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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Apr 30. 2016

라면을 끓이며

그의 필력때문에 부담스럽지만 확실히 읽는 묘한 맛이 있다.

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읽고, 독후감을 쓰다.


소설가 김훈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그중에서 <남한산성>을 가장 좋아한다. 

그해 겨울,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갈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남한산성>

최명길과 김상헌, 김상헌과 최명길

역사적으로 극명하게 대립하였던 두 인물에 대한 그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그의 필력은 세상과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고자 하였고, 힘이 넘쳤으며, 때로는 가벼우며 아름답기도 하였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p. 374

신문기자 출신인 그는 세상을 비범하게 바라보며 그 의미를 찾아 헤맨다. 그 행위의 가치 유무를 떠나서 그는 그러하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 그건 굉장히 피곤하며 슬픈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니 그의 글 역시 흥미롭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 그리고 우리 사회의 시류와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표현대로 단순한 허영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관심에는 아픔이 묻어나기 때문에 한없이 무거우나, 글로써 표현되어질 때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니 허영심이 아니라 통찰이라고 하자. 

김훈 산문 <라면을 끓이며> 역시 그러하다. 그가 평상시 가지고 있던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해 놓았다. 섣불리 읽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생각은 남다르기 때문에 읽고자 하는 구미를 당긴다.


뚱뚱한 김밥의 옆구리가 터져서, 토막 난 내용물이 쏟아져 나올 때 나는 먹고 산다는 것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비애를 느낀다. p. 15

그냥 가볍게 사 먹을 수 있는 한 줄짜리 김밥에도 요즘은 만원을 육박하는 가격만큼이나 수많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우리가 먹고사는 인생도 그러하다. 매사가 간결하고 간단하지가 않다. 길거리를 나가면 수많은 뷔페식당들이 즐비하며, 식당에는 수십 가지의 메뉴판으로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한다. 요즘은 단순한 삶을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복잡하고 너저분하다. 그곳에서 슬픔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고씨네 김밥집에 가서 돈가스 김밥을 먹지 못한다. 그 김밥 속에 가득 차있는 재료들이 나로 하여금  욕심에 버거워하는 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가장 간단한 김밥을 먹는다. 나의 삶 또한 간결하고 단순하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의 내용을 억압과 사물성이 아니라, 자유로 가득 채유는 여자가 아름답다. 그런 여자가 살아 있는 여자고, 살아가는 여자고, 사람을 영위하는 여자다. p.242

남자에게 여자란, 관능의 대상이며 정복의 정점이며 함께 하고 싶은 동반자이며, 미안하지만 엄마의 역할마저 한다. 그러나 남성에게 여성의 개별성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익명의 여자에게 끌리는 수많은 남성들로 인하여 여성들은 화장을 하며 그 화장 속에 자신의 개별성을 숨긴다. 그 보편성 안에서 자신을 상실하고, 아름다움을 세상의 잣대로 칼질하고 그 속을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채우고 만다. 그러한 획일화는 아름답지 못하다. 이건 요즘 사회에서 비단 여자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러니 여자여,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런 남자들을 믿고 살다가는 한평생 몸의 감옥, 광고의 감옥, 여성성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p. 246

그러니 그 화장이란 도구에 너무 속박되지 말아라. 화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익명의 여성에서 끌리는 등신 같은 남성에게 현혹되지 말고, 자신의 개별성을 찾아 살아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사는 사람이고, 멋있는 여성이다. 맞는 말이다. 남자도 그러해야 한다. 

문명화된 우리 사회에는 그런 것들의 아픔이 분명히 있다. 그건 남자이든 여자이든 다르지 않다. 나를 잃어버리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명화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지만, 모든 것이 규격화되어있으며 획일화시키고 만다. 꿈과 사랑마저 규격화되고 만다.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삶을 원한다. 그것을 평범한 삶이라고 말하는데, 30평대의 아파트에 중형차 한 대 정도 굴리면서 가끔 여행도 다는 것 말이다. 결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나는 <라면을 끓이며> 3부의 여자 1~7을 읽으며 위와 같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 김훈은 여자를 읽어내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나였다.

아줌마는 세월과 더불어 늙어가면서 여성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사내들의 성적 시선의 사슬을 끊어버린 자유인의 이름일 수도 있다. p. 260

김훈은 여자여, 속박에서 벗어나라. 그릇된 여성성으로 유방수술을 하지 마라. 그리고 마음껏 여체를 뽐내라. 그것은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꿈과 이상마저 규격화된 나의 모습이 처량하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러하여 종국에는 자유를 위한 삭발까지 감행하고 싶게 만든다. 그렇게 당당해지는 것은 한 여름에 여자가 짧은 옷을 입고 다니는 당당함에 비견될 만큼의 자신감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라면을 끓이며>는 줄거리가 있는 소설이 아니라 산문집이다. 그런데 산문과 수필의 차이는 없어보이는데, 수필이라 하지 않고, 산문이라 한 것은 묘하게 그와 잘 맞는 느낌이 든다. 사회의 아픔과 역사의 무거움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 중언부언해서 미안하지만, 김훈의 산문 <라면을 끓이며>는 그의 필력때문에 부담스럽지만 확실히 읽는 묘한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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