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마주하는 류승희의 만화, 어린이 만화에서도 두각을 보인다
류승희, <검정마녀 미루> 1-2 (완결), 보리, 20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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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희는 2013년에 출간된 단권 만화 <나라의 숲에는>을 통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비록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는 못했다. 지금처럼 독립출판물에 대한 주목이 활발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이 책의 출판사가 처한 상황도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라의 숲에는>은 2000년대부터 활동한 한국의 초기 독립만화 출판사 중 하나였지만, 결국 지속적인 경영난 등이 문제가 되어 2015년을 끝으로 실질적으로 사업을 멈춘 ‘새만화책’의 책이었다. 이미 2010년대 이후로 조금씩 발간권이 줄던 새만화책이 가까스로 사업 중단 직전에 낸 책 중 하나가 바로 <나라의 숲에는>이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숲에는>은 류승희가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고 싶은 방향성이 한가득 담겨 있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나라의 숲에는>은 최소 20대 후반, 또는 30대로 보이는 4명의 절친 여성들이 제목대로 일본 나라 지방을 여행가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친하기에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다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은 서로를 어떤 의미로든 잘 알아가는 계기라 하지 않던가. 여행에서 발생하는 트러블은 아무리 친한 사이일지라도 각자 살아온 경로가 다른 이상 그 간극이 결코 좁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여행’은 서로를 쉽게 갈등으로 몰아넣는 길이면서도, ‘선’에 갇혀 있던 이들이 잠시나마 선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다시 여행 이후로도 ‘선’ 밖을 모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나라의 숲에는>은 여러 한계 속에서도 작중의 주인공인 네 명의 여성들이 어떻게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여행에서 각자가, 또는 서로가 어떤 심리의 변화를 마주할 수 있었는지를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드라마 작품이었다. 비록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채, 새만화책의 사업 중단과 함께 절판이 이뤄지며 쉽게 만나보기 어려운 만화가 되었지만 <나라의 숲에는>이 지닌 방향성은 이후 류승희 작품에서 계속 가지처럼 줄기를 뻗어나가게 된다.
그 한 줄기가 <나라의 숲에는>의 실질적이거나 정신적인 후속작이라 봐도 무방할 <그녀들의 방>나 <오늘도 잘 살았습니다>와 같이 현실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여성 개인, 그리고 그 개인들이 뭉쳐 형성된 집단과 조직에서 등장하는 에세이로 흘러간다면, 다른 한 줄기에는 보리출판사의 어린이 (만화)잡지 <개똥이네 놀이터>를 통해 선보이는 어린이 만화 작업이 있다.
류승희의 첫 번째 어린이 만화 <나리 나리 고나리>(단행본 출간 2019년)는 에세이 만화에서 먼저 두각을 드러냈던 류승희가 어떻게 어린이 만화를 작업할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선언이었다. 평범했던 한 아이 앞에 우연한 계기로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등장하고, 그 통로를 통해 아이는 그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인지한다. 그 세계는 분명 자신이 이전까지 알아왔던 세계는 아니다. 그러나 차츰 살펴보는 순간 그 세계는 본래의 세계와도 닮거나, 또는 이를 뒤집어서 존재하는 면모도 존재한다. 주인공은 그 세계를 마주하며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며 관계를 형성하고, 이윽고 자신도 함께 성숙하게 된다. <나라의 숲에는>에서 세밀하고 부드러운, 때로는 차가워도 마냥 잔인하지는 않은 연필화를 선보였던 류승희는 <나리 나리 고나리>를 통해서 수채화를 접목하며 더욱 부드럽고, 여러 ‘환상소설’(환상문학)을 연상하게 하는 색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이윽고 <나리 나리 고나리>처럼 보리의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되고, 2022년에 완결권인 2권이 출간된 류승희의 신작인 <검정마녀 미루>는 이러한 환상적인 면모를 더욱 강화한 작품이다. 제목처럼 직접적으로 작중에 ‘마녀’가 등장하는 작품은, 어느 정도 체계나 클리셰가 잡힌 판타지 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존재가 된 ‘마법 세계’를 작중의 전면으로 호출하고 있다. 그러나 류승희가 이 세계를 이어나가는 방법은 기존의 장르 전형(클리셰)를 따르는 대신 작가 자신에게 익숙하고, 여러 차례 시도한 적이 있는 에세이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검정마녀 미루>의 한 편에는 ‘마녀의 숲’으로 상징되는 마법의 세계가 있다면, 그와 이어지는 다른 한 편의 세계이자 실제 현실과 가까워 보이는 세계는 한국의 작은 동네이다. 마냥 가난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결코 풍족하지는 않은 곳이다. 마치 비슷한 모양새의 ‘연립’이나 ‘빌라’와 같은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밀집한 곳처럼, 그리고 눈비라도 오면 쉽게 미끄러질 것만 같은 그러한 곳. <검정마녀 미루>의 주된 무대는 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네에 주인공 ‘미루’가 이사를 오면서 본격적인 작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미루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가는 것에 가졌던 일말의 기대는 보기만해도 까마득한 언덕인 ‘까치고개’의 모습을 보며 바로 깨진다. 동시에 하얀 피부에 조금은 허약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미루는 자신을 쉽게 남자로 여기지 않는 동네 슈퍼집 딸 복희의 취급에 쉽게 울컥하는 등 자신의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 또한 가지고 있다. 이사를 갔어도 평소에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결절들의 삶이 계속될 분위기이다. 그러나 곧바로 전개되는 비일상의 순간은 미루는 물론 복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삶을 급변하도록 만든다. 주변에서 ‘폐지 줍는 노인’ 같은 모습으로 쉽게 볼법한, 아픈 허리를 이끌고 홀로 빌라 지하층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는 알고 보니 마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상급마녀’ 중 하나인 ‘검정마녀’였다. 마을에서 처음에는 잘못 본 것으로만 생각했던 ‘말하는 고양이’도 그 검정마녀가 기르는 고양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마녀’로 지목되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이들이 고독하게 홀로 고양이를 기르며 사는 노인이었던 것처럼, 동시에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에서 수행한 연구의 기록처럼 한국 사회에서 노인의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 것처럼 ‘검정마녀’의 모습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녀’라 하기에는 어딘가 많이 이미지가 달라 보인다. 류승희는 이 대목에서부터 장르의 문법과 작가 고유의 에세이적 문법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왜 검정마녀는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음에도 왜 마녀의 숲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가. 거기서 질문을 시작한 작품은 미루가 마녀의 숲에 와서 온갖 사건을 겪고, 다시 미루가 ‘마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다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작중의 세계에서 ‘마녀’는 오로지 여성만이 될 수 있는 직업이자 계급적인 위치이다. 왜 ‘미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마녀의 숲에서 만난 라이벌, 또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된다. 소위 ‘엘리트 마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꼬마 마녀 지망생 ‘가문비’는 오랜 시간 동안 남자가 마녀가 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마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미루의 모습을 비웃지만, 정작 가문비 역시도 이미 훌륭한 성적과 성과를 거둔 언니나 다른 가족들에게 치여 비교받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언급하지 않는다. 왜 ‘가문비’는 당연히 마녀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쉽게 답변을 낼 수 없거나, 작중에서도 속 시원하게 답변을 내리는 대목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나라의 숲에서>에서 시작된 류승희의 지난 만화와도 연결되는 맥락을 지닌다. 왜 우리는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구조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다시 그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류승희는 남성 중심 사회를 뒤집고, 각자가 살고 있는 공간과 외견적/경제적 특성으로 결정되는 가치 평가를 뒤집으며 자신만의 ‘환상성’을 만든다. 그 환상성은 물리적으로는 현실과 떨어져있어도, 완벽하게 현실의 세계과 유리되어 있지는 않다. 현실과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는 세계이기에, 그리고 그 세계는 실제 현실의 구도를 마치 ‘미러링’하듯이 뒤집어서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 쪽의 세계에만 익숙한 이들은 쉽게 구도의 바깥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검정마녀나 미루 같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선’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선을 마주하는 순간, 새로운 사건들이 계속 펼쳐진다.
이러한 고유한 세계의 이해와 시선이 마주하기에 <검정마녀 미루>는 얼핏 보기에는 흔한 ‘마법 세계를 다룬 어린이 만화/동화’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어도, 그 안을 이루는 구도는 결코 흔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이가 아닌 독자가 봐도 마음에 스며들 수 있는, 또는 자신이 익숙하게 봤던 것을 낯설게 보도록 만드는 효과를 만든다. 여기에 류승희 특유의 펜선과 수채화 스타일의 채색이 더해진 작화는 (아마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연재했기에 가능한 기능적 연출과 더불어) 그 환상의 세계관에 더욱 구체적인 느낌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류승희는 어린이 만화의 영역에서도 부드럽지만 마냥 부드럽지많은 않은, 현실의 무게를 마주하면서도 결코 차갑지 않은 복합적인 감각을 새롭게 만화의 세계를 접하는 새 독자들에게, 이미 출판과 만화의 문법한 익숙한 독자들에게도 독특한 감각을 선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