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주술회전 0> 단평 : 선과 빛의 카탈로그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과 비슷하지만 다른 전략들

by 성상민

일본 엔터테인먼트/시각 서브컬쳐 산업이 미국 이상으로 철저히 미디어 프랜차이즈를 강조하고, 이를 잇는 큰 축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젠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식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미디어 프랜차이즈 기획물의 부분만 즐길 수 있던 2000년대 이전과 달리 2010년대 이후 일본 미디어 프랜차이즈가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한국이 그 주시대상에 들어오며 분명 상황은 이전보다 좋아졌죠. 하염없이 작품이 들어오길 기다리거나, 기다림을 찾지 못해 직구를 시도하거나 불법 공유를 찾아나설 필요는 확실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도 미디어 프랜차이즈를 프랜차이즈로서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이 이미 도래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서두에 먼저 꺼내는 것은 <주술회전 0>는 철저히 그 프랜차이즈 기획 아래 제작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귀멸의 칼날>의 연재가 끝나고 슈에이샤 <주간 소년 점프> 인기작의 위치를 이어받은 아쿠타미 게게의 <주술회전>은 일본의 전통적 소재인 ‘주술’을 중심으로 판타지 배틀과 골합해낸 작품이죠. 이전에도 1980년대 옴니버스 퇴마물로 인기를 끌었던 <공작왕>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2010년대 후반의 트렌드에 맞게 잘 여며내며 계속 꾸준히 순조로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미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며 인기를 끌었고, 다른 인기 일본 만화가 그렇듯 곧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확정되어 이렇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난 해 공개되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물론(아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넘어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했죠) 한국이나 대만, 미국 등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흥행을 끌었던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처럼, 이런 식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미 캐릭터나 서사를 익히 알고 있음을 가정하고, 초반에 서사적 전개의 베이스를 쌓는 과정을 생략하고 ‘이 극장판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일종의 팬서비스’를 진행하는 것이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작품들과는 상황이 달라요. <주술회전 0>의 원작은 동명의 단행본이자, <주술회전>의 연재가 정식으로 결정되기 전인 2017년 작가가 파일럿 성격으로 그렸던 <도쿄 도립 주술전문학교>가 메인입니다. <주술회전>의 중요 주조연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주술회전>의 설정이나 전개가 확립되기 전에 그려진 작품이고, 동시에 시계열 상으로는 ‘프리퀄’에 속하는 스토리이기도 하죠. 팬들에게 서비스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작품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문턱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에피소드를 이번 극장판으로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작품의 연출도 조금은 이질적입니다.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 등의 인기 만화/애니메이션의 극장판이 아무리 극장판 전용 에피소드를 만들어도 스토리텔링의 곡선에서 갑자기 뚝 떼어 독립적인 작품이라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면, <주술회전 0>는 완결성이 있는 짧은 에피소드 여러 개를 다다닥 붙여낸 뒤 후반부에 들어 밀도 높은 액션이 담긴 클라이맥스로 터트리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초중반의 전개는 간략한 설정과 등장인물들을 스피디하게 설명하며 이 작품이 어떻게 흐를지를 보여준 뒤 한 번 쉼표를 찍고, 다시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에서 최대한 후반의 액션 배틀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성장을 빠르게 압축하여 작은 절정과 소강을 거치며 계속 쉼표를 찍는 것입니다.


덕분에 후반부에 액션이 몰아치기 전까지는 조금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완벽하게 하나의 서사로 흘러가는 작품을 기대했다면 조금씩 끊기는 감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분위기 환기용 코미디 시퀀스도 (원작에 있다고 해도) 툭 튀어나오니, 마치 단락들의 집합에 가까운 느낌이 좀 더 강해집니다. 이러한 느낌은 원작의 장면을 최대한 고스란히 살리는 동시에, 한정된 시간 안에 왜 이들이 잠시 뒤 거대한 싸움에 나서야 하는지를 인식시키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후반부의 연출은 전반부에서 빌드업을 위해 아껴놓았던 임팩트를 한번에 쏟아내며 관객을 순식간에 몰입시킵니다. 액션에 담긴 서사적 대립 구도는 전형적인 선과 악, 엘리트주의자와 평화주의자의 대결일 수 있어도- 이를 다루는 연출은 무척이나 역동적으로 구성되며 관객이 푹 빠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전반주 액션에서도 부분적으로 쓰였던 2D 작화와 3D 모델링 동새의 결합을 통한 스피디한 연출은 후반부에서는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며 애니메이션 특유의 상상력이 낳는 감각을 한 층 폭발시킵니다.


특히 선과 빛을 활용한 연출이 극에 달했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습니다. 생각치도 않은 저주에 시달리며 계속 유약한 모습을 보여온 주인공 ‘옷코츠 유타’가 ‘친구를 지키기 위해’ 각성할 때 드러나기 시작하는 연출은 서로 맞붙는 이들끼리의 액션에 동세의 선을 강조하며 그려내어 운동감을 늘리고, 여기에 점멸하는 빛을 3D와 2D의 접합에 덧대는 액션은 2000년대 이후 ‘실감나면서도 더욱 실제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골몰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제작사 MAPPA의 하나의 대답과도 같습니다. 이전에도 질 좋은 액션 씬이 연속되던 영화는 이 시퀀스를 기점으로 주인공의 고양된 감정을 마치 이입한 듯이 더욱 빠른 호흡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연출은 2D의 고정된 복합 표현인 만화를 움직이는 매체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예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사의 차원에서는 딱히 크게 흠잡을 점도 없지만, 미디어 프랜차이즈의 면모에 더욱 충실한 ‘보편적인 결과물’에 가깝긴 합니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베이스로 삼은 원작 자체가 기초 다지기를 위한 작업물이기에 조금은 친절하지만, 결국 이 작품의 본령은 팬들에겐 <주술회전>의 세계에 더 빠져들기를 (그리고 지갑을 더 열어주기를) , 팬이 아닌 이들에게는 이를 계기로 작품에 문을 열기를 바라는 것이니까요. 메인의 서사는 전형적인 판타지를 기반으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성장과 극복이지만, 다시 이 주변에는 소위 ‘떡밥’들을 솔솔 뿌리면서 궁금중을 키우거나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미디어 프랜차이즈’의 속에서 <주술회전 0>의 제작진들은 ‘상품’이라는 길을 나아가면서도, 다시 그 상품을 독특한 연출을 통해 마냥 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제작사 MAPPA가 <주술회전> 같은 액션 판타지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한구석에>나 <사라잔마이>, <도로헤도로> 등등의 독특한 면모를 끊임없이 시도하는 특성에서 기인하는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술회전>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기쁜 선물이자, 딱히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도 나쁘지 않은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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