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포럼 2020의 비교상영회와 포럼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재일동포(교포)’, 또는 ‘자이니치’(在日). 한국 사회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일본에서 ‘한국(조선) 출신으로 차별받으면서 꿋꿋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람’의 이미지, 또는 ‘조총련계로 북한의 사주를 받으며 움직이는, 어쨌든 다른 이유로든 믿을 수 없는 사람’. 전자의 이미지를 정말 극명하게 대비하는 작품이 권희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김의 전쟁>(1992)이라면, 후자의 이미지는 육영수 피살 사건을 비롯한 온갖 반공 극화나 논픽션이 자주 소재로 삼았던 주제이다.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는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퍼지기 시작한 유화적인 분위기가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영상물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명준의 <우리학교>(2006)나 이즈츠 카즈유키의 <박치기!>(2004)이후로는 한국에 존재 자체가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조선학교’의 존재가 좀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재일동포’를 다루는 작품들 역시 조선학교와 같은 공간을 소재로 삼게 되었다. <우리학교>의 정신적 후속작인 <그라운드의 이방인>(2015)은 물론 재일동포 3세인 박사유·박돈사의 <60만번의 트라이>(2014), 이일하의 <울보 권투부>(2015) 등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 작품이 아직 막 퍼지기 전인 1990년대 중후반부터, <우리학교>가 한창 퍼지기 시작한 2000년대는 동시에 재일동포의 사회도 변하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하다. 1990년대부터 가속화된 여행 자유화는 재일동포 사회에 전쟁 이전을 경험하지 않은, 또는 경험했더라도 일제 강점기나 분단의 경험은 피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제3의 존재’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3세대 이상의 재일동포는 이전의 1·2세대처럼 ‘한국인(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점차 탈각한 세대기도 하다. 한국어를 반드시 배우고, 자신의 한국어(조선어) 이름을 꼭 인식하며, 한국(조선)의 ‘민족’ 문화를 더 이상 상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소위 ‘탈민족주의적’ 정서가 구축되었어도, 일본 사회 전반이 한국 사회 전반을 ‘내려다 보는’ 시선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균열은 여전히 존재한다. 재일교포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그 ‘개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역설적으로 자신의 부모와 선조로부터 내려온, 또는 자신이 속해있는 ‘재일동포 커뮤니티’ 사이의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 1990년대 이후의 재일동포 사회는 그러한 역설에 놓여 있었다.
그런 변화와 경계의 순간은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알린 작가가 본디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옮긴 이력을 지닌 소설가이자 각본가인 가네시로 카즈키(金城一紀)였다면, 영화로서 이를 더욱 밀접하게 보여준 창작자는 양영희(梁英姫, ヤン ヨンヒ)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공식적으로 한국에 소개된 양영희의 작품인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5)를 비롯해, 후속적 성격으로 제작된 <굿바이 평양>(2009), 그리고 현재로서는 가장 최신작인 동시에 극영화이며 한편으로는 ‘프리퀄’의 성격을 지닌 <가족의 나라>(2012)까지 양영희는 재일동포 2세대로써 자신과 가족,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대한 양가적인 정체성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양영희는 조선학교·조선대학교(한국 광주광역시에 있는 동명의 사립대학과의 별개인, 조선학교의 후속적 성격의 교육기관)을 다닌 바 있지만, 동시에 그는 우파적 성격의 재일동포 단체인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물론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하고도 거리를 둔다. 물론 한국(조선)에 대한 시선까지도 일본의 평균적인 시선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다. 자신은 일본에서 영상을 만들며 살아가는 한 명의 ‘인민’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일본 사회에 흔적 없이 녹아들 수도 없다. (또는, 녹아들도록 하지 않는다.) 이분법적으로 갈라진 일본의 주류적인 단체에도 거부감이 들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어찌되었든 ‘자이니치’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지만 벗을 수 없는 경계, 그러나 어찌되었든 인식해야지만 조금이라도 변화가 가능한 경계. 양영희의 작품은 그렇게 가시와 비가시를 오가는 경계의 속성을 지속적으로 꿰뚫었다.
그러나 양영희가 2000년대 중반에 갑자기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극단 등에서 활동하며 창작을 경험하고, 다시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자신의 고민을 형상화한 영상을 만들면서 자신이 표현을 방법론을 다져나갔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단지 한국에서는 그 궤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지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의 일부는 다시 역설적으로 양영희가 2020년 벽두에 <씨네21>에 편지를 보내고, 22년 동안 외부에 쉽게 알리지 못했던 ‘소거의 기록’을 다시 복구할 것을 천명하면서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양영희의 1996년 작품 <흔들리는 마음 - 재일한국·조선인 ·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揺れる心 - 在日韓国・朝鮮人・二つの名前の間で, 이하 <흔들리는 마음>)는 그렇게 다시 한국에 소환되고, 더불어 양영희의 명시적인 동의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원본 8mm 테이프와 구성을 도용·표절했다는 지적의 대상이 된 홍형숙과 그가 속해있던 다큐멘터리 창작 공동체 ‘서울영상집단’의 1998년 작품 <본명선언>이 함께 소환되었다.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와 KBS 스페셜 상영 이후 외부 공개가 중단된 작품은, 그렇게 세상에 나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지속적으로 해당 이슈를 가르는 잣대는 ‘표절·도용’을 비롯한 다큐멘터리 작업의 윤리성에 대한 문제이며, 분명 그 문제가 핵심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이 두 개의 작품이 약 10여분 간의 물리적 ‘교집합’과 주제 차원의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이상으로, 어떻게 해당 문제에 접근하고 있냐는 것이다.
당시 NHK 교육채널(현, NHK E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함께 살아가는 내일>(共に生きる明日)을 통해 방영된 양영희의 <흔들리는 마음>은 30분 내외로 편성된 작품이다. 1시간도 되지 않는 한정된 시간은 물론, 방송 프로그램 특유의 문법에도 틀을 맞춰야만 한다. 그러기에 <흔들리는 마음>은 온전히 양영희의 연출만이 반영된 작품이 아니며, NHK의 방송 문법에 맞는 편집이 함께 개입되는 한계가 존재한다. (작중에서 <함께 살아가는 내일> 진행자가 양영희에 대한 인터뷰 장면이 지속적으로 삽입된 것이 그 단적인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에서 양영희의 접근은 1995-1996년 당대 재일동포 3세대 청소년의 심리가 어떤지를 내밀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는 대도시 ‘고베’(神戸)로 유명할 효고현(兵庫県)에 위치한 모 고등학교는 일본에서는 드물게 재일동포들과 ‘공생’하자는 의식을 지속적으로 함양한다. (2020년 현재에도 이러한 문화는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듯 싶다.) 그러한 문화 안에서 재일동포 학생들은 재일동포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지도교사와 함께 ‘동포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의 학생들은 일 년에 두 번씩 있는 문화제에서 부채춤을 비롯한 ‘한국(조선)적’인 색채를 지닌 문화 공연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다. 해당 동아리에 들어간 재일동포 학생들은 누군가는 일본어 이름(통명)을 쓰고, 다른 누군가는 한글 이름(본명)을 쓴다. 그리고 ‘본명’을 쓰기로 결의를 한 학생은 문화제나 졸업식을 비롯한 학교 전체 행사에서 학생과 교원 전원 모두에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선언’을 한다. 이른바 ‘본명선언’이다.
양영희는 ‘동포회’ 구성원들의 활동과 모 학급에서 ‘본명과 통명’ 사이를 놓고 전개된 학급회의, 그리고 문화제에서 진행된 ‘본명선언’을 중심으로 전통적으로 해당 고등학교에서 전개된 ‘민족적인 행사’와 다시 그 행사에 참여하는 학생들 사이의 ‘거리’를 조망한다. 어떤 학생은 무척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명을 무리없이 드러내지만,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다. 특히 어떤 학생은 ‘본명’을 밝히는 것 자체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퉁명스럽게, 조금은 관조하는 자세를 지닌다. 다시 어떤 학생은 ‘문화제’라는 감정적으로 고양된 순간에 이르러 자신은 이제부터 본명을 쓸 것이라 선언하지만, 동시에 그 선언은 쉽게 학교 밖을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학교에서 본명을 쓰는 것도 하나의 용기지만, 다시 그 용기를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공간도 현재로서는 학교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짐짓 감동적으로 보일 수 있던 ‘문화제 직후 본명 선언의 순간’은 그렇게 결말부에 이르러 그 감동의 이면이 드러난다. 통명을 쓰기로 한 학생도, 본명을 쓰기로 한 학생도 결국 ‘학교 밖’이라는 공간에 이르러서는 다시 같은 처지에 놓일 수 밖에는 없게 된다. <흔들리는 마음>은 그렇게 제목대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다시 이를 쉽게 유지할 수 없는 재일동포 3세 사회의 내밀한 측면을 보였다.
반면 <본명선언>은 외부에서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선과 틀을 다시 그대로 ‘재일동포 사회’에 끌고 갈 뿐이다. 김명준의 <우리학교>가 조선학교와 학생에 대한 낙관적인 시선이 상당히 강하더라도 오랜 시간 취재를 통하여 ‘라포’(rapport)를 형성한 것에 비해, <본명선언>은 작품 내에서 지속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그 충돌은 감독의 명징한 주장과 취재원과의 입장 충돌이라기 보다는, 이미 시선이 굳어진 상황에서 다시 그 틀을 그대로 밖는 것에 가까울 정도이다. 극장 상영을 상정하고 제작된 것은 물론 러닝타임도 1시간 정도인 <본명선언>은 <흔들리는 마음>보다는 이런저런 몽타주나, 극적인 효과를 낳기 위한 연출과 방법론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지만 작품의 내용은 연출자의 차원에서는 나름 고심했을 연출과 맞닿지 않는다.
작품은 ‘핍박받는’ 재일동포 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본명’을 쓴다는 선언으로 ‘감동’을 낳으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작품 중간중간에 <흔들리는 마음>의 영상과 구성을 그대로 가져온 장면은 물론, 해당 영상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려는 순간에서 터져나오는 ‘불협화음’이 이러한 접근이 애시당초 가능했는지를 고민케 한다. 통명을 쓰기로 선언했던 학생은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가 되어서도 그 선택을 바꾸려 하지 않고, 본명을 학교에서 줄곧 선언했던 학생은 졸업 뒤에는 ‘공간과 장소’에 맞춰 통명과 본명을 섞어 쓰고 있다. 또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타인에게 쉽게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작품은 그 ‘실패’의 순간을 반전인 동시에 클라이맥스로 활용하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실패는 <본명선언> 내적으로는 물론 <흔들리는 마음>과 함께 보는 순간 더욱 두드러진다. 연출자가 사전에 이미 상정했던 결론과도 충돌하는 것이며 다시 한편으로는 순전히 ‘관찰자의 욕망’이 너무나도 강하게 투사되고 있는 장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숱한 논란을 낳았던 이상호의 다큐멘터리 작품들(<다이빙벨>, <김광석>, <다이빙벨 그 후>, <대통령의 7시간>)과도 맞닿는 지점까지 보일 정도이다.
홍형숙의 200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인 <경계도시> 시리즈에서 송두율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경계인’으로 정체성을 규정했던 것은 이분된 경계 자체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묶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경계 좌우에서 모두 자유롭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관조하는 한편, 그러한 인식을 통해 다시 새로운 공간을 만드려는 마음이 동시에 작용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경계도시> 시리즈의 두 작품에도 드러나듯 한국 사회는 물론 북한 사회/또는 북한에 동조하는 이들은 이를 ‘박쥐’같은 행동이라는 식으로 다시 규정지으며, 솔로몬의 판결처럼 송두율을 반으로 가르거나, 어느 한 쪽의 존재로 귀결시키고자 싶어 했다.
역설적으로 <본명선언>의 모습은 <경계도시>에서 드러났던 ‘구분짓기’의 자세가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체화되고 있다. 본명을 선언한다고 매사에 자신을 한국인(조선인)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통명을 쓴다고 하여 정체성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다. <흔들리는 마음>이 그 경계 사이의 갈등과 혼란을 한정된 상황에서도 최대한 세심하게 드러내려 했다면, <본명선언>을 그 경계를 쉽게 어떤 숭고함과 감동으로 이끌고 싶어한다. 그리고 작품 내의 그러한 ‘일변도의 선언’은 작품 밖으로 계속 이어져, 결국 현재의 국면을 낳게 되었다. 빌 니콜스가 일찌감치 <다큐멘터리 입문>의 첫 머리에서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쟁점’을 말했던 것은 결국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현실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편집과 재해석을 거치며 실제 발화자가 의도했던 바가 변형될 수 있는 ‘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언제나 충분한 장르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서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것은, 또는 이를 하나의 영상물 등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그런 위험성을 수반하고, 그러기에 이를 간과하지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얼마나 실제 제작의 현장에서, 감상과 전파의 순간에서 체화되었는가. 22년의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논란은 한편으로는 그 시선의 고민을 낳을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