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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Nov 13. 2015

라디오, 글을 쓰다

그렇게 난 스물에서 서른셋까지 아내에게 꺼지지 않은 라디오가 되었다.

    한 선배가 내 소설을 읽고 연락을 해왔다.

  "너, 글을 왜 쓰니?"


  난 혀가 조금 짧은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주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지만 흥분을 하게 되면 말이 빨라지고 외국어를 하게 된다. 가끔 마음이 급하여 말을 빨리 하면 아내는 싱긋 웃으며 내게 "이번엔 어느 나라 말이야?"라고 묻곤 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방긋 웃으며 기분에 따라 "중국말이야." 내지는 "음... 스패니쉬?"라고 말해 주었다.

  사람의 신체 기관이 노화로 인해 작아진다고는 하지만 내 혀가 나이가 든다고 청년기를 시작으로 급속히 줄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설소대가 남보다 많이 짧았거나 아님 성장기에 발육의 부조화로 서서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결국엔 나만 인식을 못한 거지 어릴 때부터 내 혀는 다른 사람들보다 짧았고 남들은 나의 발음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릴 적엔 그걸로 한 번도 위축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수다쟁이 었고 집에서는 어머니가 결혼할 때 혼수로 장만해 오신 최신식 Gold Star 라디오 같은 존재이었다. 외동이라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탓인지 집에 가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육하원칙에 따라서 방송했었다. 내가 방송을 시작하면 노래를 잘 부르는 나훈아나 잘 생긴 남진 심지어 싱어 송 라이터인 조용필은 출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노래보다 내 이야기가 백만 배는 듣기 좋다고 하셨다. 아주 드문 일이었겠지만 가끔 집에서 말을 하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께서는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단다. 나야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다고 들었다.

  그랬던 내가 나의 혀가 짧다는 것을, 심지어 발음이 개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구 동성로에 가면 미진분식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대학 때 적은 용돈으로 데이트를 하기 위해선 거기만 한 곳이 없었다. 직장을 가지고 지갑에 신용카드 몇 장 넣고 다니면서는 안 가봤지만 당시엔 맛이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그렇다고 동성로 맛집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이버 블로그쟁이들이 맛집으로 떡 하니 등재를 해 놓긴 했더라. 여하튼 자주 그 곳에 데이트를 갔었는데 김밥을 먹다가 간이 안 맞아 점원 아가씨에게 단무지를 더 달라고 하면 항상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예?"라고 했었다. 그게 얼마나 사람을 짜증 나게 했는지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엔 음절마다 끊어서 "단! 무! 지! 더! 주! 세! 요!"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난 단무지를 포함한 음식 주문을 포기하였고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이후로 식당에서 주문은 아내가 하였고 모든 점원들은 단번에 주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물론 단무지 배달도 완벽했다.

  이토록 혀가 짧아 엉성했던 말을 기가 막히게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어머니'와 '아내'였다. 어머니야 당신이 낳은 자식이니 발음이 좀 엉성해도 괜찮았을 테다. 하지만 아내는 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였다. 그런 아내 덕분에 나의 '스패니쉬'는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발전하였고, 급기야 어머니조차 해석이 불가능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내의 멋진 통역으로 문제없이 해결되었다. 

  학창 시절에 말이 많았던 나를 미진분식의 점원은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발음이 안 좋다는 걸 알게 되고부터는 항상 조심하게 되었고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집에서 자기 전엔 입에 볼펜을 꽉 물고 성경책을 읽기도 했었다. 그게 사람을 무척 힘들게 했다. 연습은 하지만 당장 효과가 있는 게 아니었다.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혀가 따라와 주지 않았다. 그나마 아내 앞에선 언제나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이해했으니깐. 그렇게 난 스물에서 서른셋까지 아내에게 꺼지지 않은 라디오가 되었다.

  나는 애청자인 아내를 위해 14년간 라디오 방송을 활발히 하였다. 아내는 나의 특유한 감성과 유머를 잘 이해하였고 나의 사연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나의 목소리를 좋아했고 나의 말투에 웃고 울었다.

  그랬던 라디오 방송은 2년 전 아내가 먼저 가버리고 문을 닫아야 했다. 나의 방송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졌고 난 해야 할 의무가 없어졌다. 즐겁지도 않았다. 하지만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난 다시 방송을 하고   싶어졌다. 나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청취자는 없어졌지만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를 틀고 싶다. 어쩌면 그래서 라디오였던 내가 이제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아내에게 글을 쓰는지 아니면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는 딸을 위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에게 주파수를 맞춰줄 청취자를 위한 건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고 그래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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