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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May 08. 2016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

도스도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었는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앙드레 지드가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칭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난 그의 전 작품을 다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만큼 문학에 대해 해박하지 않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 형제들>을 재미나게 읽긴 했다. 하지만 십수 년 전에 읽었던 것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최근에 기회가 있어 한 번 훑어보았으나, 그의 질곡 많은 인생과 깊은 철학을 이해하기에는 내가 턱없이 부족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의 세계마저 이해하지 못하니 열쇠를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읽고 난 다음에 열쇠를 찾아보려고 이렇게 타자를 치려고 한다.


1.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지하로부터의 수기, 1864>를 다 읽고 나면,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무지막지하게 난해한 소설은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 소설은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1863>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을 지하의 무명인으로 통해서 반박하는 글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어떠한 글이기에 도스토옙스키는 반박의 글을 쓴 것일까?

19세기 러시아의 철학 사상은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인간은 원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주변의 환경에 의해서 타락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쓰인 글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악행을 일삼고 있지만, 그 모든 행동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환경에서 찾고 있다. 그러니깐 사회와 환경이 그들을 제대로 보호해 주었다면, 그들은 악행들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사회가 개혁이 되어야 인간이 참다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았을까? 난 읽어보지 못했다. 19세기 러시아의 3대 문호를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라고 한다. 그런데 투르게네프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으며 속이 메스꺼울 만큼 힘들었다고 했으며, 톨스토이는 그 소설에서 설교조와 훈계조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문학은 동화로도 많다. 그만큼 교훈적인 글을 많이 썼는데 그가 지나치다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긴 하다. 심지어 내 아이마저 톨스토이 동화는 재미없어한다. 그런 그들이 손사래 쳤다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러시아는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와 러시아 내부적인 갈등 등으로 당시의 세상에 대한 염증과 유토피아에 대한 갈급함 있었을 테다. 그러니 이 소설을 아주 감명 깊이 읽은 사람들이 꽤 많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레닌이다. 레닌은 이 소설이 발표되고 난 후 1870년에 태어났는데, 그는 후에 이 소설을 읽고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공산주의와 관련된 낙관주의, 과학, 교육과 개혁을 통한 인간 이익 발견 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레닌이 이 소설에 감명을 받고 훗날 공산당 창단, 러시아 혁명, 소비에트 건설 등에 관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난 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반박하는 소설이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답변 소설이라고 한다. 얽히고설킨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데, 후자를 읽어보고 싶다.


2. 1부. 지하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고 지하실에 살고 있다. 1부 지하실은 그곳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삶에 대한 수기로서, 1부 지하실이 사실상 직접적인 수기가 된다. 2부 진눈깨비에 관한 이야기는 1부 수기를 마치며 밖에 내리는 진눈깨비를 생각하며 자신이 겪은 에피소드를 소설화한 것이 되겠다.


지금의 우리는 피 흘리는 것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일을 여전히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 많이 하고 있다. p. 39
여러분, 이성은 좋은 것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성은 단지 이성일 뿐이고 인간의 사유 능력만을 만족시킨다. 하지만 욕망은 모든 삶, 즉 사유와 긁저임을 포함한 인류의 모든 삶을 반영한다. 이러한 반영 속에서 우리의 삶이 부분적으로 어리석에 흘러간다고 하더라도, 삶은 여전히 삶이지 제곱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p. 45
그런데 당신은 왜 인간을 개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조할 필요가 있다고 알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인간의 욕망도 수정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가? 한마디로 말해 당신은 왜 그러한 수정이 실제로 인간에게 이득을 가져온다고 알고 있는가? p. 51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반박으로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썼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이성과 과학의 맹점, 비관주의, 교육이나 개학을 통한 인간 이익의 발견에 대한 반박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무명의 지하인은 과거보다 문명이 발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은 여전하며 그 정도가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 이성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으나, 그것에 의해서 사는 것보다는 욕망에 의한 삶이 틀리더라도 낫다고 말한다. 또한 교육이나 개혁을 통해서 인간을 개조할 필요가 없다고 욕망까지 수정해 가며 인간의 이익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내가 앞서 밝혔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어보지 못했지만, 짐작컨대 그 소설에 대한 충분한 반박글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이름 없는 지하인은 제정신이 아니다. 왜 비딱한 인성을 가진 인간일까? 도대체 이 무명의 지하인은 무엇을,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3. 2부 진눈깨비 이야기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며 자란 지하인은 학교를 졸업 후 관청의 하급 관리로 근무하게 된다. 이 곳에서는 그는 아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근무한다. 민원인들을 상대하면서 실제 곰보에 못생겼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은 동료에 비해 자신의 외모를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고독하며 외로운 남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낮은 자존감을 가지면서도 민원인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 굴복되고 싶어 했다가 다시 그에게 받은 모욕감을 복수하려고도 하는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이해불가이다. 한 인간에게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병존할 수 있음에 놀랍기도 하면서 미치거나 무서운 인간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인간은 감정이 전혀 없는 공허한 인간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외로움의 끝에서 찾아간 친구에게 비난을 해대고, 친구들과 다투며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복수하기 위해 다시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지하인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준 장교와 친구에게 복수하려고 하는 장면은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다. 사실 나나 우리 모두 모욕감을 받으면 어떻게 되갚아주지 하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지 않는가. 비록 이 무명의 지하인은 아주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우리의 모습을 극대화시킨 것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인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보다 그 익명성에 우리의 개별성을 대신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페테르부르크에 살고 있는 지하인은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로부터 살해당한 뒤 모스크바를 떠나 페테르부르크에 살았던 그 자신이 아닐까 싶지만, 그가 주인공의 이름을 짓지 않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시 불안한 사회의 모순된 인간들을 대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친구들을 복수하기에 찾아간 주인공은 창녀를 만나 그녀를 설득하려고 한다. 마치 책을 읽듯이 그녀에게 공허한 설교를 하는데, 그 모습에서는 교훈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느끼게 해 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삶이 반영되지 않은 교훈이나 설교는 그것이 아무리 미사여구로 이루어져 있더라도 그것은 진리가 되지 않으며 무가치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 공산주의의 교화는 마치 주인공의 책 읽는 설교같이 느껴지며,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서 교육을 통한 자기 이익의 발견이라는 맹점을 말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의 수기를 끝내지 않고 마무리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난해한 소설이며 무지막지한 글이기도 하다. 사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워낙에 난해하기에 읽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이 소설은 내가 읽은 3권 중에서 가장 그러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이 과연 선한 것인가?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러니 교육과 과학이 인간을 교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당한가? 비록 인간이 선하지 않더라도 이성에 의한 삶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질곡 많은 인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욕망에 쌓여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앙드레 지드가 이 소설이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인간은 교화에 의해서 수정되지 않고, 완전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이며, 그럼에도 소설의 주인공이 수기를 완전히 끝을 맺지 않았듯이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죄와 벌>의 노파 살인 사건, <카라마조프 가 형제들>의 친부 살인 사건이라는 끔찍한 살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죄에서 영성에 깃들어가는 과정을 글로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엄청난 고민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담은 소설이 바로 <지하로부터의 수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독후감인지 뭔지 이렇게 글을 쓰다가 보면, 안개 속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보인듯하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냐면, 처음에 읽을 때 제대로 읽을 걸 하고 후회를 한다. 그런데 매번 다음에 책을 읽을 때 그렇게 집중해서 읽으려고 하는데 읽다가 보면 그게 안 된다. 이게 난독증이 아닐까? 그래서 다시 읽을까 싶은데 그건 굉장히 귀찮다. 다음에 읽을 기회가 있으면 읽어야지 하고 넘어가는데 아마도 이런 독서태도는 아주 나쁜 것 같다. 그래도 다시 읽는 것은 쉽지 않고, 애당초 꼼꼼하게 읽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이쯤에서 그만하자.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참고 <네이버 백과사전 :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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