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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19. 2016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첫사랑에 대한 환상, 첫사랑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 사랑의 본질...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


  각각의 나이가 서른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결혼식을 올리고 침실에 포개어 누웠다. 서로에게 부질없는 질문을 날린다. 당신 첫사랑은 누구냐고, 그러면 이내 상대방은 당신이라고 화답해 준다. 그들은 만난 지 고작 한두해 밖에 안 되었는데, 어떻게 서로에게 첫사랑이 될 수 있는가. 우습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으로 귀결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서로에게 첫사랑이 되었으면 하는 유치한 바람에 그들은 첫날밤에 처음의 첫사랑을 망실시키고, 서로에게 새로운 첫사랑을 만들어 준다. 첫사랑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사랑의 순결함을 갖고 싶어서. 갖은 이유로.

  그 정도이다. 그리고 그만큼이다. 첫사랑이란.

  우리가 이토록 첫사랑에 대한 부질없는 환상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처음이기에 순수하고 어설프고 깨끗할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어디 깨끗하기만 한가. 사랑은 아주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있어 그 누구도 섣불리 정의 내리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수많은 아포리즘이 있어도 그건 대중성은 가질지언정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개별성은 띄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사랑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성인들의 사랑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 한 소년이 연상의 여자를 사랑하며, 그리고 그 여성과 다른 남성 간의 사랑을 지켜보며 사랑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깨달아가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자정을 넘긴 시각,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서로의 첫사랑에 대해 물어보며 시작한다. 그중, 주인공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는 자신의 첫사랑은 평범하지 않아 그것을 노트에 적어서 읽어주겠다고 한다. 두 주일 후, 페트로비치가 읽어주는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는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이 아니라 어지럽고 복잡한 어른의 사랑이다.


  어느 날 페트로비치는 집 주변을 산책하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된다. 그 여인은 몰락한 공작의 미앙인 딸로서 그 다음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곁채에 이사를 온다. 16세의 소년, 페트로비치는 21세의 지나이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나이다 주변에는 그녀의 사랑을 구애하는 몇몇의 성인 남자들이 있었고, 페트로비치는 그 속에서 성인들의 사랑을 보게 된다. 성인들의 사랑을 보며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러런 중 지나이다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되고, 페트로비치는 그녀를 빼앗기 위해 작은 칼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연적은 바로 자신의 아버지. 그는 칼을 떨어틀이고 만다. <이 소설은 결말을 알고 읽어도 된다. 심지어 소설의 서문에서도 결말을 읽을 수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은다소 이해가 안 되는 설정, 연적이 아버지라는 것과 몰락한 집안의 딸에게 목을 매는 남자 주인공, 그리고 독자도 성인이지만 다소 야릇한 성인들의 음험한 사랑놀음이 등장한다.


  1. 왜 첫사랑의 연적이 아버지였을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자신의 연적으로 느끼며 또한 아버지를 선망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상냥한 듯 무심하게 나를 대했고, 어머니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비록 내가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말이다. <중략> 나는 아버지보다 더 기품 있고 침착하면서도 자신감에 찬 독재자를 본 적이 없다.

  <중략>

  내 안의 피는 방황했고, 심장은 달콤하면서도 간지럽게 죄어들었다. 나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며 두려워했다. 모든 것이 놀라웠다.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p.33  

  이 소설은 이반 투르게네프가 조금의 윤색도 가하지 않은 실제 이야기라고 말한 자서전적 소설이다. 그러니 주인공 페트로비치는 투르게네프라고 믿어도 될듯하다. 그런데 그의 어릴 적 어머니는 아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연인 간의 사랑(eros)은 아니더라도 본래 남자아이는 태어나서 어머니와 첫사랑을 하고 아버지와 연적이 된다.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빼앗기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부재로 인해 제대로 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선망의 대상이며 동시에 연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빼앗을 여성이 없으며, 아버지로부터 지킬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열렬히 사랑을 갈망한다. 그의 피는 애당초 받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늘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첫사랑에 대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은 옆집으로 이사 온 지나이다이다. 그는 당연히 준비된 만큼 빠르게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와의 사랑의 연적이 아버지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페트로비치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겐 첫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바로 두 번째 사랑부터 시작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꽤 사랑스러운 어떤 귀족 아가씨를 처음으로 쫓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처음이 아닌 듯 익숙한 태도로 그녀에게 구애를 했었지요. 나중에 다른 아가씨들을 쫓아다닐 때처럼 말이지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사람은 여섯 살 때의 나의 유모였습니다. <후략> " p.30

  소설 초반에 세 명의 남성 중 한 명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그는 첫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바로 어릴 적 어머니의 역할을 맡았던 유모로부터 첫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의 연적을 아버지와 대결 구도로 설정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부재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표현일 것이다. 더군다나 마지막 아버지와의 결투에서 칼을 떨어트리는 것이며 여전히 그를 흠모한다는 건. 분명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2. 사랑에 빠진 이는 상대방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의 노예이다.

  21살의 지나이다는 예쁘다. 내 친구 중에서 하나는 농담 삼아 술만 마시면 여자는 고시 3개 패스한 것보다 얼굴 예쁜 게 낫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남자건 여자건 외모가 출중한 건 타고난 복이자 불운일 수도 있다. 소설 속의 지나이다는 예쁘지만, 몰락한 집안의 딸이다. 당시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남성을 고를 권리와 의무가 분명히 있었을 테다. 그런 그녀에게는 어린 패트로비치 보다 어른 남자의 사랑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그러했을 것이다.

  "나이 든 홀아비인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면 이 집에 와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무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무얼 하든 아무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살갗은 아직도 부드럽습니다. 여기 공기는 당신에게 해로워요. 내 말을 믿으세요. 감염될 수 있어요." p. 86

  지나이다에 접근한 남성들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기보다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접근하였다. 그런 몇몇의 남성과 지나이다의 사랑놀음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소년에게 좋지 못한 경험이 된다. 또한 그녀의 사랑 역시 소년에게 좋지 못하다. 소년 자신도 자신에게 충고를 해주는 남성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에 빠진 소년은 지나이다의 노예가 아니라 자신을 둘어싸고 있는 감정의 노예이다.


  그러니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랑의 묘약, 사랑의 신 에로스(큐피드)의  화살이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우면 그때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다는 나의 감정이 어떠한지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 전체가 떨리더니 웃기 시작했다. p.37

이유는 모르나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던 그 장면이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랐다. p.39

그녀가 그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것이 매우 기뻤지만, 한편으로 나는 약간의 모욕감을 느꼈다. p.46

그렇게 그녀를 바라는 보는 사이에 그녀는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p.47

갑자기 슬퍼졌다. 울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경기병에게 질투가 난 것이었다. p.51

나를 대하는 지나이다의 태도 때문에 나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옆을 지나던 그녀가 전처럼 상냥한 눈빛을 하며 재빨리 내게 속삭였을 때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p.58

나를 바라보는 너무나 선명하고 달콤한 그녀의 눈길에 내 심장은 터질 듯 요동쳤다. p.62

     주인공 페트로비치는 지나이다를 만나 갖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첫사랑은 아름다움보다는 혼란스러움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으로 시작된 사랑은 이유 없이 그를 흔들기 시작했다. 기쁨과 모욕감, 소중함과 슬픔 그리고 질투, 놀라움과 흥분 등 아주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감정과 그 감정의 본질을 알아간다.


  3. 복잡한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지나이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페트로비치는 성인들의 벌칙 게임을 보게 되고 그리고 함께 참여한다. 그 게임은 키스가 적힌 종이를 뽑는 이가 지나이다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는 놀이이다. 페트로비치는 벌칙게임과 남성들의 구애들을 보며 사랑의 본질을 목도하게 된다. 종이를 뽑은 페트로비치에게 종이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 남자. 남자들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는 지나이다. 그리고 지나이다에게 꽃으로 이마를 맞으려는 남자들. 자신의 뜻대로 남자를 좌지우지하는 지나이다.  

  웃음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귀족 집안에서 건전한 교육을 받으며 외아들로 자란 소년인 내게 이런 소음,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 격식이 없고 거의 난폭하기까지 한 흥취, 모르는 사람들과의 이런 교제는 내 머리를 강타했다. p. 63

사랑을 돈으로 사려는 남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삼는 여자, 사랑을 동반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에 사랑을 느끼는 남자, 아버지의 외도를 편지로 어머니께 고발한 남자를 보며 페트로비치는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순수하고 깨끗했는지 모르나 그가 깨닫게 된 첫사랑의 본질은 폭력과 소음, 무질서, 쾌락, 기만, 질투와 소유욕 등의 미묘한 감정들이었다.


  더군다나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외도는 사랑의 본질을 더 여과 없이 보여준다.

  아버지가 코트의 앞깃에서 먼지를 털어내던 채찍을 갑자기 치켜들었다. 그리고 팔꿈치까지 소매가 올라간 지나이다의 팔을 날카롭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지나이다는 몸을 떨고는 말없이 나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나이다는 몸을 떨고는 말없이 나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팔을 입술로 가져가 붉어진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p. 145

  페트로비치는 아버지의 외도를, 아버지가 지나이다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그녀는 그것에 분개하기보다는 입술로 받아들이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소년은 충격에 휩싸이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를 때리고, 그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지나이다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자신만의 폭력을 가했던 것이다. 사랑에는 가학성이 존재한다. 그것이 겉으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사랑은 가학적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것 역시 사랑의 오묘한 성질이다. 소년은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사랑, 성인들의 사랑에 대해 알아간다.

  시간이 흘러 지나이다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게 된다. 그러다 출산 중 죽고 마는데, 소년에게는 그것이 첫사랑이었다.

  무언가 가슴에서 나를 떠미는 것 같았다. 그녀를 볼 수도 있었는데 보지 못했고, 이제 결코 볼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생각이 강하게 나를 비난하며 아프게 했다. p. 150     

  페트로비치에게 첫사랑은 강한 뇌우처럼 금세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첫사랑에 대한 환상에 젖어 여전히 첫사랑을 갈구하는 것보다는 그 첫사랑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첫사랑. 나는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고 지금 사랑을 하고 있을까. 고민해보아야 할 테다.


  이반 투르게네프 <첫사랑>은 서문까지 합쳐도 길지 않은 중편 소설이다. 그런데 이동하는 차 안에서 급히 읽다가 보니 놓친 게 많다. 이 짧은 소설에 놓친 게 많다는 것은 스토리가 굉장히 함축적이며 표현이 응축적이라서 그럴 테다. 그래서 읽고 난 다음에 이게 뭐지 라는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분석을 해 보았다. 전문가가 아니니 이게 맞을지는 모르겠다. 이걸 독후감이라고 해야 할지도 말이다. 그러나 혹시나 이 긴 독후감을 끝가지 읽어준 분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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