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인식하고 활동했던 양영희 감독, 4.3을 마주하며
* 2022년 4.3과 친구들 영화전으로 감상하였습니다. 작품은 일본에서는 6월, 한국에서는 올해 중으로 엣나인필름의 배급으로 개봉합니다.
재일동포, 또는 ‘자이니치’나 ‘조선적’이거나 ‘재일코리안’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일본 내 한국인 가정의 2세로 태어난 양영희 감독은 결코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삶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시기 일본에 건너온 부모님은 해방 이후 조총련의 열성적인 활동가로 움직이며, 아버지는 북한에 중요 인사로 초청될 정도였다. 양영희 감독의 세 오빠들은 모두 북송 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이래 정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계속 일본에 오지 못했고, 본래 클래식을 좋아했던 큰 오빠는 원하지 않은 북한 생활에서 계속 우울증 앓다 2009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공교롭게도 아버지도 같은 해 별세하였다.
이번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이 ‘아나키스트라 생각한다’라고 사상적 정체성을 밝히는 양영희 감독은 집안이 넉넉치 않은 상황에서 갈수록 폐쇄적인 방식의 나라가 되어가는 북한을 지지하는 것이, 오빠들을 개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북한에 보낸 것이 무척이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남한보다 북한에 가까울 수 밖에 없던 부모의 일생을, 북한에 살고 있는 자신의 오빠와 친척들이 잘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2005년 <디어 평양>에서 시작해 2011년 <굿바이 평양> (원제 ‘사랑스러운 선화’, 愛しきソナ), 그리고 양영희의 필모그래피에서 유일하다시피한 극영화인 2012년 <가족의 나라>까지 꾸준히 자신의 가족사를 영상으로 기록해나갔다.
작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된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이전의 ‘3부작’과 계속 결을 이어나가는 작품이자, 이전까지 비중있게 다뤄지지 못했던 어머니 ‘강정희’를 초점에 담아내는 영화이자, 양영희 감독이 어머니와 제주 4.3의 연관성을 알게 된 이후 이를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이다. 본래 오사카에 태어나서 쭉 오사카에 살아왔던 것으로 생각했던 어머니의 삶에는 오랜 시간 침묵했던 한 부분이 있었다. 일본 제국의 말기 미군의 공습을 피해 어머니의 부모는 고향은 제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도 자신도 모두 의사인 남자와 약혼까지 맺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 4.3은 제주도를 피가 흐르는 폭력의 공간으로 만들었고, 결국 어머니의 부모님들은 막대한 돈을 밀항업자에게 주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다시 오사카로 보내게 된다.
양영희 감독은 이에 대해 작품 속에서 언급하는 부분에서 ‘어머니가 처음으로 공포어린 표정을 짓는 순간’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밖에 내놓으면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고 덧붙인다. 지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열심히 조총련 활동을 하며 북한에 대한 곧은 지지의 심정을 드러냈었던 감독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살육의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상황은 분명 어머니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이를 경험한 재일동포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 추측된다.
양영희 감독은 그렇게 우연히 알게된 4.3의 이야기를 사건이 발생하고 70년 이상이 지난 상황에서, 일본과 한국의 경계에 놓인 입장에서 이를 이해하고 다시 일본을 비롯한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작품을 구축해나간다. 작품은 처음부터 4.3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이전의 두 다큐에서 드러났던 가족의 상황이 작품을 촬영한 2018년 전후에는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기록한다. 아버지가 2009년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상황에서도 북한의 가족들에 없는 돈을 쪼개 송금을 이어나간다. 오사카에 혼자 사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가는 감독은 어머니를 살갑게 대하면서도, 계속 현실적이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에 의견이 부딪치기도 한다. 그 사이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결혼 상대방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이번 작품에서 프로듀서 역할을 맡는 아라이 카오루(荒井カオル)를 어머니에게 소개한다.
다큐의 전반은 이렇게 현재 시점의 일상을 충실히 기록해나가고 있다. 지난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고 이번 작품 초반부에서 길게 인용되는 살짝은 가벼운 농담 같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결혼 상대는 북한, 남한 사람 모두 좋지만 미국, 일본 사람은 안 된다.”는 말은 그 모습의 같은 집, 같은 식사의 시간에서 일본 이주민 1세대인 어머니, 2세대인 감독 자신, 그리고 일본인인 남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감독과 새로운 남편을 위해 인삼과 마늘을 잔뜩 넣은 삼계탕을 함께 만들고 이를 함께 나눠 먹는 모습은 (이것이 제목에서의 ‘수프’이다.)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미시적인 차원에서라도 화합이 가능할 수 있음을 엿보인다.
잔잔했던 영화는 중반부에 이르러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4.3 당시 경험을 구술기록하기 위해 제주4.3연구소의 사람들이 찾아온 이후 어머니는 서서히 알츠하이머(소위 ‘치매’)를 앓게 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큰 오빠, 더 이상 일본에 올 수 없는 다른 두 오빠를 찾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4.3의 기억은 점차 기억 속에서 지워진다. 그리고 그 시기,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조선적의 입국을 금지하다 문재인 정부 이후 다시 허용되자 2018 4.3 70주기 추도식에 맞춰 입국할 계획을 세우고, 어머니는 70년 만에 한국은 물론 부모의 고향 제주를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사라진 기억은 쉽게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의 4.3을 증언할 수 있는 것은 감독과 남편과 당시 이를 기록했던 연구자, 그리고 영상으로 남은 기록들이다.
오로지 양영희 감독이 남긴 영상의 기록만이 양영희 어머니가 지닌 삶의 풍파를 증명할 수 있다. 이를 인식하고 다시 기록으로 새기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였던 4.3의 남긴 상흔을 찾기 위해 다큐의 후반부는 그 ‘기록들’에 초점을 맞춘다. 4.3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공식적인 역사’에서도 쉽게 규정짓지 못하는 가운데 아무리 어머니가 4.3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더라도 직접적인 상황을 보지 못한 감독 자신과는 거리가 발생한다. (이 거리는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 대다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4.3연구소를 찾은 순간에서 “어머니가 왜 이토록 북한에 애착을 가졌는지 알 것 같다.”며 말을 해도, 북한에 사는 조카에게 제대로 진심으로 편지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은 계속 된다.
작품은 여전히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쉽게 말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상황을 피하지 않으며, 동시에 쉽게 알 수 있다고도 선언하지 않는다. 어려운 것은 어떻게 말해도 어렵고, 4.3에 대한 접근과 기억이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정권에서도 여전히 난맥에 놓인 순간은 여전하다. (심지어는 4.3 평화 영상전 수상작의 감독이 ‘예멘 난민’으로 밝혀지지 수상을 철회하려는 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상황은 결코 단순히 가지 않는다. http://mwtv.kr/archives/news/%EA%B8%B0%ED%9A%8D%EC%B7%A8%EC%9E%AC-%EC%98%88%EB%A9%98%EC%97%90%EC%84%9C-%EC%98%A8-%EB%9E%98%ED%8D%BC%EC%9D%B4%EC%9E%90-%EC%98%81%ED%99%94%EA%B0%90%EB%8F%85%EC%9D%B8-%EC%95%84%ED%8B%B0%EC%8A%A4 )
대신 감독은 이를 ‘기억하겠다’고 선언하며, 피하지 않겠음을 선언한다. 한국과 일본, 다시 북한과 일본의 경계 속에서 살아온 정체성은 단순할 수 없는 지점을 더욱 또렷하게 바라보며 역사의 무게를 인식하게 하는 동시, 꾸준한 기록 작업을 통해 쉽게 지워지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이는 양영희 감독이 지난 세 편의 장편을 통해서 이뤄낸 실천이자, 이번 작품,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하나의 중대한 선언이다. 마치 식사 속에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감독 모녀와 남편의 모습처럼, 단순해 보여도 결코 가볍지 않은 발걸음의 연속인 것이다.
덤. 스페셜 땡스에 최동훈 감독의 제작사 케이퍼필름이나 추천사를 남긴 김의성 배우와 박찬욱 감독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어떤 인연을 맺었을지 궁금하네요.
덤2. 엔딩 크레딧 막판에 이 작품의 제작 지원에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공익재단법인 한창우-테츠문화재단’(韓昌祐・哲文化財団) 로고가 보입니다. https://www.hanchangwoo-tetsu.or.jp 대형 파칭코 체인 ‘마루한’의 경영자이자 재일동포인 한창우가 만든 공익재단이더라고요. 근래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파칭코>외 더불어, 재일동포의 과거와 현재가 생각나는 대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