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 빛 Aug 06. 2023

눈물겨운 아홉 자리 번호

2022년 2월 26일_미국에 온 지 940일째 되는 날


서류미비자였던 사람이 영주권을 신청하고 일주일 만에 이민국에 방문하여 지문을 찍고 나왔더니 마치 모든 절차가 다 끝나버리고 앞으로는 꽃길을 걸을 일만 남은 것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롭고 어리석은 착각이었고, 꽃길대신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하는 대학교에 원서를 접수하고 입학 홈페이지가 먹통이 되도록 접속해 봤던 학창 시절처럼, 원하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혹시나 합격통지서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메일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확인해 봤던 취준생 시절처럼, 이번에도 역시 이민국 홈페이지(https://egov.uscis.gov/)에 수시로 접속해 내 케이스의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 보았다. 그만큼 삶의 모든 순간들이 늘 간절했고 시기마다 이루고 싶은 것들이 매우 분명했다.



그러다 2022년 2월의 어느 새벽, 내 케이스를 등록해 놓은 앱(https://www.lawfully.com/)에서 갑자기 알림이 울렸다. 전 애인들에게서 <자니?>와 같은 문자가 올 법한 야심한 시각이라 내가 고대하는 이민국 업데이트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사회보장 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발급이 되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보장 번호란 한국에서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개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갖고 있는 이 당연할 법한 아홉 자리 번호를 오랜 기다림 끝에 눈물겹게 받아보는 나로서는 이 번호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뼛속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미국에는 나보다 더 한 고생을 해가며 이 번호를 얻은 이민자들도 수두룩 하겠지만 누가 더 힘들게 받았느냐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거주하시던 나라에서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주어지는 번호가 아닌 성인이 된 이후 스스로가 선택한 나라에서 얻은 당연하지 않은 번호라는 사실이다. 특히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이 번호조차 없이 생활했던 한 사람으로서 얻었을 때의 쾌감과 감회가 특별했다.



날이 밝아오자 의료보험 회사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건강검진을 언제 마지막으로 해봤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치과에 방문하지 못한 지도, 안과에 방문하지 못한 지도, 그 어떤 의료기관을 방문한다는 상상조차 못 해본지도 너무 오래되었는지라 그동안 내 몸에 미안한 감이 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숨 쉬는 비용을 지불하고 살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매 달 고정비용은 꽤 나가겠지만 이 또한 참으로 달가운 지출이다. 한때는 월급에서 매 달 세금이다, 국민연금이다, 고용보험이다 하면서 강제로 떼어내야만 하는 비용들이 버거웠고 불만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고 정당히 그 땅에 살 수 있다는 조건 또한 큰 축복이었음을, 아무나 낼 수 있는 비용이 아님을 미국에 와서 서류미비자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앞으로는 숨만 쉬어도 나가는 그 비용들을 자부심을 갖고 기꺼이 지불하며 살 수 있겠다.



휴대하지 말고 자기만 알 수 있는 곳에 보관하라는 경고문이 찍힌 이 사회보장 번호 종이를 만져보고 바라보고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고민해 본다. 물론 내 노력으로 얻은 번호는 아니다. 단지 운이 너무 좋아서, 우연히 훌륭한 인연을 만나서 그저 신청 후 기다림 끝에 얻은 번호이다. 하지만 이 번호를 얻고 나서는 내 노력으로 이 번호들에 뒤따를 나의 신용지수를 결정할 수 있다. 그 신용들이 가져다 줄 더 큰 미래를 그려본다.











이전 27화 영원히 미국에서 살아 볼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