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것에 대한, 2020년의 자전적인 답변.
영화에는 다양한 장르가 있지만, 심심치 않게 나오는 장르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가 존재한다. 어느 나라나 영화를 만드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으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떤 의미로는 모험이자 자기 성찰의 시간이 된다.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찬실이 그랬듯) 7년 간 홍상수 감독의 개인 영화사 ‘전원사’에서 일한 뒤 2015년 독립한 김초희의 첫 장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러한 ‘영화 제작’과 ‘내면의 심리/성찰’을 충실하게 연결한 작품이자, 다시 이를 약간의 장르적인 코드와, 그리고 다시 극의 주인공 ‘이찬실’(강말금)처럼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중반 영화를 경험하고 영화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은 여성 영화인에 대한 메세지를 함께 연결한다.
10년간 (뭔가 홍상수 같은) 독립영화 감독의 프로듀서로 일하며 숱한 작품을 만들었지만 감독이 갑작스레 (홍상수 영화처럼) 술자리에서 세상을 떠나자 찬실에게는 남은 것이 없다. 아무리 크레딧에 프로듀서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도 세상은 ‘감독’만을 기억하고, 믿었던 영화계 인맥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스레 돈도 없다. 궁여지책으로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 찬실은 역설적으로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이전 같았으면 심도 깊게 볼 일이 없었을 존재와 조우하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 대상은 조금은 까칠하지만 알고 보면 속 깊은 하숙집 할머니(윤여정)이기도 하며, 역시 자신처럼 영화를 꿈꿨으나 생계를 위해 프랑스어 강사가 된 ‘김영’(배유람)이기도, 또는 장국영을 자처하는 유령인 듯 하면서도 뭔가 기묘하게 실체를 가진 미지의 존재(김영민)이기도 하다. 찬실은 좀처럼 이전의 활동과는 개연성이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 건지, 어디에 욕망을 두는 것인지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며 때로는 그로 인해 발을 헛디디는 선택지를 택하기도 한다.
동시에 이 모습은 일견 이미 ‘영화를 만드는 다른 영화’에서도 드러났던 지점일 수도 있다. 영화인이 영화를 말하는 대신 자꾸 일탈하는 지점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수두룩하게 나오는 인물 같기도(또는 이를 다시 뒤집은 정가영), 갑작스럽게 일상이 비현실적인 레이어와 교차하는 순간은 윤성호의 <은하해방전선>, 창작에 대한 고민이 삶의 비루하고 노곤한 모습과 부딪치며 충돌하는 지점은 신수원의 <레인보우>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만드는 영화’가 가지는 ‘교차점’일뿐이다. 김초희는 앞서 언급했던 이 장르 특유의 속성을 모두 가져와서 꺼내놓으면서도, 이를 다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맞게 변주하며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만든다. 쉽게 자신의 갈피를 잡지도, 욕망에 물들고 싶어하지만 그러는 것도 결코 (특히 ‘중년’ ‘여성’에게 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영화인’의 모습이 결코 하나의 시선이나 레이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중층의 존재임을 넌지시 드러낸다.
갑작스럽게 찬실 앞에 드러난 ‘유령’의 존재는 흔한 영화의 관습처럼 ‘페르소나’ 같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또 유령은 무의식 이상으로 독립적이며 분리하다가도 다시 또 어느 순간에는 찬실이 그렇게도 원했던 영화라는 존재를 물으며 현실/가상의 경계는 더욱 흐려진다. (유령이 자신을 ‘장국영’이라 스스로 선언하는 것은, 현실에서 경계의 삶을 살았던 ‘성소수자’ 장국영의 존재를 투영하는 듯 싶기도 하다.)
이러한 ‘반투명’한 순간들에서 영화는 ‘영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이미 자연스럽게 심리에 스며든 일상이자 다시 일상이 아닌, 그러나 꾸준히 파고드는 다층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주인공 찬실을 비롯해, 소피나 김영, 그리고 영화의 수미쌍관을 장식하는 스태프들에게도 적용한다.
굳이 ‘폼’을 잡거나 절대적인 선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영화를 개인의 위나 아래가 아니라, ‘옆’에 둘 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비로소 영화를 마주 대할 수 있음을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극중에서 계속 전개된 일상의 편린들이 조각이 어느 정도 맞춰지는 후반부에 이르러 모두가 모이는 순간으로 드러낸다.
그간의 영화를 만드는 영화가 ‘감독’에 초점을 맞췄다면 주인공은 물론 감독 본인이 영화를 종합적으로 총괄하는 ‘프로듀서’라는 위치에 놓인 것도 영화도, 영화를 만드는 개인도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영화는 일상의 군상극을 통해서 충실하게 증명하고, 투영한다. 그리고 이를 절제되지만 마냥 딱딱하지 않은 카메라의 워킹 연출이나, 쉽게 하나의 축으로 수렴되기를 거부하는 서사의 결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실제 삶에서 비슷한 역경을 격었던 윤여정, 계속 소모적인 역할에 배치되었던 (그러면서 연기 차원에서도 오명을 쓰고 만) 윤승아, 영화에서는 꾸준히 단역에 머무르고 만 강말금, 2010년대 이후로 급증하는 케이블의 장르 드라마의 도구적인 존재로 쓰여왔던 김영민, 배유람이라는 점 역시 필연이든, 우연이든 이 역시 많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이렇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감독 자신은 물론, 영화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도 ‘복’을 직조한다. 지금 당장 가진 복은 많지 않아도, 어느 순간 한국 (독립) 영화에서 큰 축이 되었지만 특정한 선을 넘지 못했던 일상을 다루는 영화의 시선도, 영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 시선이 협소했던 영화인/기자-평론가/관객의 시선을 넓히는 측면으로도 모두 세심한 손길을 기울이며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복’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동정’으로 내린 것도, 갑작스런 수혜로 만든 것도 아닌 ‘모두’의 고민이 만들어낸 총합이기에 이 ‘복’은 소중하다. 그리고 이런 고민의 영화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이 ‘복’은 더욱 모두에게 빛을 발할 것이다.
추신. 1992년 MBC FM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이 극중에 나옵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이나 장국영이라는 존재 이상으로, 시대상과 더불어 찬실이 영화에 대한 감정을 키웠을 요소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었다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