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한 끼’

요리하며 알게 된 삶의 맛들_15

by 글쓰카이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아이와 책을 보다가,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해진 아이가 물었다.

“이건 뭐야?” “포도!”

“포도는 외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잖아. “


아이에게 포도를 알려주다가 문득 엄마가 좋아하시던 것이 떠올랐다.

‘맞아, 엄마가 포도를 좋아하셨지.’

새삼스레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혼잣말을 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늘 내가 먹고 싶은 것부터 떠올리고, 말하고, 요구하는

철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엄마가 된 지금은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먹으면 좋을 것을 먼저 생각하며 끼니를 준비한다.


그럼에도 가끔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에는,

남편과 함께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외식으로 나만의 작은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돌아보면, 우리 엄마는 그러지 않으셨던 것 같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묻거나 듣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포도와 국수뿐이다.

그 두 가지 음식을 떠올리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묵직한 생각으로 채워졌다.


내가 출산 후 몸조리르 위해 와주셨을 때도,

엄마는 내 아이를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시며,

오직 나를 먹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으셨다.

집으로 돌아가신 뒤에도 각종 반찬과 손질한 생선을 보내며

딸의 끼니를 챙기셨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엄마의 사랑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넘치고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삶의 태도를 비춰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같았다.


살아오면서 기억나는 순간을 다 되짚어봐도,

엄마에게 “엄마는 무엇을 먹을 때 행복하세요?”라고

진심으로 여쭤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딸의 끼니가 매번 걱정되어 양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오신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엄마는 챙겨 오신 음식들을 소개하기 바쁘셨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는 대뜸 어색하게 물었다.

“엄마, 오늘 저녁으로 뭐 드시고 싶으세요?”

엄마는 잠깐 놀라시더니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셨다.

“뭐 이거 가져온 거 먹으면 되지~”


그 순간 엄마의 대답에 잠시 화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미안함을 넘어선 깊은 반성이었다.

엄마에게 뭘 좋아하시는지 묻는 것이 이리도 어색할 일인지.

딸이 혹시라도 지갑을 열까 봐,

주방에라도 설까 봐 그저 있는 반찬 먹자고 하시는 모습.


나는 엄마가 ‘나의 엄마’라는 역할 뒤에 숨겨진

‘한 개인’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문득 또한 나 자신도 돌아본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 뒤로 한 채,

오직 자식이 좋아할 것만 고민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일이지만,

동시에 자식에게 묵직함을 남기는 짙은 그림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이 헌식 속에서 잃어버린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엄마! 제가 오늘 저녁으로 국수 해드릴게요. 엄마, 국수 좋아하시잖아요!”

“오~어떻게 알았지? 그런데 네가 국수도 할 줄 알아?”

“아유~ 그럼요~ 저도 이제 연차 좀 찬 주부예요!”


엄마를 주방에 얼씬도 못 하게 하고,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구수한 육수 냄새가 주방 가득 퍼져나갔다.

애호박과 당근을 썰고, 계란 지단도 만들었다.

끓는 물에 국수를 넣고 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올 때

찬물을 붓기를 두어 번 반복하며 나도 모르게 다짐했다.


앞으로 아이들의 끼니를 고민하듯, 나 자신의 끼니도 고민하고,

더 나아가 엄마라는 한 개인의 취향을 물어보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내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기억하겠다고.


엄마의 헌신을 거울삼아, 나는 배운다.

‘엄마’라는 이름 뒤에 나의 취향과 욕구를 숨기지 않고,

가족과 함께 나의 기쁨도 나누겠다고.


그날, 엄마와 나누었던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방에 육수 향을 퍼지게 한다.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구수한 육수 향 위에 내 큰 목소리를 가볍게 얹어본다.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국수! 오늘은 엄마도 먹고 싶네!

오늘 저녁 메뉴는 국수다! “


keyword
이전 14화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충분한 한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