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후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늘소망 Mar 22. 2016

전원 교향악

숭고한 사랑 뒤에 숨겨진 욕망이라는 민낯


  우리 인간은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고는 하나, 신의 노여움을 사고 여러 차례의 벌을 받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서 신이 인간의 타락에 얼마나 분노하였는지 어떻게 심판하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타락으로 표현하기엔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으니 말이다. 신에게는 타락으로 보일만큼 우린 욕망에 충실한 인간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남자는 sex 말고 무엇을 생각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무슨 내용일까 검색한 적이 있다. 내용은 없었다. 말 그대로 책장을 넘기면 하얀 백지가 나온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난 남자는 성욕의 노예라는 풍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디 남자만 이런 욕망의 노예일까? 우리 모두는 그저 갖가지 욕망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만.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지성과 영성을 갖춘 사람은 다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내외의 정치인, 법조인, 대통령 들만 봐도 혼외자식, 성추문, 횡령, 배임이 비일비재하며 간단한 검색으로 그 이름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종교인들의 성추문 역시 끊이지 않고 뉴스를 통해서 들려오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욕구에 충실한지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영성이 깊은 사람들은 더 자신을 낮추고 낮추는 것일 테다.


  아마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제목을 <전원 교향악>으로 짓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베토벤이 요양차 들렀던 곳에서 자연의 풍경과 아름다움에 빠져 작곡했다는 교향악 6번, 음악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우리는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의 내면은 욕망에 가득 찬 돼지우리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고 본다. 그는 냉소적인 작가였으니 말이다. 


  그럼 이제 소설로 들어가 보자. 예배를 보러 오는 성도가 30명 남짓인 시골 교회의 목사가 있다. 그는 자신이 맹인 "제르트뤼드"를 어떻게 돌보게 되었는지 내면 일기 1, 2로 나누어서 처참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어느 날 귀머거리 노파의 임종을 지키러 간 목사는 노파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맹인 소녀를 집으로 데리고 간다. 아내의 푸념에 길 잃은 양을 데리고 온 거라고 말하며, 그날부터 소녀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소녀의 이름은 제르트뤼드인데, 목사는 그녀에게 아주 작은 것부터 가르친다. 귀머거리 노파 아래에서 자란 맹인이니 말이다. 처음엔 그녀가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아 실망에 분노도 하지만, 친구의 조언을 듣고 더 열심히 그녀를 가르치게 된다. 

  사람들은 눈이 이미 녹아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 군데군데에서 다시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두껍게 쌓여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p. 34

  목사는 제르트뤼드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하며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내는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사랑을 베푸는 남편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그가 그렇게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것은, 그에게는,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리면 99마리를 놔두고 한 마리를 찾지 않겠느냐는,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제르트뤼드가 길 잃은 양 한 마리였던 것이다.

  그녀의 지적 성장에 연신 하나님께 감사를 외치며 제르트뤼드를 돌보던 그는, 자신의 아들 자크와 그녀가 키스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크는 제르트뤼드를 사랑하였고, 결혼하여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목사는 그런 아들에게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왜 결혼을 반대했을까? 자신의 며느리가 맹인이기 때문에 아들의 고생을 눈뜨고 볼 수 없어서일까? 그는 자크의 사랑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결정에 굉징한 불만을 가진다.

  양심의 직관만큼이나 믿을 만한 어떤 직관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혼만은 막아야 한다고 내게 주의를 주었다. p. 58

  도대체 양심보다 더 믿을 만한 그의 직관은 무엇이었을까?


  목사가 제르트뤼드를 알뜰살뜰히 돌봐가면서 그의 아내, 아멜리와는 서서히 멀어지게 된다. 소설 속에서 큰 아들이 스물살이 안되어 보이는 걸로 봐서 그들 사이가 소원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그런 부부 사이를 목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같은 삶을 살아가면 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가 얼마나 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또 얼마나 격리된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또는 되어버릴 수 있는지) 느껴야 했다. p.62

  둘 사이가 멀어진 상황에서 아내는 목사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게 된다.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제가 다 알려 드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p.63  


  양심의 직관보다 더 믿을 만한 그의 직관, 아내는 알지만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게 무엇일까?

  바로 사랑이었다.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제르트뤼드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잃기 싫어서 아들의 청혼이 불안했던 것이고, 남편의 마음이 이미 떠났다는 것을 아내를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남자 스스로는 몰랐던 것이다.

  요한복음 4: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에서 알 수 있듯이 제르트뤼드는 죄가 없었다.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남자를 위해서 자크 또한 떠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죄는 목사, 그에게 있었다.

  하나님, 만일 사랑에 어떤 구속이 있다면 그 구속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입니다. 오! 저의 사랑이 비록 인간의 눈에는 죄짓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에게는 경건하게 보인다고 말씀해 주세요. p.96

  그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그 사랑이 하나님에게는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의 사랑은 다르다고 자신의 사랑은 동정심이라고 그리고 제르트뤼드에게 자신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고백한다. 목사는 스스로 자신의 사랑은 숭고하다 생각하며 그것을 애덕으로 표현하고 있다. 

 왜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자기를 속였던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우리 욕망 안에 있을 것이다.   


의사의 도움으로 눈을 뜨게 된 제르트뤼드는 자신을 사랑해줬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목사를, 그의 아내인 아멜리를 두 눈으로 보게 된다. 죄가 없던 맹인, 제르트뤼드는 그녀가 보게 된 세상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죄의 고백과 함께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사실 그는 시골 교회의 목사로서 공명심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맹인 소녀를 돌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인간은 불완전하다. 아무리 지성을 가지고 있고 영성이 뛰어나더라도 세상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돌멩이로 쓰러트린 다윗은 하나님이 인정한 자였다. 그런 그 역시 자신의 장수 아내인 밧세바에게 빠져, 간음하고 그녀를 가지기 위해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한다.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되어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간음을 하며 죄를 짓는 것이다. 누구 하나 신인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하지 못하리라.

  작가 앙드레 지드는 목사의 타락을 보여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목사를 통해서 우리가 아름답다라고 말하는 인간의 모습 뒤에 숨겨진 그 민낯을 숨김없고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민낯을 보기 위해 얼마 전 읽었던 밀란 쿤데라, <농담>의 코스트가의 독백을 잠깐 인용하고자 한다.  그는 공산당에 쫓겨날지언정 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국영 농장으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그는 루치에란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 동네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였고, 마음에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던 코스트카는 그녀의 회복을 위해 갖은 노력과 정성을 다한다. 결국 그녀는 진정으로 회복하고 그리고 코스트카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코스트카는 고향에 두고 온 애정 없는 아내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루치에를 두고 다음과 같은 독백을 남긴다.


  나는 내가 루치에에게 주었던 정신적 도움이 이제 그 정체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은 그녀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원했던 느낌, 위로의 말을 하는 사제로 변장하고서 실은 여자를 유혹하는 사람같이 행동했다는 느낌.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그 모든 훌륭한 설교들이 오로지 가장 저열한 육체적 욕망을 감추는 겉옷에 지나지 않았다는 느낌, 그때 내가 성욕을 자제하지 못함으로써, 나는 맨 처음 내 의도의 순수성을 더럽힌 것이고 하느님 앞에 너무도 부끄러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농담> p. 328


  목사도 코스트카도 하나님 아래에서 누구보다 믿음에 충실한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 역시 인간의 욕망 앞에서는 노예가 되고 만다. 어디 이게 비단 소설 속에서만 그리고 남자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이어령 씨는, 소설은 우리들의 일상들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민낯이라고 했다. 단순히 소설 속 인물로 치부해 버릴 수 없을 만큼 소설은 우리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원 교향곡에 나오는 "목사", 농담의 "코스트카"는 바로 우리 기독교인 내지는 그냥 우리일 테다. 

  이렇게 우리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앙드레 지드, 사실 유명한 예술인 중에서 호모 섹스를 안 즐긴 사람이 없을 만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역시 그렇다. 그런 그가 어릴 적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모습은 잘못이라 하면서 그들 역시 죄짓는 모습에 인간의 민낯을 목도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인간과 교회의 모순을 그린 전원교향악을 썼을리라 본다. 

  <전원교향악>은 인간의, 나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게 되어 불편했지만 한편으로 그렇기에 읽음으로써 스스로가 더 낮아지고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천국은 소망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구원을 받은 건 바로 도둑이었다. 오히려 도둑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죄는 죄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로 거듭남이 아닐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설국(雪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