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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01. 2016

달과 6펜스

나에게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달"은 무엇일까.

  <달과 6펜스>


  제목 그 자체만으로 무척 관능적이고, 그 안에는 천일야화 같은 강렬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책을 즐기는 사람은 책 속의 책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나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달과 6펜스>가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폴 고갱이라고 추측할만한 사람이 언급이 되고, 이 소설은 폴 고갱을 모티브로 쓰인 거라고 한다. 이 정도면 읽어야 할 충분한 까닭이 될 거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어렵다. 읽는 건 괜찮았는데, 느끼는 게 어려웠고 그걸 글로 쓰려니 더 어렵다. 보통은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의도를 어림짐작할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독후감을 쓴다. 작품 해설은 나의 생각과 다를 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마지막에 읽어본다. 그런데 마지막 소절을 읽고 나서 한치의 고민도 없이 "작품 해설"을 읽었다. 내가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의 해답지를 넘기는 기분이라 찝찝했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의 무지몽매함에 분통은 나지만 "작품 해설"을 읽고 나니, 그 궁금함이 일부분 해소가 되고 내용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미술관에 가서 가이드의 안내 없이 백날 미술작품 앞에 있어본들 다리만 아프고 오히려 작품에 대한 거부감만 들뿐이지 않겠는가.

 <달과 6펜스>, 주인공인 스트릭랜드(화가)의 작품을 보고, 세간의 반응이 차가웠던 것은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었던 것이고, 난 <달과 6펜스>를 볼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문명화된 삶을 포기한 남자

  우린 매일같이 문명화된 삶 속에서 수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 윤택함이 우리를 안락하고 행복하게 해준다. 아무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자연에서의 삶이 주는 기쁨을 말해주어도 우리는 이 문명화된 삶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런데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태곳적 삶으로 돌아간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런던의 주식 중개인이다. 잘생기고 예쁜 아들과 딸의 아빠이자 가정적이며 상류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사는 여자의 남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내에게 이별 통보만을 남긴 채 파리로 떠난다. 화가가 되고자 간 파리에서, 그가 그린 그림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돈이 없어 허구한 날 굶어야 했지만, 그림을 팔고자 하지 않는다. 돈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에게 그림은 지겨운 밥벌이 수단이 아닌 자신의 근원적 욕구이었다. 파리에서조차 자신의 예술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남태평양 타이티 섬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조차 세상의 문명과는 단절된 외딴곳을 찾아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삶의 종국에는 문둥병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마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광기 어린 그의 삶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그는 문둥병으로 실명한 채로 그림을 그렸고, 그의 관능에 의지해서 그린 그림은 "낙원과 지옥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는 김훈 작가의 말처럼 최후에 그를 보러 간 의사로 하여금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예술가의 근원적 욕구는 예술 그 자체이다.

  그는 자신의 광기 어린 예술적 욕구를 위해서 가족을 버리고, 양심의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아플 때 도와준 친구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가고, 그리고 그렇게 데리고 간 남의 아내마저 자살로 이르게 한다. 세상의 도덕적 관념으로는 천인공노할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원한 적이 없다.

  관능적인 사람이면서도 관능적인 일에는 무관심했다. p.108

  오히려 그에게 가족, 친구, 여자, 그리고 사회 따위의 문명화된 제도는 그의 예술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에 방해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로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킨다. 심지어는 문둥병에 걸려 고통 속에 있을 땐 의사의 치료마저 거부한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문명화된 사회의 부산물이며, 그것들은 그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가치 있는 것은 오직 예술이었으며, 그 예술은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근원 같은 것이었다. 오로지 그 예술을 위해 그는 인생을 산다. 인생의 가치를 오직 예술에만 두었던 것이다.


  문명화된 삶 속에서 우린 우리들의 본능적 욕구를 잃고 산다.

  다른 길의 삶에서 더욱 강렬한 의미를 발견하고, 반 시간의 숙고 끝에 출세가 보장된 길을 내동댕이치자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갑작스러운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더더욱 큰 인격이 필요할 것이다. <중략> 자기가 바라는 일을 한다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조건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그것이 인생을 망치는 일일까? 그리고 연수입 일만 파운드에 예쁜 아내를 얻은 저명한 외과의가 되는 것이 성공인 것일까? 그것은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 사회로부터 받아들이는 요구,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를 것이다. p. 259


  작가는 화자(나레이터)를 통해서 스트릭랜드의 삶이 결코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자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미래가 보장되어있는 도시 병원의 의사를 포기하고 자신이 살고픈 곳에서 보건국 관리로 지내는 것에 옳고 그름이 없다고 말한다. 인생이란 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이지. 문명화된 잣대로 판단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어쩌면 문명화된 삶은 우리의 욕구마저 규격화, 획일화시켜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스트릭랜드라는 광기 어린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 예술적 가치를 말함과 동시에 우리의 문명화된 제도 속에서 행복과 삶의 가치를 획일화시키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돈과 명예 등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은 "6펜스"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고,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들-그것이 예술이든, 소박한 희망이든, 원대한 꿈이든 상관없다.-이 중요하고 그것이 바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달"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달"은 무엇일까.

  비록 문둥병으로 시력을 잃고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깨닫고 그 과업을 완수한 남자의 삶에는 경탄의 박수를 보낸다.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미술 작품이 있는데 바로 올랭피아이다. 정확한지 다시 찾아보려니 귀찮긴 한데, 아마도 맞을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

  그런데 나는 아무리 그 그림을 보아도 그것이 왜 명작인지 모르겠다. 그건 분명 내가 안목이 없어서일 것이다. 미술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궁금하고 그런 기쁨을 향유하는 지성을 가진 자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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