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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y 01. 2016

레 미제라블

방황해라, 태만해라, 죄를 지어라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고 독후감을 쓰다.

무명의 독자가 이 부박한 글을 읽고 실망하실까 봐 걱정이 되지만, 단 몇 줄이라도 읽으셨다면 감사합니다.

시작할게요.


이건 비극이자 재앙이다. 나같이 무지몽매한 사람이 이 책을 집어 들고 책장을 넘긴 것은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징벌에 가까운 행위이다. 2500쪽에 달하는 5권의 장편소설,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는 말이 있는 고전문학, 뮤지컬과 영화로 재연되는 작품, 아이들에게는 인형극으로 또는 장 발장이라는 번안 동화 등 다이제스트 판으로도 사랑받는 소설, 바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다. 이 유명한 소설이 몇 해 전에 영화로 개봉이 되고, 뮤지컬로도 공연이 되었는데 그 인기가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레 미제라블> 완역본이 대한민국에서 15만 부나 팔렸다고 어느 지성인의 책에서 읽었다. 거기에 내가 1부를 더 추가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줄도 모르고 재앙의 문을 열고 나에게 징벌을 가하는 행위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이 책이 5권인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실제로 쌓아 놓고 다시 보니 실로 두껍다.

남자들에게 진리 탐구란 양파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것과 같다. 무언가의 안을 들여다봐야 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연애마저 남자에게는 여자의 과거를 낱낱이 밝혀내야 하는 것이고, 여자의 겉옷을 하나씩 벗겨낼 수 있어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 난 남자들의 보편성이 이러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들의 진리 탐구 방식은 숨은 그림 찾기 식으로 진행된다고 말이다. 그 집단에 속해있는 나 역시 개별성을 가지기는 하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분에 안 맞게 어려운 책을 미친 척하고 구입한다. 그리고 그 숨겨진 의미를 찾고자 헤매기도 한다. 그것이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자에게는 기쁨이자 축복이 될 수 있지만, 무지몽매한 나에게는 솔직히 징벌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레 미제라블>을 읽은 것은 남자라는 성적 보편성과 나라는 특수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재미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은 내 이야기는 각설하고 <레 미제라블>로 들어가자.


  1. <장 발장>이 아닌 <Les Misérables>

<Les Misérables>은 형용사 Misérables(비참한, 가난한, 불쌍한 등)이 정관사 les(le 복수형)를 만난 것이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이 된다. 예전에 필요한 부분만 초역하거나 일본판을 중역하거나 우리식으로 번안해서 출판했을 시에는 책의 이름이 <장발장>, <아, 무정>, <빈한>, <애사> 등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해방 이후 정기수 교수에 의해 완역이 되었는데, 완전한 번역을 했다는 의미로 제목을 프랑스식으로 그대로 가져와 <Les Misérables>이라고 했을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확인한 바는 아니다.

왜 책 제목을 가지고 구시렁거리냐면 <레 미제라블>은 내가 어릴 적에 흔히 들었던 장 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장서는 장 발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주변 인물들과 역사, 철학에 대한 서술이 많다.(고약한 영감 같으니라고!) 형사 자베르, 불쌍한 여인 팡틴, 팡틴의 딸이자 장발장의 딸이기도 한 코제트, 악한 테나르디에, 마리우스, 가브로슈 그리고 미리엘 주교 등 19세기의 프랑스를 살았던 그들, 불쌍하고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 워털루 전쟁, 왕정복고, 프랑스 6월 폭동, 수녀원, 프랑스 건달, 하수도 등에 관한 역사와 철학, 종교가 총망라되어 있다. 그러니 완역본의 제목은 <장 발장>이 될 수가 없는 게 아닐까!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 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 않으리라. -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

19세기의 인간사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설상 내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념적으로 아는 것이니깐 그 비참함을 실재(實在)로 바꾸어 주지 못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가 서문에 밝히듯이 이 책은 당시의 억압, 비참함과 무지 그리고 빈곤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죄를 짓고 세상에 버림받는 남자 장 발장, 남자에게 버림받고 먹을 것이 없어 머리카락과 치아를 팔고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마저 팔아야 했던 팡틴, 누구보다 충직한 경찰이었으나 자비심이 부족했던 남자 결국엔 신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사직하고 마는 자베르, 부모의 부재로 고통받았던 어린 시절의 코제트,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잃은 에포닌 등이 모두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장 발장>이 아니라 <레 미제라블>이다. 그렇다면 비참한 사람들의 비루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을까. 아니다. 빛을 담았다. 진흙 속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와 같은 그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 도망자 이야기

<레 미제라블> 완역본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해 답답하고 짜증이 나 몇 번이나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읽었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 위고가 장장 17년에 걸쳐 쓴 그의 생각을 내가 3주 만에 거저먹으려 하니 소화가 될 리가 있겠는가. 결국 급체할 수밖에 없고 그때는 잠시 쉬어갈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만큼 난해하기 보다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나로서는 지명과 이름 그리고 역사와 철학이 그저 관념에 지나지 않기에 몸으로 느낄 수가 없어서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재미있다. 무엇이 재미있는고 하니 바로 도망자와 추격자가 있기 때문이다.

장 발장은 조카들의 배고픔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유리창을 깨고 빵 하나를 훔친다. 절도죄로 들어간 감옥에서는 탈옥의 죄가 더하여진다. 그리하여 19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영겁과 같은 세월에서 벗어난 그는 자유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를 맞아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전과자라는 "누런 통행증"이었다. 그 통행증은 그가 전과자라는 것은 확인시켜주었고, 그는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로 인한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모멸감은 그에게 세상에 대한 분노와 살의 그리고 증오심을 키워준다. 하지만 장 발장은 훔쳐간 은쟁반에 은촛대를 더해주며 자신을 용서해주는 미리엘 주교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살려고 마음먹기 전에 저지른 절도로 그는 전과자에 재범자가 되고 만다. 결국 다시금 죄를 지었으니, 감옥에 가거나 아니면 도망 다닐 운명에 놓이게 된다. <레 미제라블>은 장 발장이 죄로부터의 도망을 시작으로 하여 그것의 해방으로 이야기가 끝나게 된다.

 장 발장은 꼬마 아이의 돈을 훔친 재범자이자 전과자이기에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마을의 화재에서 그 마을 헌병대장의 아이를 구하게 되고, 그 덕분에 그는 <누런 통행증>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장 발장이 아닌 마들렌 아저씨로 둔갑하게 된다.

마들렌 아저씨는 사업가로서 수완이 좋아 많은 돈을 벌게 되고 그 사회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결국 존경받는 시장의 자리까지 이르게 되지만, 형사 자베르의 의심과 자신의 죄로 누명을 쓴 남자로 인해 다시금 감옥에 들어간다.

그러나 팡틴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탈출한 그는 그 이후로부터 끊임없이 도망 다니게 된다. 형사 자베르로부터 도망을 다니며, 자신의 죄책감의 해방을 위한 도망을 다닌다. 그러니 도망과 추격의 대상이 형사와 죄인 그리고 죄와 광명이라는 두 곳에 포커스가 맞춰지게 된다.

도망자의 삶은 그를 장 발장에서 마들렌 아저씨, 마들렌 씨, 마들렌 시장님, 위르뱅 파브르, 포슐르방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잃어가며 도망 다닌다. 그러나 종국에는 장 발장으로 생을 마감하며 도망자의 삶으로부터,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된다.

<레 미제라블>의 백미는 바로 형사와 죄인의 추격전과 장 발장의 죄로부터의 도망이자 해방이다. 2500쪽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추격과 도망에 있다.

여담이지만, 테나르디에 부인을 제외한  <레 미제라블>의 영화 출연진은 위고의 인물묘사와 흡사하다. 독후감 쓰는 거 때려치우고 당장 보고 싶게 만든다.

  3. 미리엘 주교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길.

세기의 걸작이라는 이 소설의 첫 등장은 장 발장이 아니다. 장 발장을 유일하게 인격적으로 맞아준 미리엘 주교이다. 빅토르 위고는 1801년, 보스의 한 가난한 농부가 빵을 훔쳐 징역을 살고 출소 후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으나, 디뉴의 주교 미올리 신부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그는 이 신문 기사로부터 <레 미제라블>을 시작하게 된다. 그 농부는 미올리 신부로 인해 새 삶을 살았고,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사랑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었다.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통칙이다. 방황해라, 태만해라, 죄를 지어라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
  1권. p. 30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이, 죄로부터 속박당하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다. 그러니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다만 방황도 하고 죄도 짓지만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 미제라블>은 한 죄인이 회개하고 결국 성인이 되어가는 길을 보여준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죄로부터의 해방에 관한 이야기다. 단순한 도망과 추격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 한 불쌍하고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성인, 올바른 사람이 되느냐 그것이 <레 미제라블>의 진짜 이야기이다. 그러니 비참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진주란 말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진짜 보배이다. 우리들의 삶이 비록 지금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지만 더군다나 죄가 많지만, 우리는 장 발장처럼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는 동안에 그의 뇌리에는 더욱더 많은 빛이 스며들었다. 이상한 빛이, 즐겁고도 무서운 빛이. 그의 지난날의 삶, 최초의 잘못, 오랜 속죄, 외부의 금수화, 내부의 냉혹, 그토록 수많은 복수 계획을 품고 기뻐했던 석방, 주교의 집에서 그에게 일어났던 일,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 어린아이한테서 40수를 훔친 일, 주교의 용서 후에 있었던 만큼 더욱더 비참하고 더욱더 영악한 그 범죄, 이러한 모든 것이 또렷하게, 여태껏 본 적 없을 만큼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끔찍스러워 보였다. 그는 자신이 영혼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은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렇지만 다사로운 햇빛이 그 생애와 영혼 위에 비치고 있었다. 그는 천국의 빛으로 사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1권. p. 206

미리엘 주교의 "방황하라, 태만하라, 죄를 지어라"는 말은 "반드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대신에 죄에 빠지더라도 반드시 그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는 것이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라는 것에 "반드시"가 들어있다.

한 죄인이 성인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와 그리고 그 자신의 죄를 직접 목도할 수 있었던 장 발장의 회개였다.

다시 말하지만, 죄를 짓고 회개하고 올바른 사람이 되는 길이야 말로 <레 미제라블>의 진짜 이야기란 말이다. 그러니 <Les Misérables>은 비참한 사람들의 비루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 빛을 받아 진흙에서 영롱한 빛을 내는 진주와 같이 올바른 사람이 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미리엘 주교로 나오는 콤 윌킨슨은 1995년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라니...빨리 다 쓰고 봐야겠다.

  4. 장 발장이 걷는 그 하수도가 바로 우리 인생의 여로이다.

그는 그의 앞을 가고 있었다. 걱정하면서, 그러나 침착하게,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우연 속에서 잠겨서, 다시 말해서 하늘의 뜻 속에 삼켜져서. 5권 p.188
그는 출구를 찾아낼 것인가? 때맞게 찾아낼 것인가? 돌의 벌집들 같은 그 거대한 지하의 해면동물을 뚫고 나가게 될 것인가?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넘어갈 수 없는 것에 도달할 것인가? 마리우스는 거기서 출혈로 죽고, 자기는 굶어 죽을 것인가? 마침내 그들은 둘 다 거기서 없어지고 말 것이고, 그 어둠의 한 구석에서 두 개의 해골이 되고 말 것인가?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문했으나, 자답할 수 없었다.  5권. p. 189

장 발장은 코제트의 연인인 마리우스를 구하려고 프랑스 6월 폭동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간다. 그곳은 빈자들의 성, 바리케이드이다. 수레와 의자 등 잡동사니로 쌓인 성 말이다. 폭동을 진압을 시작하자, 경찰과 군인의 공격에 빈자들의 성은 금세 무너지고 만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마리우스는 죽음 대신 기절하게 되고, 장 발장은 기절한 그를 데리고 하수도로 도망을 간다.

그곳은 더럽고 냄새 하며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진창이다. 그곳에서 기절한 마리우스를 등에 엎고 한걸음, 한걸음 걸어간다.

그는 순환 하수도 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옳은 길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5권. p.190

장 발장은 마리우스를 등에 지고 암흑같이 어두운 하수도 안을 걷는다. 하수도 안에서 걷다가 빗물로 생긴 늪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마리우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장 발장이 원하는 짐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딸 코제트의 연인일 뿐이다. 그를 짊어지고 걷고 있는 그곳은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하수도 안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걷는다.

우리가 사는 삶은 장 발장이 마리우스를 지고 하수도 안을 걸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원하지 않은 운명이라는 짐을 등에 지고 걷는 인생의 여로에서 지치고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고, 가끔은 늪에 빠져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저 있다. 더군다나 확신에 차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이 억울하고 가혹할 수 있고 더군다나 그 운명을 살아가면서도 불안하지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장 발장이 걸어갔던 그 하수도 안이 우리 인생의 여로가 아닐까.


잘 읽든, 제대로 읽든, 어찌 되었든 간에 <레 미제라블>을 다 읽었다.

욕심이 많아서 그랬을까. 아니면 무지몽매해서 그랬을까. 뭐 둘 다 일 테지만. 3주간 이 책을 읽는 것은 비극이자 재앙이었다. 힘들었다. 역사에 관심이 없고, 고약한 빅토르 위고의 잔소리도 듣기 싫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도 길고 장황한지 짜증까지 났다.

원래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서 급히 읽게 되면 체한다. 그러니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읽고 난 다음에는 여운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욕심이 많았다. <레 미제라블>를 어서 끝내고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레 미제라블>을 게걸스럽게 먹고, 입가에 묻은 찌꺼기를 닦아 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이 내 입가에 묻은 찌꺼기가 아닐까 조심스럽다.

책을 덮으며 처음 찾아왔던 비극은 뜨거운 감동으로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고 보니 뒤늦게 잔잔한 감동이 물거품을 일으킨다. 그리고 비극의 시간과 재앙의 문은 이제 끝났다. 고이 책꽂이 넣어야겠다. 그리고 이제 기쁜 마음으로 맥주 한 캔을 따고 <레 미제라블> DVD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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