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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09. 2016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문학에서 찾은 인간의 성품에 관한, 아름답고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책으로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이 책은 이어령 박사가 문학에서 찾은 인간의 성품에 관한, 실로 아름답고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어령 박사의 80초 생각 나누기가 몇 시간으로 늘어났다고 생각하면 된다.


  소설은 시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음악처럼 신비한 힘도, 드라마처럼 숨 막히는 스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팩트나 수학처럼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공식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거리로 메고 다니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삶의 민낯을 볼 수 있습니다. 알면서도 숨기고 있었던 것들, 자신도 느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한 것들을 소설을 통해 우리는 체험하고 확인합니다.  p.6


  가면으로 덮인 우리 삶과 그것이 투영된 소설

  이어령 박사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서문에 나오는 첫 소절이다. 소설은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을 제외한 음악, 영화, 그림 등이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은 글로써, 후자들은 색과 음으로써 우리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우리들은 하루 중 대부분을 타인들과 함께 보낸다. 직장, 학교, 동네, 시장 등 그 어디서든지 우린 타인과 함께 생활한다. 시장의 상인은 손님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웃음을 지어야 하고, 손님은 진상 고객이 되지 않기 위해 역시 미소를 지어야 한다. 위선(僞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상황에 맞는 여러 가지 가면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위선이 나쁘다고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는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삶 자체가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에서는 자신의 본 모습을 성찰하기 위해 타인으로 부터 철저하게 자신을 격리시킨다.

  결국 이러한 우리 삶의 민낯을 투영하고 있는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처럼 소설 속이 작가의 의도 역시 숨겨져 있다. 사람을 사귀면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듯, 소설 속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 소설이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인간사를 축척하고 있는 문학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그런 문학을, 이 시대의 지성인인 이어령 박사가 인간에게서 영성이라는 것을 찾아가며 해석해준다.


  영성이란

  이어령 박사는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 <말테의 수기>, <탕자, 돌아오다>, <레미제라블>, <파이 이야기> 안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혼자 변기에 앉아서 편안하게 창자를 비울 때, 가면을 벗은 나를 발견하듯, 소설 속 인물들의 가면을 벗겨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의 참모습은 어떨까? 이 박사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영성"을 발견한다.

  "영성(靈性)"이란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다. 신이 우리에게 짐승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고 하나, 우리 역시 지각 능력이 있는 동물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 한낱 특수한 종에 지나지 않는 인간은 그 아무리 대단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완벽할 수 없다. 수많은 정치가, 지성인, 종교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성추문 등의 사건에 연루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 우리가 신령한 품성을 가지기 위해선 자아 성찰로만은 불가능하다. 바로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영성"은 바로 우리를 향한 "신의 축복 내지 사랑"이다.


  영성은 언제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신의 사랑을 받아 영성을 발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이어령 박사는 다섯 개의 소설을 통해 설명해준다. 아버지를 살해했던 아들, 아버지에게 재산을 받아 모두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간 아들, 빵 하나 훔쳐 19년간의 감옥살이로 세상에 증오가 가득 찼던 장발장, 227일간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인간의 모습은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말테의 수기는 뺀다. 이 박사는 말테의 수기에 대해 극찬을 하면서, 대학생때 말테의 수기를 읽은 이와 읽지 않은 이로 구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난 말테의 수기를 읽다가 말았으며,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에서 역시 이해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넘어간다.


  그럼 네 개의 소설 속으로 다시 돌아오면, 우리가 "신"의 사랑을 받으며 영성을 발할 때는 "신"이 필요한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 필요한가? 행복하고 살만할 때인가? 아니다. 친부를 살해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을때, 망망대해에서 죽음을 목도했을 때야지 우린 신을 찾게 되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내면에서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에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다 받은 후, 아버지의 안락한 집을 떠나 광야와 같은 세상 속에서 방탕하게 돈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 나온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극진하게 맞이하며, 사랑을 베풀어준다. 그런데 그때, 그 모습이 못마땅한 장남이 있다. 그 자신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말씀을 따라 살았음에도 탕자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그는 안락한 집에 살았기 때문에 결코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탕자야말로 아버지의 부재로 고통받고 사랑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만 신의 사랑과 함께 영성이 깃드는 것이다. 그리고 막내 역시 집을 나가며 소설은 끝이 난다. 왜 안락한 집을 나두고, 밖으로 나가는 것일까. 우린 결코 안락한 곳에서는 "신"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건 그가 쓴 다른 소설과 성장배경을 알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조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유리창을 깨고 빵 하나를 훔친다. 훔친 빵 하나로 5년 거기에 몇 번의 탈옥으로 결국 19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19년간의 노역 끝에 받은 돈은 그가 훔칠 은그릇의 값어치만도 못하였다. 고된 징역을 마치고 나온 세상에서, 그는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노란 통행증을 받게 된다. 그는 자유를 만끽하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모멸감을 느끼며 여관에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어 찾아간 감옥에서, 심지어는 개집에서 마저 쫓겨난다. 다행히 미리엘 주교의 도움으로 간신히 밥도 먹고 잠자리를 얻었지만 그는 은그릇을 훔쳐 달아난다. 경찰에서 잡혀 주교의 성당으로 돌아간 그곳에서, 주교로부터 은촛대과 함께 용서함을 받는다. 그렇게 길을 다시 나선 장발장은 오솔길에서 꼬마 아이가 흘린 은전 한 닢 마저 빼앗고 만다. 그는 순간,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되고 바로 그 순간이 그에게 "신"의 축복이 내리게 된다. 그 이후 그는 "영성"이 깃든 삶을 살게 된다.



  문학평론에 가까운 종교서적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는 종교서적이라고 하기보다, 지성인이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과 참된 교회의 역할을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해준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 <탕자, 돌아오다>에서는 "신"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가라고, <레 미제라블>에서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에서 "영성"이 깃을 수 있다고, <파이 이야기>에서는 "신"에 대한 믿음가지라고 이어령 박사는 안내해준다.

  그러나 다소 안내가 체계적이지 못한 인상은 가지는 것은 아마 글투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이어령 박사가 편안하게 이야기식으로 말해주기 때문은 아닐까한다. 어릴적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가 재미는 있지만, 그 내용이 순차적이지 않아 헷갈린 적이 있다. 만약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에서 소개된 다섯 가지의 소설을 먼저 읽고,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 순서가 바뀌어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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