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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15. 2016

고약한 니체, 음험한 그의 세계.

그런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해한 그.

책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고약하고, 그의 책은 음험하다. 그래서 위험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것들이 나의 머리와 심장을 뒤흔들어버린다. 그러나 곰곰이 읽어보면 고약한 니체의 음험한 사상에는 납득한 말한 철학적 사유가 존재한다.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해 본다면 분명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렌즈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니체는 수많은 니체로 이루어져 있다.

니체의 생애에서 의미를 갖는 건 매번의 탄생과 죽음이지, 사람들이 묘비 같은 데 써두는 연도가 아니다.
p. 21
우리들은 시작과 끝만이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왜 만들어 놓은지도 모르는 가치와 규범에 복종하고, 미리 정해져 있던 글을 따라 의미 없는 생을 이어간다면 그 생은 죽음보다 비참한 게 아닐까. 그러니깐 니체는 적어도 자기 삶의 많은 순간들에서 주인이었다. p. 22


  니체(1844~1900)는 자신의 생애에서 여러 번의 니체를 경험한다. 수백 명의 니체를 말이다. 그것이 바로 탄생과 죽음이다. 자칫 잘못 이해하게 되면 정신분열과도 유사한 그의 자아관은 새로운 니체의 탄생을 위한 낡은 니체를 부수는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그 작업은 1877년부터 1881년 사이에 많이 이루어지는데, 많은 의사들은 그가 평상시 앓고 있던 조울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고도 한다. 그가 조증이 우세한 상황에서 넘치는 자기애로 수많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을 낳았는지는 몰라도, 그가 이 시간에 남긴 것들로 추정해보건대 어쩌면 이때의 체험 때문에 위버맨쉬(초인)으로의 변신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니체의 파괴와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니체는 니체를 파괴했고, 니체로 변신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의 파멸과 동시에 출발이다.

  차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유명한 종교이며, 이러한 종교로는 유대교, 기독교 등이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는 다르다. 그는 새로운 것을 위해서 낡은 것을 부수는 행위를 즐겼다. 그러니 페르시아의 그것은 니체의 그것으로 죽고, 새롭게 탄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국,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철학적 사유로 탄생한 인물이며 그 인물을 통해서 그가 깨닫게 된 것들을 설파하고 있다. 그러니 니체는 니체를 파괴하고, 니체가 되었고 그리고 다시 변신하여 차라투스트라가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선물이다.

  원작의 부제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다. 모두를 위해서 쓴 책이지만, 이해할 수 없거나 아무나 읽을 수 없다는 그런 뜻이다. 이 얼마나 오만 방자한 문구인가. 그러나 읽어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렌즈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 물론 그 선물은 읽는 독자의 선택이다. 받고 간직할 수도 있으며, 돌려주거나 길바닥에 버릴 수도 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이 명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준 말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들어보면, 괴로움만은 절대 아닐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의 수행을 거쳐 기쁜 복음을 전해주러 세상으로 돌아온다. 바로 "신은 죽었다."이다. 우리에게 괴로움인 이 소식이 어떻게 기쁜 복음일 수 있냐면,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신이 존재함으로 인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행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리의 존재의 타당성을 부여하는 "저 세계"로 양분하고 있다. 그리고 "저 세계"는 "이 세계"에게 그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 쉽게 말해면 이승은 저승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불행한 것은 저 세상에의 신이 내리는 벌이나 알 수 없는 목적에 의해서 행해지는 거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안 되거나, 태어날 때 신체의 불구를 가졌거나, 아주 힘든 상황에 놓였거나 하는 것들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 세상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있냐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에 빠진 우리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없다고 그리고 저 세상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깐 선악과 미추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의 고통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음험하며 기쁜 복음인가. 그래서 니체는 우리에게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사실 많은 종교 단체에서 "저 세상"의 논리로 "이 세상"을 구속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러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면 반가운 소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반대한다. 위대한 철학자의 음험한 사상에는 가히 대적할 수 없어 백기를 들어야 하지만, "저 세상"에 의해서 "이 세상"에 속박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신앙관이지 결코 그것을 신의 죽음으로 몰고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낙타 보다는 사자 그 보다는 어린아이가 되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나온다.

  그중에서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낙타는 그 뜨거운 사막 위를 묵묵히 걸어가며, 더러운 구정물을 무거운 짐을 지고 건너며, 목마름을 견디면서 언제나 주인을 위해 무릎을 꿇는 동물이다. 그러니 언제나 낙타는 "예"라고 하는 동물이다. 그에 비해서 사자는 "아니오"의 동물이다.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은 으르렁 거리며 절대 하지 않는 동물 말이다. 마지막 어린아이는 언제나 해맑게 웃는다.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을 웃으며 거절하기에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인물이다. "아니오"라고 하지만 사자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어린아이를 긍정의 인물로 묘사한다. 낙타의 "예"는 긍정이 아닌 부정이라는 것이다. 낙타는 자신을 부정하며 그 고난을 견디기에 그것은 긍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니오"라고 싸우는 사자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부정하는 행위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고, 그것은 망치로 예전 것을 부수고 새것을 만들었기에 긍정의 표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회귀는 즐거울 수 있다. 그러니 운명을 즐겨라.

  아인슈타인은 "신은 우주를 대상으로 주사위 놀이 따위를 하지 않는다."라고 했고, 차라투스트라는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도박대"라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사위 놀이가 영원한 회귀와 연관이 깊다.

  영원한 회귀는 말 그대로 죽고 난 다음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그 인생을 그대로 산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지겹고 두렵고 무겁기만 관념인데, 니체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깐 끝없이 반복되는 행위에 즐거움과 새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주사위를 들어서 설명해준다. 주사위를 던지는 그 행위는 1~6 사이의 눈 밖에 없지만, 언제나 어린아이들은 그 주사위를 던지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번 같은 동작에 새로운 기대감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영원한 회귀 사상에 비추어 본다면, 그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니 니체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 순간이 중요하고 그 상황을 즐겨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앞서 이 음험한 철학자의 사상에 대적한다는 것은 애당초 게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니체가 세상은 신의 주사위 놀이터라고 말한 것에 비추어 보면,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신의 존재로 이 세상을 똑바로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주인이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온전한 주인으로 오롯이 살라고 말이다.

  그러니 "신은 죽었다."라는 신의 사인(死因)에 나는 부인할 수가 없다. 솔직히 저 세상의 삐뚤어진 렌즈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신이 없다기보다는 신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삶을 그르치지 말라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고행이니 불행이니 그 따위 말로 자기위안을 삼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해한 그.

사실 니체는 병약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병약한 신체가 때로는 자의식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위험한 사상가, 음험한 철학자의 명제와 관념은 곱씹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지만.


  <출> 그린비, <저>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막상 읽어보려다 괜히 바보같이 글자만 읽고 책꽂이에 모셔두는 게 억울하여, 니체 입문서를 찾아 서점으로 갔다. 처음에는 ebs 인문학 니체 강의를 했었던 이진우 교수의 책을 사려고 했으나, 대충 훑어보니 조금 어려워 보였다. 난 니체와 그의 책에 대한 적당한 해설서가 필요했다. 그러니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번역본-한글이라도 다 같은 한글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한글이 무수히 많다.-을 원했다. 그래서 고른 책이 바로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철학에 무지몽매하여 이 책 또한 쉽게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언제든 책꽂이에서 원작을 읽어볼 용기가 생겼다. 나 같은 교양 독서인에게는 원작보다는 이러한 입문서가 훨씬 더 낫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안다. 나 같은 초보는 입문서보다 실용서 그보단 전문서적이 더 탐이 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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