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무비 같은, 자리를 구하기 위한 작지만 긴 여정의 만화
계속 체크리스트에는 넣어두었는데, 작년 12월에 나온 책을 이제서야 제주에서 너무 뒤늦게 읽었다. (심지어는 김소희 작가의 배우자이기도 한 자바르떼의 이동근님을 몇 달 전 우연히 술자리에서 만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꼭 읽겠다는 이야기를 하고도 이제야.)
2000년대 초반 서울문화사의 만화 공모전에서 <밍크> 부문으로 당선한 김소희는 한동안 자신의 작품을 하기 어려웠다. 다시 몇 년 뒤 2005-2006년경 학산문화사를 통해 탈학교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고양이와 새>를 펴낸 이후로, 만화보다는 일러스트 작업으로 삶과 창작을 이어나갔다. 이후 1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작가는 2018년이 되어 자신을 반영한 캐릭터 ‘송이’를 등장시키며 어렸을 적 이야기를 다루는 에세이 성격의 사적 만화 <반달>로 다시 작가 자신의 만화 작업을 시작한다.
<자리>는 <반달>의 후속적 성격을 지니는 작품이다. <반달>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캐릭터 ‘송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작품 구석구석에서 작가 자신과 연관된 몇몇 흔적을 드러내며, 작가 자신도 후기를 통해서 이 작품이 자신과 친구 고정순 작가의 이야기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는 <반달>이 그저 ‘후일담’이나 ‘회고적 창작물’의 성격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처럼, 공간적으로든- 주체적인 창작과 삶의 영역으로든 ‘자신’과 ‘친구’의 ‘자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어떤 의미를 지녔었는지를 탐구하기에 의미를 가지고 몰입감을 만든다. 본래 한국만화가협회와 네이버가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 만화 또 다른 시선’ 프로젝트로 2019년에 처음 웹툰 단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자리>는 (https://m.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23862&no=14&week=sun&listSortOrder=ASC&listPage=1) 장편이 되어서는 기존 단편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흐름을 드러낸다. 단편 <자리>가 여러 명의 여성 주인공을 바탕으로, 열악한 반지하 작업실을 구하는 여정에서 각자의 ‘자리’를 고민하는 심리에 방점을 맞춘 반면 장편 <자리>는 단편에서 등장한 방을 비롯해 여러 방들을 오간 ‘흔적들’(traces)에 연원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장편 <자리>는 전형적인 웹툰 흐름으로 구성된 단편 <자리>나, 좀 더 다양한 컷이나 연출로 구성된 전작 <반달>과 달리 3행의 4열로 구성된 일정한 흐름을 반복해 나간다. 조금은 단조로울 수 있는 구성의 흐름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 흐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나간다. 마치 작중에 등장하는 두 명의 주인공 ‘송이’와 ‘순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기에 등장한 온갖 ‘열악한 방들’을 연상케 하는 조그마한 컷들은 각각의 방을 묘사할 때, 주인공이 어떠한 순간에 부딪칠 때 파노라마를 연상시키듯 넓게 뻗어나가는 화면으로 이어진다. 이는 출판만화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전반적인 표현이 절제되는 상황에서 이 와이드컷은 더욱 강렬한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이 연출에 두 주인공들의 서사와 ‘여정’이 더해지며 이 작품은 더욱 깊어져간다. ‘송이’는 만화를, ‘순이’는 일러스트를 그리는 창작자이다. 둘은 같은 미술대학을 졸업해, 창작자의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이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일할 수 있는 틀은 너무나도 제한적이며, 그 틀은 자신들말고도 무수한 이들이 덤벼드는 곳이며, 심지어는 그 틀을 꾸리는 이들이 이 심리를 이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문제는, 작품을 그리기 위한 기본적인 작업을 위한, 동시에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그저 물리적인 의미를 넘어, 내가 심리적으로 안착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소구기도 하다.
마치 로드무비를 연상시키는 듯 한 송이와 순이의 여정은 이 복잡한 맥락들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기에 때로는 가볍고 말랑해보이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단단해질 수 밖에 없는 일상의 편린에, 그리고 그 일상을 감싸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존재를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다. 유튜브나 온갖 커뮤니티에서는 하나의 인기 콘텐츠가 될 정도로 주목을 끄는 ‘온갖 이상한 방’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곳에서 사는가. 공간의 말도 안 되는 열악함을 비웃는 것은 쉽지만, 그 열악함이 탄생되고 유지되는 것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이전에도 여러 아티클들이나 에세이는 이를 지적했지만, 김소희의 <자리>는 만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그림와 글을 모두 종합하여 만드는 다맥락성을 활용하여,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수면 위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 공간에 작품의 캐릭터는 왜 사는 것을 택하며, 이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 주변에서 사는 이들, 그리고 이 공간에서의 삶은 어떠한지를, 글이었으면 무척이나 긴 설명이나 서술이 필요한 지점을 <자리>는 무척이나 간명한 연출로 긴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실제 창작의 경험이 있다면, 작중에서는 ‘피터퐝’으로 드러나는 네이버 카페 ‘피터팬의 좋은방 구하기’나 온갖 부동산, 어플을 전전했던 사람에게는 공감이 갈, 이 ‘자리 구하기’의 심리와 서사를 집약하여 작품으로 녹아낸다.
이러한 연출로 드러나는 것은, 물리적 공간으로는 물론 창작의 영역이나, 각 개인의 삶의 차원에서도 ‘개인’이 쉽게 발을 딛고 설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상황이다. 어려운 창작의 길을 택한 청년도, 간신히 자신의 집을 가지며 임대로 수익을 버는 중노년의 사람도 역설적으로 모두 자신의 ‘자리’가 없다. 각자마다 생활의 수준, 삶의 경로, 집의 유무는 달라도 작중에는 등장하지 않는 모두가 쉽게 현실에 치이고, 삶에 부딛치며, 서로를 크고 작게 상처 입히며 자신의 좁고 좁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렇게 확보한 자리는 쉽게 내 자리가 되지 못한다. 선순환의 지속이 부재한 상황에서, 결국 진정으로 순환과 공존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주인공의 막판에 일어나는 갈등이 해소되는 여로처럼 각자의 삶이 조금이라도 착근될 수 있는 ‘터’를 만들어야 함을 작품은 넌지시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