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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May 02. 2022

2022 JIFF, 이상일 <유랑의 달> 단평.

'금단'을 표현하고 드러내기 위한 단계의 생략, 그리고 아쉬움.

* 프리뷰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실제 상영 버전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작품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의 원작인 나가라 유의 동명 소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말해야만 좀 더 영화에 대해 잘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BL 장르에서 주로 활동했던 나가라 유의 <유랑의 달>은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파장이 결코 작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실제로 범죄를 저지를 마음이 없었다고 하지만 나이차가 상당히 나는 대학생 남성 소아성애자와 가정 학대에 시달리며 자신을 위한 안식처를 찾는 여성 청소년의 기묘한 관계성과 연결을 말하는 작품이니까요.


소설 <유랑의 달>은 출간된 이후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라 유는 최소한 이 쉽지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납득시키기 위해서 장문의 텍스트에 이 둘이 이어질 수 있는 맥락을 만들고자 안간 힘을 다했습니다. 작품의 두 주인공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비껴서있고, 다시 '문제적'으로 취급을 받거나 그럴 위기에 있는 가운데 어떻게 주류 외부에 놓인 이들이 숱한 지탄을 들으면서도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흔적이 역력했죠.


게다가 사실 이런 소재가 <유랑의 달>이 처음이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당장 국가인권위원회의 첫 번째 인권영화 프로젝트였던 <여섯 개의 시선>(2003)에서 정재은이 연출한 <그 남자의 事情>(사정)은 이미 처벌받았지만 계속 신상이 공개되며 따돌림 당하는 성범죄자 남자와, 엄격한 어머니로 인해 오줌을 이불에 쌌다는 이유로 옷을 벗긴 채 알몸으로 소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아이의 이야기였고, 이를 통해 '범죄 이후의 지속적인 처벌과 감시의 문제'를 다뤘으니까요. 물론 이 소재를 지금 다시 반복한다면, 나가라 유가 거쳤던 것처럼 '납득시키기 위한 몇 단계'를 더 추가해야만 했지만, 어찌되었든 이러한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상일이 극화로 만든 <유랑의 달>은 바로 그 '납득시키기 위한 단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분명 이상일은 사회의 변경에 놓인 사람들이 변경 속에서 따돌림 받으면서도 살아가는 방법을 그리는 것에 능한 사람입니다. 초기 작품인 <69>도 그랬고, 이후의 <악인>, <용서받지 못한 자> 리메이크, <분노> 등도 그러한 흐름의 연속이었죠.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인 <훌라걸스>도 변경에서의 생존법을 그리려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랑의 달>의 영화를 이상일이 맡은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로는 <유랑의 달>이 다루는 소재가 이상일이 이전까지 갔던 길과 비슷하지만,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좀 더 세심한 단계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발생하지 않았나 싶어요. 150분이라는 제법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원작에서 주인공들의 관계를 납득시키기 위한 단계는 많이 생략이 되어 있고, 이상일은 대신 이미지와 등장인물 간의 발화로서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기를 시도하지만 도리어 그 결과 관객들은 작중에 등장하는 기묘한 관계를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막다른 길에 처하게 됩니다.


이 절차가 과도하게 생략이 되면서 원작에서도 많은 호불호를 낳았던 둘 사이의 기묘한 연결고리는 정말 확고하게 원작을 지지하거나 이상일 특유의 금단을 넘어서는 묘사에 빠지지 않는한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벽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이 자체 역시, 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연출의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동시에 모든 픽션이 꼭 윤리적인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원작이 이 사회의 금단을 넘어서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텀을 들여 이야기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이 연출은 '편의성'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이 작품이 한창 김기덕 등처럼 강렬한 연출이, 소재나 이미지의 충격적인 이미지와 무게감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했던 1990년대 말 ~ 2000년대 초중반에 나오면 좋았을 법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때를 그리워할 것이고, 이 작품에서도 묘하게 그 당시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거는 결코 쉽게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인 것처럼, 영화 <유랑의 달>이 택한 길은 이제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먼 영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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