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섬멍 만화, <우리의 제철은 지금> 단평.

어딘가에 다양한 모습으로 살고 있을 너, 나, 우리를 위한 요리

by 성상민


섬멍, <우리의 제철은 지금> (단권 완결), 창비, 2022.

(구매 링크 [알라딘] : http://aladin.kr/p/XfC6X )


레진코믹스에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연재한 퀴어 만화 <청아와 휘민>으로 데뷔한 섬멍 작가는 2019년부터 현재까지 카카오웹툰에 연재 중인 <타원을 그리는 법>을 비롯해 꾸준히 여성들 간의 사랑이 드러나는 작품을 그리는 만화가이다. 동시에 섬멍 작가는 여러 인터뷰에서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레즈비언’이라 선언한, 퀴어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창작자이기도 하다. 작가가 지니고 있는 퀴어적인 정체성은 매 작품마다 헤테로가 아닌 커플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구현되지만, 작가는 단순히 이 지점을 강조하는 선에서 작품을 그치지 않는다. <청아와 휘민>이 레즈비언 정체성을 지니며 서로 사귀는 두 인물 간의 관계는 물론 두 인물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습들을 지긋이 드러내고, <타원을 그리는 법>이 직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온갖 음모가 섞인 미스터리의 장르 안에서 전개되듯 섬멍 작가는 이미 일상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퀴어 정체성의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04443faed3e787ea0cda48753261.png 섬멍 작가의 데뷔작 <청아와 휘민> (2016 ~ 2018).


그러한 차원에서 연재 없이 (정확히는 섬멍 작가의 블로그에 짧은 콘티 형식으로 공개된 바가 있다.) 단행본으로 곧바로 출간한 신작 <우리의 제철은 지금>은 섬멍 작가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작가 자신과 주변 인물을 형상화한 ‘사적 에세이’ 스타일의 만화이자 ‘요리’ 만화이지만, 작품이 전개되는 노선은 섬멍의 다른 작품들과 다르지 않은, 아니- 더 확대되는 길을 택하고 있다. 퀴어적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서, 그저 주변에서 마주하고 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파트너를 형상화한 캐릭터의 에피소드로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은 이 작품의 작가 또는 화자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인식하기 어려울 것이다. 작품의 전반부에는 매주 도래하는 마감에 치여 살고 있는 작가, 그리고 그 작가와 함께 살며 항상 망토 같은 스타일의 후드티를 즐겨 착용하는 ‘파트너’(이하 ‘망토’)가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일상의 편린 속에서 어떠한 음식을 손수 해먹기 위해 노력하는지가 집중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의제철은지금_1.JPG


그리하여 작품에서 강조되는 순간은 이 ‘편린’들과 편린 속에서 마주하는 ‘음식’의 모습들이다. 예를 들어, 작품의 첫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매주 마감에 쫓기는 작가는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작품 마감이 시간과 끝없는 줄넘기 경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감 때문에 굶고 살 수 만은 없다. 밖에서 일정을 보내던 ‘망토’가 계속 마감으로 쫓기던 작가에게 하나의 ‘구조신호’를 보낸다. “(푸드)트럭 나왔다!” 그 순간 쉼 없는 마감은 잠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컷을 채우는 모습도 ‘망토’가 사오게 될 음식으로 한가득 채워진다. 어떤 음식을 한아름 손에 들고 집에 찾아올까, 한참을 여러 상상 속에서 뛰놀던 작가에게 드디어 비보가 도착한다. 하지만 ‘망토’가 손에 든 것은 기다리던 음식이 아니라 웬 맥주. ‘망토’의 가볍지만 엉뚱한 장난에 잠시 짧은 희극이 펼쳐지고, ‘망토’는 드디어 오늘의 만찬을 꺼낸다. 오늘 작가와 망토의 밥은 ‘목삼겹 바비큐’이다.


이 순간은 자칫 밋밋하게 풀면 매일 업무의 과정에서 흔하게 찾아올 수 있는 무료함과 따분함, 그 지루한 순간을 잠시 깨우는 ‘일상의 발견’으로 그칠 수 있다. 작가는 이 순간들 하나하나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별 것 아닌 일 같이 보여도 그 순간이 작가에게는 결코 쉽게 떠나보낼 수 있는 순간이 아니다. 섬멍 작가는 매 화의 바탕이 되었을 삶의 어떤 순간 자신과 ‘망토’가 느꼈을 감정을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재치를 가미하여 전달한다. 얼핏 보기엔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최소한 그 당시를 느낀 당사자에겐 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다. 멀리 들여다보면 평탄할 수도 있는 감정을 작가는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고 코미디를 접목하며 순간과 감정의 생생함을 신선하게 전달하려 시도한다.


우리의제철은지금_2.JPG


그 과정에서 일상을 함께하는 음식도 함꼐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컬러 없이 흑백으로만 작업된 작화임에도 불구하고 한 껏 힘을 넣어서 그렸을게 분명한 음식들의 모습에서는 섬멍 작가가 이 장면을 그리며 느꼈을 식욕과 당시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난생 처음 먹는 도루묵을 굽다가 꽤나 기괴한 모습으로 오그라들며 고개를 치켜 세우는 도루묵의 광경, 작가의 실수로 큰 곤경에 빠진 ‘망토’가 언짢은 감정을 듬뿍 담아 만들어낸, 그러나 그만큼 재료도 듬뿍 넣어 깊은 맛을 자랑하는 스튜의 모습. 그 음식과 재료들의 모습은 꼭 ‘맛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품으로 소환되지 않는다. 파트너 ‘망토’와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 주변에 있던 음식을 매개로 당시의 감정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전달의 과정이 주가 되기에 <우리의 제철은 지금>에서는 주인공들 사이의 특별한 스킨십이나 사랑을 주고받는 키워드가 담긴 말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하루 하루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독자들의 모습처럼, 작품의 두 주인공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사전 정보의 유무에 따라 이 주인공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어렴풋이 알게될 따름이다.


하지만 계속 그러한 일상 속 감정의 전달이 주가 될 것처럼 보였던 작품은 스스로 작품의 중후반부에서부터 조금씩 서서히 자신과 ‘망토’가 어떤 관계인지,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가도 자신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국 사회’가 어떠한 상황으로 몰아가는지를 내비추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작가 자신과 파트너 ‘망토’는 굳이 정체성에 대한 특별한 내색이 없이도 일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둘 만을 위한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이들은 결국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고정적인 관념’과 마주할 수 밖에는 없게 된다. 작중의 시간대는 이미 ‘후폭풍’이 다 지나간 국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존재한다.


우리의제철은지금_3.JPG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해도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에서 번민은 자연스럽게 빚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작품은 담담한, 그러면서도 ‘웃픈’ 일상 속 코믹을 발견하는 기조를 놓치지 않는다. 편견은 존재함은 어떤 식으로 하도 완전이 없던 것처럼 만들 수 없어도, 마치 한치 앞으로 성큼 다가온 마감에 쫓겨도 그날 먹을 밥을 생각하는 작가와 ‘망토’의 모습처럼 이 둘은 자신이 그날 해먹을 밥을 생각하며 지긋이 전진한다. 거창하게 머리띠를 두르고 저항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당연하게 발생하는 정체성’으로 여기지 않는 구조에 무릎 꿇지 않고 그들은 오늘 먹을 밥, 내일 할 일정을 고민하며 살아감으로서 세상에 나름대로 저항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제철은 지금>이 지니는 특성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만화인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와 비슷하면서도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퀴어 커플의 일상과 그 속에서 차리는 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구조, 이들이 특별히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강조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부대끼는 모습을 보여주는 선택이라는 차원에서 두 작품은 닮은 측면이 느껴진다. 장르 클리셰로서 다뤄지는 동성애가 아닌, 실제 삶 속에서 묻어나는 퀴어의 삶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측면에서 <어제 뭐 먺었어?> 또한 하나의 지평을 일찌감치 이룩한 지점이 있다.


우리의제철은지금_4.JPG


이에 비해 <우리의 제철은 지금>은 ‘식사와 함께하는 퀴어 커플의 일상’을 비춘다는 차원에서는 <어제 뭐 먹었어?>와 얼핏 유사하게 보여도, 변호사나 미용사 같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이들의 픽션으로 전개되는 <어제 뭐 먹었어?>와 달리 <우리의 제철은 지금>은 작가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삶’을 바탕으로 전개된다는 첨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우리의 제철은 지금>에 등장하는 이들은 데뷔한지 얼마 되지 않은 ‘만화가/웹툰 작가’나 사회인으로 활동한지 얼마 되지 않은 20-30대의 여성이다. 개인의 차원으로 보았을 때도 상대적으로 불안정성이 높은 것은 물론, 게이와 비슷하거나 때로는 그 이상으로 사회적 편견이 공고한 레즈비언적 정체성을 지니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제철의 지금>에서 드러나는 일상은 자연스럽게 얻어진 일상이 아니라, 작중에서 어렴풋이 묘사되는 ‘일상적인 저항 또는 맞섬’으로 얻어낸 삶의 풍경이다.


작가는 자신이 만든 이 풍경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고 다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의 제철은 지금>을 그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섬멍 작가가 그간 그려왔던 <청아와 휘민>과 <타원을 그리는 법>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확연히 강조해서 레즈비언적 정체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일상을 깊게 포착하는 섬멍 작가의 시선이 담긴 스토리텔링 구조에서 주인공들의 삶은 작품의 지속적인 전개와 함께 서서히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가 자연스레 드러나게 된다. 그 속에서 남들에게 쉽게 폄하받지 않고,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서 정체성을 존중받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발견된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의 요리는 결코 흔하지 않은, 어느 순간 삐끗했다면 쉽게 마주하기 어려웠을 소중한 ‘일상’의 요리로 변화하게 된다. 너, 나,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밥을, 그 밥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류승희 만화, <검정마녀 미루> 단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