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에서, 하나

캐리어를 든 남자, 화를 내는 여자

by 김현리

새벽에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평소에 말로만 상대보다 꼼꼼하다고 자부했을 뿐, 일이 아닌 이상 가벼이 여기는 그런 성격의 여자라 그가 깨우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좀처럼 일어나지지 않았다.

한참을 침대에 누웠다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시각이 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 우선 머리를 감고, 30분안에 해야할, 마땅히 치르고 나가야 할 것들을 하나씩 처리해갔다. 밖으로 나왔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우버는 영 연락이 닿질 않았다. 결국 일반택시를 타고 '리 따이 또' 라는 거리에 있는 사파 익스프레스 사무소 앞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5분 여 달리는 택시 안에서 비몽사몽의 얼굴로 괜히 사파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투덜거리고 싶은 얼굴로 나는 앉아 있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이미 투덜거리겠다는 마음이었던 나는 사정없이 그를 혼내기 시작했고, 복사본도 사진조차 갖고 있지 않은 그를 사지로 내몰았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기사는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는지, 고분고분 내 뜻에 따라 열심히 운전했다.

헐레벌떡 집으로 들어가 여권을 챙겨나온 그는 또 해맑게 웃었다. 게임에서 시간제한이 있는 미션을 성공한 냥.

화를 낸 게 무색하게 택시는 20분여만에 리 따이 또 거리에 우릴 내려주었다. 그렇게 사무소에 도착한 우리는 전날 예약한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에는 출발시간이 45분이라고 돼 있었다. 뭐하러 이리 달려왔나 싶었다. 굳이 화를 내면서까지 이렇게 여유있게 시간이 남을 줄은 몰랐다.

거의 30분을 기다리고 나서야 우리를 사파로 데려다줄 고속버스가 도착했다. 사파 익스프레스라고 쓰여져 있는 그 버스의 내부는 한국 우등 고속 버스였다. 손잡이에도 한국어가 적혀있는, 전형적인 중고차량. 6시간 이상을 버스 안에 있을 생각을 하니 더란이 떠올랐다. 이 정도의 편안한 좌석이 있는 버스였다면, 20시간을 달려 카트만두로 가는 그 길이 훨씬 편했을까.

생각보다 6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전날 늦게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피곤은 덕지 덕지 붙어있었고, 심지어 기분 나쁜 일이 겹쳐 심적으로도 지쳐있었다. 그래서인지 버스에 오르자 마자 나는 곯아떨어졌고 그래서 사파에 도착할 무렵, 피곤이 조금은 사라져있었다.

여행 직전까지 나는 무수한 사건과 업무때문에 마음이 너무도 피폐해져있었다. 그래서 여행이 간절했지만, 아이러니하게 여행을 떠나는 그 날까지 여행이 너무 귀찮다고 느꼈다. 그런 마음으로 사파에 도착했으니, 보통같지 않게 찌는 날씨에 내가 알지 못하는 길에 있는 숙소가 또 다시 마음을 헝클어놓았다.


2일전, 나는 내가 좋아하는 호텔을 검색하고 결제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차일피일 미루고는 당장 다음날 잠잘 곳이 없을까봐 무리수를 던진 그 캇캇뷰 호텔은 후기를 남긴 어느 여행자의 말대로, 뷰를 빼고는 그 어느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묵었던 오천원짜리 롯지스러웠는데, 우습게도 뷰 하나만큼은 어느 곳을 못 따라왔다. 롯지밖으로 나와 산으로 둘러쌓여있는 마을어귀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오랜만에 또 다시 여길 찾았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올때마다 또 올 수 있을까 라는 생각으로 사파를 느끼고 사진을 남겼는데, 신기하게도 베트남은 내가 사랑하지도 애정하지도 그다지 또 오고싶지 않은 곳임에도 자꾸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고, 나는 이끌려서 결국 여기 와 있게 만든다.


그와 나는 우선 짐을 놓고 허기를 채우러 갔다. 사파시내 메인거리에 즐비해있는 웨스턴음식과 베트남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들. 그 중에 한 곳을 골라 들어갔다. 워낙 덥지 않은 동네다보니 이렇게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는 레스토랑은 잘 없다. 더운 공기에 불쾌함이 치밀어올랐다. '넝 꽈' 라고 덥다했더니 종업원이 선풍기를 우리쪽으로 틀어준다. 간사하게도 그새 시원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예전엔 없었는데 점심 세트 메뉴라는 게 생겼다. 이것저것을 챙겨주고 단돈 5천원. 심지어 로컬 맥주도 공짜로 주니, 가성비가 어마어마한 메뉴다. 그러나 너무 배고픈 우리의 허기를 채워주기엔 모잘랐다. 입에 밥을 한움큼 넣고 씹으며 또 다른 메뉴를 골랐다. 이번엔 비프 머슈룸 볶음.

10분 여 후에 종업원이 내온 비프고기는 후추를 넣어 감칠맛이 났다. 그 옆에 수북하게 담긴 쌀밥이 역시 베트남이란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은 밥 인심이 참 후한 나라다. 밥을 한 숟깔 떠서 비프와 버섯 하나를 올리고 간장에 담가둔 베트남 고추 하나를 그 위에 더 올렸다. 그걸 입안에 가득 넣고 씹고 있자니 또 목이 말랐고, 라오까이 맥주 한병을 더 주문해야 했다. 아침에 이동하면서 잠에 취해있었고, 내릴 때쯤 배가 고파 징징거렸던 나였는데, 그새 먹을 것을 채웠다고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는 걸 보니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까이 맥주는 보통 비어보다 훨 시큼하고 탄산이 적다. 약간 쉰 밀맥주 맛인데, 꼴딱 꼴딱 삼키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머리가 아파온다. 어떤 효모를 이용해 만드는 지는 모르겠으나, 라오까이성에 와야지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참 의미 있는 경험이다. 헤롱헤롱 하며 레스토랑을 나와 내리쬐는 사파 해를 맞이했다. 도저히 산책도, 더이상 어떤 것을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숙소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숙소 근처에 있던 the hill station 은 사파에 두 지점이 있다. 한 곳은 저녁에 와인 한잔을 기울이기 좋은 아늑한 곳이고, 또 한 곳은 캇캇뷰 호텔 근처에 위치한 로컬식자재를 테마로 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커피와 음료도 주문이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 배가 부른 나머지 커피를 마셔 소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들렀지만, 이 곳에서는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는 없었다. 걸어서 소화를 시키는 것보다 마셔서 소화를 시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묵직한 베트남식 블랙커피를 시켰다. 보통 연유가 들어가면 카페쓰어다 라고 하고, 연유가 들어있지 않으면 카페덴.

쓰어는 연유를 뜻하는데 연유와 카페의 비율이 1:1이라면 박시유 라고 부른다. 나는 1년간 중부 꽝찌에서 일했기 때문에 빡시유 라고 불렀는데 하노이에 와보니 박시유라는 것은 거의 없었고, 일반적인 카페쓰어다만 많이 마시고 있었다. 호치민에서는 박시유로 불렀고 나를 중부 촌년으로 많이들 생각했다.

베트남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나에게 "너 시골에서 왔느냐, 사투리를 쓴다." 라고 택시기사가 얘기하다니, 내가 배운 많은 서바이벌 말들이 결국 정말로 누구나 들어도 사투리라고 느껴지는 언어였다는 것을 하노이에 와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마치 외국인이 부산말을 너무도 잘하듯.

베트남식 찐한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베트남은 여행을 오고 싶은 곳도 아니었고, 관심이 있는 나라도 아니었던, 그저 엄마가 하롱베이를 보고 캄보디아와 묶어 패키지 여행갔던 곳이었다. 그런 내게 베트남은 갑작스런 인연으로 여행이 아닌 일로 방문하게 됐고, 그렇게 지금까지의 인연이 닿았구나 라는 생각에 새삼 사는 것이 무엇인지 무섭기도 놀랍기도 했다.

처음 다낭에 도착해 나를 맞이하러 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낯설고 어색하게 웃었다. 회사의 짐들까지 가지고 오느라 배낭에 캐리어에 그리고 또 다른 짐덩이들을 가지고, 4시간이나 더 달려 꽝찌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어리둥절한 나를 데리고 여기 저기 인사를 시키고 지루하디 지루한 인계사항을 듣고, 점심 후 어느 카페를 갔다. 베트남에는 참 카페가 많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가장 유명하다는 카페쓰어다를 처음 맛본 순간, 혀 안에 퍼지는 진하면서도 초콜렛 향이 퍼지는 그 원두 맛을 잊지 못한다.

가끔씩 출장으로 지방에 가면 작은 동네 카페를 들르곤 하는데, 매번 마시는 이 커피향은 처음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추억은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하고, 기억에는 그때 느낀 감정이 동반되어 온다. 글로 말로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주관적이고도 이상한 감정선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뷰 말고는 어느 것하나 마음에 들지 않은 캣캣뷰 숙소로 들어갔다. 네팔의 롯지 화장실같은 곳에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의 축축함이 그대로 전달됐다. 밖에는 옆방에 세를 들어사는 가족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소리를 질렀다. 그 와중에도 잠이 왔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자 세상은 낮과는 다른 시간 여행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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