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냉소도, 무조건적 긍정도 아닌 복잡에 다가서다
하코타 유코 감독의 첫 데뷔작입니다.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거대 미디어 그룹 ‘츠타야’의 신인 감독 지원 프로젝트(TSUTAYA CREATORS' PROGRAM FILM)에서 2016년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제작이 이뤄졌어요. 한국에서 배우 심은경이 <신문기자>에 이어 한국인 배우가 일본 영화에 본격적으로 주연으로 등장하며 더 알려지길 했을 겁니다만.
작품은 이 작품이 한국에서 홍보한 방식처럼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번민에서 벗어난 힐링을 보여줄 ‘것처럼’ 초반부를 꾸밉니다. 광고 감독인 ‘스나다’(카호)는 한계에 놓여 있습니다. 스나다는 어딘가에 놓여있지만 동시에 놓여있지 않는 것처럼 자신을 인식해요. 결혼을 무의미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이미 결혼 해서 남편(와타나베 다이치)가 있고, 이런 저런 돌발 상황에 맞추는 것은 마치 어린애들 장난 같지만 그걸 매우 능숙하게 해냅니다. 남편은 아무리 자신이 말도 없이 외박을 해도 화 하나 내지 않은 소위 ‘착한 사람’이지만, 자신은 그런 남편에 뭔가 괴한 권태를 느낍니다.
주변에 놓인 상황들이 너무나도 이중적인 마당에 스나다는 지속적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 방식은 의도적이거나 충동적인 일탈이죠. 유부남과 관계를 가지기도 하고, 잔뜩 술에 취해 독설을 내뱉으며, 다시 취한 것을 핑계로 노래방에서 노래도 혼잣말도 아닌 무언가를 소리지르며, 잔뜩 토를 합니다. 하지만 스나다에겐 그런 행동들이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마구 쿡쿡 찌릅니다. 도피할 수록 그 도피의 방식은 스나다를 더 피폐하게 만들고, 그것이 반복된 결과 스나다는 자신이 정말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치 기다렸다는듯 친구 ‘기요우라’(심은경)이 등장하네요. 기요우라는 스나다와 달리 행동을 무척 읽기 쉽습니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단 달려들고, 그러다가 가끔씩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힐링물’을 표방하는 작품들에서 흔하게 보이는 친구와 함께, 자신의 고향이자 시골인 이바라키에 사는 엄마에게 전화가 온 걸 계기로 스나다는 기요우라와 함께 고향 마을로 떠나기로 합니다. 이제 힐링만 남은 걸까요?
그럴리가 있나요. <블루 아워>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입니다. 애시당초 이바라키는 분명 도쿄에 비하면 시골은 시골이지만, 차를 타지 않아도 ‘츠쿠바 익스프레스’를 타면 몇 시간 만에 도착할 정도로 가깝디 가까운 동네입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가평이나 양평 정도라 볼 수 있을 듯.) 스나다의 엄마(미나미 카호)의 대사에서 은연 중에 드러나듯, 애초에 스나다에게 ‘고향 도피’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자신을 압박하고 다시 자신이 경멸스러워지는 순간 고향을 이미 수차례 방문했지만, 역설적으로 스나다는 고향에서 한 번도 힐링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물리적으로 도피’했다는 행동 자체만 중요할 뿐입니다.
그럼 왜 스나다는 고향에서도 왜 감흥을 느끼지 못할까요? 이바라키가 그리 먼 동네가 아니라? 그러니 이바라키에서도 무례하거나, 이중적인 사람들이 많아서? 엄마 아빠는 물론 오빠의 행동이 어떤 순간엔 혐오스럽고 끔찍해서?… 하지만 다시 역설적으로 스나다는 도쿄에 있을 때는 물론 고향에 와서도 자신이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 때에 대한 꿈을 꿉니다. 혐오하지만 그곳으로 도피하고, 다시 실망하는 것의 반복입니다. 스나다는 계속 어딘가에 머무를 듯 하지만, 걸국 머무르지 못하고 붕뜨며, 계속 자기 주변은 물론 자기 자신 조차도 냉소합니다.
<블루 아워>는 완전한 이중도, 경계도 아닌,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경계를 거부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 쪽에 있기를 거부하는 ‘이중의 이중 부정’을 정면으로 관통합니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 작품은 스나다와 기요우라를 때로는 비교하고, 매우 직접적으로 스나다를 향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꼬집는 상황과 대사를 심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작품은 ‘그냥 각자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자’를 설파하는 걸까요? 이 작품이 값싼 개똥철학을 포장하는 작품이라면 그런 길을 매우 쉽게 걸어 가겠지만 그 역시 아닙니다.
이 작품은 그저 단순히 ‘경계인’이 되자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원색 같은 확실한 색채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작품은 겉으로 보기엔 이도저도 아닌 것 같은 색, 또는 매우 확실하게 원색으로 보이는 모습들 속에 3차원으로서의 ‘깊이’가 있음을 짚고 있어요. 기요우라는 때로는 순진하고, 저돌적이고, 맹한 캐릭터로 보이지만 어떤 순간에서는 ‘그러기에’ 더욱 내밀하게 접근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한 접근 속에서 너무 확실하다고 싫어하고, 때로는 너무 이도저도 아니라며 꺼려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그리고 ‘맥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러한 역사와 맥락이 있으니 ‘이해하자’는 쉬운 결론을 내리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일상적으로 당연한듯, 또는 이상한듯 여겨왔던 사람과 공간과 관계가 2차원의 면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3차원의 ‘입체’로 존재함을 ‘그저’ 말하는 겁니다.
어찌보면 매우 당연하고 쉬운 사고 방식이지만, <블루 아워>는 그 쉽게 보이는 사고법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때로는 과해보이는 스나다의 시니컬함을 반복-재현하며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나다는 물론 관객이 보기에도 스나다의 시선이 확고부동하며, 스나다의 부정적인 평가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하는 연출까지 가미되기도 하죠. 실제로 스나다 주위의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3차원의 입체로 보더라도 별로 좋은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모두를 긍정하거나, 모두를 부정하는 방법 밖에는 남은 길이 없어보이도록 만듭니다.
별로 퇴로가 없어 보이는 가운데, 기요우라의 모습은 어떤 ‘접근의 방법론’이 필요한지를 서서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포자기도, 무조건적인 포용이 아닙니다. 다만 손쉽게 ‘도피’하기 보다는, 왜 그들은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언행을 하는지를 ‘궁금해’하고 ‘탐구’하며 ‘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요우라는 쉽게 결론을 내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무례해 보이는 사람이든 조금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든 호기심을 가지고 차별 없이 접근해냅니다. 2차원의 경계에 사실 3차원의 축이 하나 더 있음을 기요우라를 통해 드러나도록 작품은 설계되어 있어요.
그것이 점차 수면 위로 가시화되어 드러날 때, 이 작품의 또 다른 핵심 요소인 ‘색채’가 부상합니다. 작중의 스나다는 극중 제목에도 대놓고 나와있는 ‘파랑색’을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일상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파랑색을 선호합니다. 푸른 톤의 옷을 계속 입고, 푸른 계열의 공산품을 선호하며, 푸른 차를 타고, 다시 ‘밤도 낮도’ 아닌 새벽 시간대의 짙푸른 풍경을 질주하는 것을 꿈꿉니다. 생각해보면 파랑은 흑백의 명도로 이뤄진 무채색과는 분명 다른 ‘원색’이지만, 역설적으로 채도가 어두워지면 검은색과 구별하기 어렵게되는 미묘한 색입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밤, 그것도 완전하게 깜깜한 밤 대신 가까스로 빛이 보여 모든 풍경이 짙푸른 그라데이션의 색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 풍경에서 하늘도, 숲도, 마을도, 길도 모두 ‘파랑’인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지만, 경계가 또 다른 축이 드러나는 순간 계속 요동치던 푸른 색의 풍경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푸른 색’이지만 ‘마냥 같지 않은’ 푸른색의 차이가 있음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를 드러내는 방식이 마냥 명쾌한 건 아닙니다. 하염없이 반복되는 냉소에 다시 직설적으로 톡쏘는 질문을 되돌리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직접’적이고, 푸른 색에 대한 비유는 셔레이드를 채 구축하기를 기다릴 여유도 없이 너무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이런 거친 감각에도 불구하고 뻔한 냉소나 긍정도 아닌, 하나의 단일한 색도 아니며 쉽게 경계라 분리하는 것도 아닌, 그 복잡다단한 것이 곧 하나의 색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심리’에 대한 고민에 대한 추구는 그야말로 ‘올해의 발견’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힐링을 기대했다면 무척이나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애초에 이 작품은 쉽게 누군가를 위로할 목적은 없고, 계속 잊을 만하면 꼬집고 깨뭅니다. 하지만 값싼 동정이나, 자기 파멸적인 냉소가 아니라, 어떻게 다가서고 접근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블루 아워>의 입체적인 결은 이 작품이 무엇을 응시하며 연출되었는지를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2010년대를 거치고, 이제 2020년 이지만 이상의 구현은 커녕 갈등과 혼란이 커지는 판국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단면도이자, 적절한 거리를 고민하며 서술한 ‘사회학적 에세이’같은 작품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돌출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