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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Oct 18. 2015

안부인사

그건 바로 나란 사람이 상념이 많기 때문이다.

<일기와 수필사이>


  "............................"


  며칠 전 출장지에서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를 만났다. 선배라고 하기엔 나이가 지극히 드신 숙부뻘이었는데, 날 보자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 순간 나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선배의 시계 역시 멈췄을 것이다. 선배는 나의 손을 잡으시고 한동한 쳐다 보기만 하셨는데, 난 어찌해야 될지 몰랐다. 그냥 악수만 하고 "자네 왔는가?"라고 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 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결국은 내가 "잘 지내시죠? 저 잘 지냅니다."라고 해드렸다. 선배의 마음이야 전부는 아니라도 왜 모르겠는가? 날 위로해 주고 싶었고 안부를 묻고 싶었을 테다. 그래서 악수를 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손을 잡고 보니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을 수도 있다. 어찌하다 보니 이래저래 곤혹스러울 때가 자주 있다.

 

  안쓰러운 마음에 말문을 열지 못한 선배도 있지만,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말을 해 주시는 분들도 계신다. 그런 분들은 거의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어떻게 지내?"

  "잘 지내지?"

  누구나 자주 사용하는 안부인사이고, 나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난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하다. 잘 지낸다고 하면 내가 가벼워 보일 것 같고, 힘들다고 하면 상대방이 당황할듯하다. 이 질문은 침묵의 위로보단 낫지만,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인사인건 마찬가지다. 하루키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건넨 "잘 지내?"란 안부에 "나 이혼했어."라고 듣게 될 때가 제일 당황스럽다고 했었다. 왜냐면 뭐라고 해야 될지 막막하기 때문이었다. 하루키와 난 입장은 반대이지만,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래도 저래도 명쾌한 해답은 없을 테니깐 말이다. 


  그리고 주일에 왕왕 들었던 인사말이 있다. 주로 나를 어릴 적부터 알고 계신 교회분들이- 내 친구의 부모님이거나 내 부모님과 아시는 분들이-하거나, 또는 나를 아끼는 성도들이 건네는 안부인사말이다.

  "기도하고 있어."

  이 인사말은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 왜냐면 내가 대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좋은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인사말에 미소 한번 하면 되니깐  그중에서 제일 편할 뿐이다.

  

  그런데 내 안부를 묻는답시고 던지는 최악의 인사가 있다.

  "아이는 엄마 보고 싶다고 안 해?"

  이 안부는 정말 최악이다. 가장 듣기 싫은 인사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다른 인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내가 적응을 하고 있지만 이건 정말 적응도 안되고 집에 가서까지 계속 맴돌기 때문이다. 난 사별한 친구에게 이따위 질문을 절대 안 할 테다. 이것도 위로랍시고 하는 사람은 정말 한 번쯤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이런 건 안부도 위로도 아니다. 상대방의 감정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본인이 궁금한 걸 묻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나 같은 비공감능력자도 아는 걸 모르니, 진짜 비공감능력자들은 따로 있다. 어쩌면 내 상황으로 인해 발생한 일들이니 상대방 탓만 하기도 어렵다. 혜민스님의 에세이에 보면 남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었다. 남들이 생각보다 나에 대해 무심하다는 거다. 내 생각이라곤 한 번도 안 하고 있다가 던진 무심한 질문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무심히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죽듯이, 이 인사만큼은 조심했으면 좋겠다.   


  이런 안부인사 말고 19금 인사도 있다.

  "사람은 좀 만나?"

  "한참 젊은데 힘들지 않냐?"

  주로 남자들이 많이 걱정하고 묻는데, 말은 안 하지만 여자들도 걱정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이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사람이야 때가 되면 만나겠지라고 했다. 자꾸 묻는 질문에 농담 삼아 연애라도 한다고 대답해주면 잘 됐다고 말은 하더라. 웃고 넘기기엔 괜찮다.

  그런데 얼마 전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질문의 이면에는 남성의 욕망에 관한 궁금증이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순수한 의도로 묻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란 특유한 사람>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어이없이 믿지 않더라. 뭐 그렇다고 한들 나또한 설득을 시킬 필요가 없으니,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주었다. 

  나도 한때는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아내의 혼전순결에 동정남의 메달을 목에 걸고 살았고 이제는 다시 심리적 무성욕자가 되었다. 물론 심리적인 거라고 밝혀둔다. 난 담배를 태우지 않고 술은 맥주만 조금 마신다. 그리고 거의 매일 조깅을 하니 활력은 넘치지 않을 만큼 충분하다. 고삐 풀린 망아지나 잘 훈련된 경기마는 아니라도 제주도 승마체험장의 조랑말은 되지 싶다.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무성욕자 멋지지 않은가? 난 바지 단추만 풀어진 캘빈클라인 광고가 연상된다. 웃기지만 말이다. 

  그런데 활력이 잔을 넘쳐버리면 그때는 어떡할까? 

  그럴 땐 난 책꽂이에서 양철북을 꺼내 읽는다. 궁금하면 읽어보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양철북 말고도 양철북을 능가하는 것들이 집에 많으니 걱정이 거의 없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은 조금 위험하다. 로맨틱 아니 그 이상이니깐. 타닥타닥거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까지 평온해진다. 불규칙한 듯 하지만 나름 듣기에 따라서 규칙에  가까운 그 소리는 하루 동안 쌓인 긴장을 놓게 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욕망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 정말 이럴 땐 양철북, 마의 산, 사기로도 힘들다. 성경책은 이런 상황에 읽으면 너무 처량하다.

  이땐 은장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은장도가 없으니 맥북을 은장도 삼아서 키보드를 친다. 그렇다고 글을 쓸 때마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럴 때도 있다는 거다. 


  안부인사 그거 별거 아닌데, 왜 이러나? 그건 바로 나란 사람이 상념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생각들을 정리해야 한다. 정리가 되지 않으면 떠도는 상념들도 잠을 자기 힘들다. 아니면 양이라도 백만 마리 세어야 되는데 그것보단 이게 훨씬 생산적이고 가치가 있다. 


  정리야 해야 할 상념이 더 남았지만 그만 써야겠다. 아이가 간식을 챙겨서 피크닉을 가자고 한다. 수목원이 지척이니 금세 다녀와 저녁에 다른 거나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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