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블랙머니> 단평 : 스스로 무너지는 고발극

‘론스타 의혹’을 고발하는 대신, 한국 영화의 부실함을 스스로 드러내다

by 성상민

<하얀 전쟁> 등으로 1990년대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지만 1997년 <블랙잭>과 1998년 <까>의 실패 이후로 자취를 감췄던 정지영 감독은 2011년 <부러진 화살>과 2012년 <남영동 1985>로 성공적인 복귀를 신고했습니다. 이후로 한동안은 영화 제작에 전념하다, 8년 만에 새로운 신작 <블랙머니>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1990년대 후반 필모그래피부터 이미 한국 사회를 뒤흔든 센세이션한 사건을 강조했던 정지영의 행보는 이번 <블랙머니>에서도 이어집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여전히 국제 소송이 진행 중인 '외환은행 론스타 헐값매각' 사건이 베이스죠. 애초에 제작단계에서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2623840&ctg=1502&tm=i_ntr_c011 소위 '국민주 투자'의 형태로 제작비를 모으고, 시민사회단체의 '원로'들이 모여 지원을 했었으니까요. 마치 2010년에 공개된 <작은 연못>처럼, 사회문제를 알리는 목적 아래 연합적인 형태로 제작된 것입니다.

좋은 의미를 담아서 만든 만큼, 영화 역시 좋을까요. 분명 정지영은 1980년대부터 영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고, 한동안은 그 열망이 영화적 연출과 잘 조화하며 <하얀 전쟁> 같은 역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죠. <블랙잭>과 <까>는 좋게 말해도 '컬트'한 작품이었고, <부러진 화살>은 사건 자체도 논란의 연속이었지만 연출 역시 사건을 영화로 표현할 때 '감옥 내 성폭행' 등 필요 이상의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다행히도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를 비롯한 '민주화인사 고문'이라는 심각한 사건을 영화의 소재로 사용하면서도 '고문'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고문을 둘러싼 여러 존재들의 심리에 집중한 결과 올드하면서도 진중한 느낌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블랙머니>는 어떨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정지영은 <남영동 1985>가 아니라 <부러진 화살> 또는 <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남영동 1985>에서 가까스로 지녔던 진중한 감각은 어디론가 사라진채, '지금 시대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인지 무척이나 급한 편집과 흐름이 느껴집니다. 이경영 등을 통해 론스타 문제에 거대 권력이 개입되어 있음을 드러내지만, 정보값이 얄팍한 음모론적 전개는 오히려 영화에 신뢰를 주는 대신 헛웃음만을 낳게 할 따름입니다.

애시당초 조진웅이 맡은 검사의 설정을 '기득권층의 음모로 억울하게 성폭력 누명을 썼다'는 식으로 갔을 때부터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던 작품은, '선역' 주인공이 연루된 모든 문제는 다 '음모'로 처리하는 방식으로, '악역' 주인공의 행보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내용을 입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쁘게 처리하는 식으로 구태의연한 이분법을 매우 낡은 방식으로 밀어붙이기만을 반복합니다.

이와중에 어떤 식으로든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주기 위해 나름대로 힘을 줘 연출한 부분이 있지만, 나머지 부분들과 전체적인 구조가 너무도 부실한 상황에서 이렇다 할 임팩트를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쓴웃음만을 낳게 할 뿐이죠. 긴장과 압박감을 줘야 할 부분에 오히려 허탈한 감정만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긴 침묵을 뚫고 발표한 <부러진 화살>보다도 못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대체 무엇이 정지영으로 하여금 안타까운 작품을 낳게 만든 것일까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길게 필모그래피를 이어나가는 감독이 한국 영화계에 드문 상황에서, 정지영은 한동안 '한국 영화계의 어른'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지위를 활용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영화계 일원을 모으는 중요한 직책에 서기도 했지만, 동시에 <천안함 프로젝트> <직지코드> <국정교과서> 등 음모론 이상의 맥락을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에 제작으로 참여하며 이 작품들에 대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도 수행했었습니다.

정지영이 오래간만에 카메라를 든 작품은 안타깝게도 숙성된 '올드 스쿨'이 아니라, 그간 제작으로 참여한 다큐멘터리의 음모론적인 경향을 그저 자극적으로 강화하는 차원에서 머무를 따름입니다. 같은 고발적인 극영화에 비교해도 <블랙머니>가 많이 참고한 <마진 콜>은 물론, 아담 맥케이의 <빅쇼트>나 <바이스>, 존 리 행콕의 <파운더>, 하다못해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한 일본 영화 <신문기자>에 비교하기도 쉽지 않아요.
장면 연출이 독특한 것도 아니며, 문제적인 소재를 엮는 방식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요소들이 구태의연한 가운데, 자극적인 요소를 몇 개 넣는다고 인상적인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기자>는 한국에서 홍보했던 것과 달리 꽤나 신중한 동시에 영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적절한 선에서 끊으며, 여운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블랙머니>는 자신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은채, 폭주만을 반복하다 영화 자체로도 고꾸라진 것은 물론 영화가 제작된 계기인 '론스타 의혹'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도 좌초할 따름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한국 영화가 놓인 참으로 뼈아픈 부실하며 허약한 현실을 스스로 반증하는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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