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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소망 Nov 06. 2015

장래희망 上

사춘기가 지나고 장래희망이 사라졌다.

  <일기와 수필사이>


  무엇이 되고 싶었던 적은 별로 없었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항상 생각했다.




  국민학교 출신인 나는 태권 V, 마징가 Z, 철인 28호, 합체 로봇 킹라이온, 아톰을 즐겨 봤었다. 그래서일까? 꼬꼬마 시절의 장래희망은 당연히 로봇 과학자였다. 아마 내 또래 남자들에게 그런 꿈쯤은 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엔 올림픽 통산 8관왕을 차지한 칼 루이스와 남 보다 조금 빠른 달리기 실력 때문에 육상 선수가 되고 싶었다. 중학생이 되어선 마이클 조던-지금은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테판 커리 때문에 가끔 NBA를 보는데, 마이클 조던 때의 감동에는 영 못 미친다. 조던의 페이드어에이슛, 원핸드 덩크, 더블클리치슛은 가히 신의 영역이었다. 난 마이클 조던-때문에 농구선수가 되고 싶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봇 과학자, 육상선수, 농구선수 말고도 더 많은 직업을 장래희망 조사서에 적었지 싶은데 기억 나는 건 고작 3개가 전부다.


  왜 고작 3개 밖에 기억이 나지 않을까? 장기기억 상실도 맞겠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내 인생에서 사춘기는 아주 평온하게 지나갔지만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단 끊임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 결과로 나에게서 장래 희망이 사라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첫 시간에 기초생활조사서를 적었다. 종이를 받아 들고 다른 건 다 적었는데 희망직업란에 쓸 게 없었다. 직업의 조건으로 경제적 보상, 자아 실현 그리고 사회 발전에 기여 등을 감안한다면 내가 적을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직업이라고는 아침에는 집 인근에서 조깅을 하고, 오후에는 마당 있는 집에서 아이들과 물놀이를 할 수 있거나, 아내와 같이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엔 아이들을 씻겨 놓고 아이 방에서 책 몇 권 정도 읽어줄 수 있으면 되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직업은 아마도 한량인데, 도저히 적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90년대 고등학교-군사정권 아래의 70,80년대의 고등학교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당시 교련 수업이 있었으며 체벌이 허용되었던 고등학교-의 선생님은 무서운 존재였다. 그래서 빈칸으로 낼 수는 없었고 고심 고심한 끝에 "좋은 아빠"라고 적었다. 적고 한참을 바라봤는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이 보다 멋진 직업이 있을까 하고 기쁜 마음으로 기초생활조사서를 제출했다. 전업주부도 있는데 뭐 어때라고 생각했었다.

  '무엇이 되고 싶기보단 아빠가 되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쉬는 시간에 담임선생님 호출로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께서는 날 보자마자 애정을 듬뿍 담아 헤드락을 걸었다. 당시 고1 담임선생님의 별명은 M-이었다. 가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는데 당시 우린 그게 간밤의 숙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떠들면 바뀐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드라마 M에서 심은하의 빨간 눈에 착안하여 지은 별명이 M-이었다. 그만큼 무서운 분이었는데, 그날의 헤드락은 부드러웠다. 아마 나의 특유한 기질을 잘 아셨거나 어이가 없었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일 거다. 여하튼 혼내시기 보다는 웃으면서 "이런 거 말고 돈 버는 직업을 적어란 말야. 현철아, 동민아, 애랑 친구하지 마라"라고 하셨다. 헤드락에서 풀린 난 "좋은 아빠"를 지우고 뭔가를 적었지만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여담이지만 난 특유한 기질-누구에게나 있지만 확연히 구분은 안 되는 그런 똘아이 기질-이 있다. 그런데 이게 사춘기쯤 해서 발현된 걸로 봐서 타고난 건 아닌 것 같다. 아마 사춘기에 접한 책들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똘아이라고 해서 미친 놈쯤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눈치 없는 4차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예를 들면, 교무회의 시간에 교감선생님께서 여선생님 치마가 너무 짧다고 하시면 웃으며 오히려 길다라고 말하거나 쓸데없는 시교육청, 학교 교육 정책들을 웃으며 살짝 반대하는 정도이다. 남들은 저런 걸 이야기해도 괜찮나 싶지만, 나란 사람은 특유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 정도는 말해도 된다라고 하고 싶다. 

  한 번은 시골학교에 근무할 때인데, 교감선생님께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며 직장이 있어야 가정이 있는 거야 그러니 군말 말고 그렇게 해라고 하셨다. 난 생긋이 웃으며, "교감선생님, 개인이 있어야 가정이 있고 그리고 가정이 있어야 직장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 사회가 구성이 되고 국가가 건설되지요. 그러니 가정보다 직정이 우선라고는 거엔 반대합니다."라고 말해 버렀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요즘 말로 순간 "헐"하셨었다. 나 역시 말하고 나서 "헉"했었다. 그래도 그 교감선생님과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런 나의 기질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아내는 대학, 교직시설 내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꼭 여러 번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돼."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이제 저 위에서 잔소리를 할 게 뻔하지만 못 들은 척 하련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나는 장래 희망에 대해서 고민해 본적은 그다지 없다. 그런데 장래 희망의 부재가 꿈 없는 학창시절로 연상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직업에 대해 고민은 안 했지만, 어떻게 살지에 대한 꿈을 항상 가졌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기 보단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의 꿈은 특정 직업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나의 꿈이었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불특정 직업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직업은 도구일 뿐 목적이 아니었다.


  대학 수능 시험을 마치고 고민을 했다. 밥은  먹고살아야 되는데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황우석 교수가 빅히트를 치던 시절이라 유전공학을 공부할까 했지만 공부엔 취미가 없었고 그만큼 실력도 안 되었다. 3대째 믿는 집안이니깐 신학을 공부해볼까 싶었지만, 새벽기도 나갈 자신이 없어서 포기를 했었다.

  그런데 '무엇을 할까?'라는 고민은 '어떻게 살까?'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무엇이 되어야 어떻게 살지도 해결되는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깐 말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집 경제 사정으로 한량은 불가능했다.  


 그때 고3 담임선생님-이분 역시 나를 잘 알았다. 나의 특유한 기질을 파악한 분-께서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 어디 갈래?"

  "고민 중입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없어요."

  "뭐 좋아해?"

  "책 읽는 거 좋아하고 시험 안치는 공부 좋아해요."

  "누구랑 경쟁하는 건 싫지?"

  "네, 맞아요. 바쁘게 살고 싶지 않고요.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럼 너 애들 가르쳐 볼래?"

  "사범대말씀이세요?"

  "아니, 교대"

  "거기 뭐하는 곳이죠?"

  "초등교사 양성하는 대학이야."


  그렇게 교육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한번 사는 인생 뭐라도 해봐야지 또는 이름 석자라도 남겨봐야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행복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살면 되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나의 소중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나의 시간은 오롯이 "행복"을 위해서 쓰고 싶었다. 어찌 보면 그릇이 그만큼 작은 사람이겠지만, 나에게 돈과 권력 같은 건 행복과 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들을 가르친다라니 행복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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