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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Dec 16. 2015

이윽고 슬픈 외국어

글을 써나가며 상념을 정리하는 인간이다.


  연애를 하든,  사회생활을 하든,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닮아가려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나 자신이 싫은 적도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달리고 맥주를 더 맛있게 마시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라도 말이다.




  한동안 달리지 않다가 이번 여름부터 조깅화를 다시 신었다. 가을의 아침과 저녁을 느끼며 열심히 달렸다. 그러다 공교롭게도 달리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절판되었던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를 중고서적으로 읽게 되었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하루키의 색다른 통찰력이 재미있었고 마음에 들었다. 특히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은 연필, 물건에 어떤 이미지가 정착이 되면  그다음에는 이미지가 물건을 규정하게 된다는 건 색다르며 명확했다. (꼭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래서 하루키의 책을 한 권 더 읽기로 했다. 바로 <슬픈 외국어>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윽고 슬픈 외국어>이다. 언뜻 "이윽고"라는 말이 정확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사전을 찾아봤다.

  이윽고. [부사] 얼마 있다가, 또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슬픈 외국어? 무슨 뜻인지 좀처럼 이해가 안 갔다. 아마 초판 발행 후 다시 발행했기 때문에 "이윽고"를 붙인 건 아닐까? 그래도 부사 뒤에 명사가 따라오니 조금 어색하다. 부사 다음엔 동사가 오는 게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다른 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여하튼 제목은 그가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여전히 그때의 외국 생활에서 느꼈던 감정이 유효하다는 의미에서 <이윽고 슬픈 외국어>쯤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책을 쓴 건 1991년쯤이라고 하니깐 20년이 훨씬 더 지났다.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다르니, 책을 통해서 미국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냥 소설가, 하루키의 생각을 엿보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에는 열 몇개의 글을 모아두었는데, 그중에서 미국 동부지역(프린스턴)에서 느낀 백인들의 스보니즘(속물근성),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지나치지 않고 적절할 만큼 표현이 명확했다. 읽으면서 "아~ 맞다."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도 어렵고 내용도 어려웠다. 사실 내가 책을 대강대강 읽는 탓도 있지만 하루키의 외국생활을 하며 쓴 글이라 나의 성향으로는 공감이 쉽지 않았다. 우선 그와 달리 난 재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 외국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그의 고독감은 막연할 뿐이었다. 옮긴이의 작품 해설을 읽어봤지만, 그것도 대강대강 읽었는지 똑 부러지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읽고 난 다음-사실 공감이 부족해서 한번 더 읽은 다음- "역시 그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가졌다. 책의 본질과는 다르겠지만, 난 내가 느낀 점을 긁적긁적거려보겠다.


  이렇다 할 대단한 경험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점에서, 작은 것에서 재미나 슬픔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런 체험들을 뭔가 다른 형태로 바꿔서 알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이런 사람들이 소설가에 가까운 같다는 느낌이 든다.

P.220

  바로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소소한 일상에서 관점을 달리하고, 감동을 쉽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닐까? 거대한 음모, 진기한 경험, 환상적인 풍광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이번에 미국을 다녀왔는데, 그랜드 캐년 정말 크더라."를 듣고 나면, "아, 정말 큰가 보다"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대신에 "아침에 출근하는데 목욕탕 옆을 지나갔어. 그때 내 옆을 지나가던 아가씨 샴푸 향기가 얼마나 향긋한지, 지금도 코 끝에 남아있어."라고 하면 퇴근할 때 그 목욕탕을 옆을 가보고 싶어 질지 모른다. 나야 소설가가 아니니,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의 말에 박수를 치며 "옳다구나!"했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정말 영화의 한 장면보다 우수했다. 어느 날 야구장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다 힐튼의 2루타를 보고 소설을 쓰게 되었다니, 이 얼마나 광고 카피 문구같이 멋진가. 자전거가 그려진 브랜드 광고 카피 문구가 떠올랐다. "그녀의 자건가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 이 광고 카피보다 더 멋진 장면이 바로 그가 소설을 쓰게 되었다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순간 때문에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을까? 그건 단지 작은 불씨나 전기 스파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수많은 시간을 미래의 불안을 묵묵히 견디며 무언가가 되기 위해 기다려왔을 것이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확립하기 위한 시간과 경험이었던 거야, 그것은 특별하고 유별난 경험일 필요는 없어. 그저 아주 몸에 충분히 배어드는 경험이어야만 해. 나는 학생 때 무언가를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어. 뭘 쓰면 좋을지를 발견하기 위해 나에게는 칠 년이라는 세월과 힘든 일이 필요했던 거겠지. 아마도"

P. 226

  그 역시 롤 캐비지(외국 음식 정도)를 만들며 가게를 운영했을 당시 두렵고 불안했다고 한다. 그 시절 방황을 했으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글을 쓰기 위한 자양분이 되어주었고, 소설을 쓸 만큼 진기하거나 재미있는 경험이 많지 않음에도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롤 캐비지를 묵묵히 만들었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묵묵히 산다고 누구나 그처럼 유명인이 되는 건 아니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쯤은 되지 않을까? 외국에서조차 끊임없이 그만의 렌즈를 이용하여 관찰한 세상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만약 무라카미 하루키가 더 궁금하다면 이 책보다는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를 추천한다.



  글을 써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인간이다. 문자로 바꾸고 나서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쪽이 편할 때가 많다. (P. 17) 라는 그,

  난 글을 써나가며 상념을 정리하는 인간이다. 문자로 바꾸고 나서 시각적으로 사고하면 문제가 단순해질 때가 많다. 라고 말하는 나,

사람은 이래저래 다 비슷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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