 못 하지만 내면에서 씩씩대는 내 모습이라 하겠다. 이제부터 긁혔다라는 표현을 자유롭게 사용할 테니 감안하고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내 인생에 가장 강력한 긁힘의 기억이 있다.


바야흐로 2012년 5월 전 세계 남정네들 마음에 불을 지핀 사건이 있다. 역작이라고 불리는 '디아블로2'의 후속작 3편이 12년 만에 새롭게 출시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이후 PC방도 잘 안 가던 동네친구들이 오랜만에 주말마다 혹은 시간 날 때마다 PC방을 다시 가게 한 대 사건이었다. 제목에서의 악마 사냥꾼은 '디아블로'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기대감과 재미를 푹 고아 삶아 먹을 정도로 '디아블로3'를 즐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재미를 졸업한 친구도 있었고, 좀 더 강해지고 싶어 현금을 들여 아이템까지 구매해 푹 즐기는 친구도 있었다.


몇 년이 지났고 삶이 바빠진 우리에게 '디아블로3'라는 게임은 추억 반열에 오를 만큼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2016년, 2017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정확히는 그때 태어난 친구의 아들이 올해 초등학생이 됐으니 2016년쯤이 맞겠다. 그렇다. 내가 긁혔던 그때는 2016년 2월 경이었다.


그날은 우연하게도 당시 '디아블로3'를 함께 즐기던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었다. 때문에 '디아블로3'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 빼박 상황이었다. 특히 동네 친구 무리 12명 중 하필 그 '디아블로3'를 했던 그 4명이 모이다니 말이다. 와이프가 집에 없으니 집에 와서 술을 먹자는 제안에 흔쾌히 퇴근하고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앞서 말한 올해 초등학생이 된 그 아이는 방 한편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가 깰까 조용조용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그날이 생생한지 안주까지 기억에 남는다. 닭꼬치와 염통꼬치 한가득 시켜 우리는 술을 마셔댔다. 과거 술 취하면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을 하러 PC방에 갔던 이야기, 다들 사회 초년생일 때라 회사 여러 이야기 등 오랜만에 가벼운 회포를 풀어 댔다.


그렇게 내가 긁힌 사건의 발단인 '디아블로3' 이야기가 시작됐다. 게임 기자였던 나는 현재 그 게임이 어떤 식으로 서비스되고 있는지 친구들에게 근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게임은 끝없이 사냥하고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맞추면 재미가 모두 소진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때문에 어느 정도는 끝이 있다고 여겨지던 게임이다. 그러나 게임사는 좀 더 오래도록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새로운 연속성을 부여했다. 그것은 4개월 주기로 처음 등장하는 무기 혹은 설정을 공개하고 그 새로워진 재미를 누리려면 캐릭터를 새로 성장시켜야 하는 '시즌제'라는 시스템이다.


소위 '끝판왕'이라고 불릴 만큼의 좋은 무기를 소유한 유저에게 '시즌제' 때문에 본인의 캐릭터가 약해지는 일은 썩 기분 좋지만은 않을 일이다. 특히 기존 캐릭터는 '시즌제'에서 사용할 수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캐릭터가 삭제되진 않지만 각 '시즌'에서 만든 캐릭터를 우선시해 주는 문화가 권장되는 시스템이기에 기존 유저들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게임이 재밌게 오래 서비스되기 위해서는 어찌 보면 개발자들의 고민이 엿보이는 업데이트였다. 그 후속작인 '디아블로4'에서도 '시즌제'를 차용한 것을 보면 당시 변화는 유효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겜돌이다 보니 길게 설명했지만 요약하자면 과거 내 친구들이 그렇게 힘들게 몇 개월을 밤새가며 키운 캐릭터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는 소리다. '시즌제'라는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억울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게임의 근황을 설명해 줬다. 그러던 중 한 명이 굉장히 발끈해 나에게 따져 물었다. 당시 본인 캐릭터 스펙을 자랑하며 본인 캐릭터가 얼마나 강력한 지 나에게 설명했다. 그는 현금을 주고 아이템을 구매할 정도로 그 게임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친구다. 그는 당연하게도 생소한 '시즌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기자였던 나 조차도 내가 시간을 들여 어렵게 구한 아이템들이 사실상 초기화된다는 '시즌제' 형식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내 친구는 나에게 한 참을 따져 물었다. 캐릭터의 강함이 점점 누적되는 것이 최고 재미인 RPG에서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그러면서 마치 현실을 부정하듯 그래봐야 내 캐릭터가 지금도 강력할 것이다라고 주장을 펼쳤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상황을 다시금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러다가 결국 긁히는 상황이 와버렸다. 그 친구는 "네가 나보다 디아블로3를 더 잘 아느냐? 네가 뭘 아느냐. 내 무기가 얼마짜린데?"라며 술기운에 거나하게 실언을 던져버렸다. 그에 더해 함께 술을 먹던 친구 둘은 "그래 네가 @@이보다 게임도 조금 했는 데 뭘 알아"라고 장난반 진담반으로 나를 다그쳤다.


이때부터는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연거푸 '시즌제'를 이해시키려 노력했던 것 정도만 떠오른다만, 그에 돌아오는 답변은 본인이 현금으로 얼마나 비싼 아이템을 들고 있고 그 아이템이 얼마나 시쳇말로 개쩌는 지에 대한 연설이었다. 이에 동의하며 나를 나무라는 나머지 친구들의 끼어듦을 곁들인. 나는 합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친구는 이미 추억과 보상심리로 무장해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답답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언성을 높여 말하고 싶지만, 아기가 옆방에서 자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겠는 가, 이미 거나해진 그 자리 모두가 내 설명을 들을 리가 있나. 마지막에는 나도 포기해 버렸다. 아무튼 게임 기자인 나는 한순간에 겜알못(게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 이 에피소드는 누군가에게 하찮을 수 있다. 게임 따위가 뭐라고. 그러나 아직도 그 당시를 잊을 수가 없다. 친구들을 다시 불러 맥락 없이 다짜고짜 그 얘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연히 하필 그 네 명만 모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불어서 내 스스로도 그냥 넘기고 말 수 있는 문제 같다고 판단해, 이를 면전에 말을 하든 카톡을 보내든 간에 표출하면 창피할 것 같아 화병처럼 답답해했다.


'걔들은 왜 거기서 그런 식으로 끼어들었을까?' '쟤는 이해하려고 안 하는 건가?'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내가 게임기자인 것을 알 텐데 어찌 저리 말할 수 있을까?' 등 거진 몇 개월 동안 하루에 몇 번씩은 실제로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긁힘이 찾아왔다.


나는 생각보다 쫌쫌따리 화를 자주 내는 편이긴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내 화는 대부분 억울함과 오해에서 시작된다. 다행히도 내 인생에서 이러한 긁힘은 능률로 이어졌다. 씩씩대면 될수록 추동력을 받아 능률이 올라가는 특이한 타입니다. 소위 화나면 전투력이 오르는 타입니다. 그래서 업무 상황에서 나에게 누군가 시비를 걸면 특이하게도 능률이 강력하게 높아진다. 평소에 귀찮아하는 성향이지만 이 억울함의 긁힘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디아블로3' 사건은 순도 100% 억울함과 오해의 집약체였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덤으로 말이다. 지금은 흐른 기간만큼 무뎌지긴 했다만, 내 인생에 가장 긁힌 사건이었다. 이 글에서도 평소의 에세이처럼 여기서 느낀 바를 나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러나 너무나도 순수하고도 강력하게 내 마음속에 사무쳐있는 사건이다 보니 무언가 느낀점을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다.


더불어 깨나 다양한 형태로 나의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살면서 터득하다 보니 지금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된 게 전부다. 그런 점에서 다음 기회에는 내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나열해 보겠다. 아무튼 여느 유튜브나 글처럼 마무리를 해보자면, 여러분들은 살면서 가장 강력하게 긁힌 적이 있는가? 나는 악마 사냥꾼에게 가장 강력하게 긁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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