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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May 06. 2022

2022 JIFF, 이완민 <사랑의 고고학> 단평.

한 개인의 삶과 그 선택에 대한 느리지만 깊은 접근과 탐구의 기록

이완민의  장편 영화 <누에치던 > 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과 사람, 그리고 공간과 시대와의 연결을 깊게 담아내는 작품입니다. 기시감을 제외하면 아무런 관계도 없어보이는  여성 주인공, 그러나  ‘기시감 쉽게 무시할  있는 공통점이 아니라  주인공을 비롯해  사람이 살아왔던 시대와 공간을 관통하며 어떻게 사람이  명의 독립된 존재로서 살아갈  있는지를 묻는 문제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사랑의 고고학>은 <누에치던 방>의 시도를 한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변용하며, 그가 생각하고 말하는 방식과 그가 지나왔던 시대, 그가 만났던 사람들을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으로 풀어내는 하나의 ‘계보학’적인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작품의 제목대로 고고학을 전공해, 30대가 되어서도 계속 현장에서 고고학 활동를 하는 사람입니다.


일자리는 안정적이지 않아 학교 진로체험 강사를 비롯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고, 땡볕이 내리 쬐는 속에서도 천천히, 느리게 땅을 한꺼풀씩 벗겨내는 고된 작업의 연속이지만 영실은 그 일이 좋습니다. 진로체험을 가르치는 과정에서도 그 일의 어려움을 감추지 않지만 영실은 그만큼 고고학의 느린 호흡이 좋고, 다시 영실 자신도 느린 호흡으로 살아오는 게 익숙한 사람이니까요.


영실은 하나의 유물은 물론 그 유물이 태어나 깃든 시대와 역사를 탐구하는 이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지니는 속성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고학이 실제 인물에 현현한 것처럼 영실은 그 느낌대로 사람을 대하고,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합니다. <사랑의 고고학>은 그렇게 살아온 영실의 삶과 생각을 고고학의 발굴과 연구 작업처럼, 그리고 작중에서 드러나는 영실의 작업처럼 느린 템포로 훑어나가는 영화입니다.


매사가 그렇게 빠르지 못한 영실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그렇게 빠릿하지 못 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을 험담해도, 자기를 자기 좋을대로 대하고, 심지언 이용하더라도 영실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쉽게 놓아두거나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영실이 8년 전에 우연히 만나 한 때 사귀었던 남성 인식(기윤)도 마찬가지로요.


인식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가스라이팅’의 전형, 정말 속되게 말하면 그냥 ‘한남’입니다.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음향 작업을 위해 부근을 찾았다 그곳에서 유물 발굴 작업 중이던 영실을 만난 인식은 처음 본 그 순간 영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영실은 그가 작업한 노래를 듣고 하루도 안 되어 그의 고백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인식은 그야말로 자기 중심적 한국 남자의 전형이죠. 사랑을 고백하고 처음 사귀기 시작할 때는 영원한 사랑을 감미로운 글로 말하던 인식은 차츰 영실에게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영실에게는 중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를 러시아 유학 여부 선택에 있어서도 간접적으로 개입하더니, 급기야 도무지 진위 여부를 알기 어려운 말 한마디에 근거해 영실을 무례하게 몰아 붙입니다.


허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영실은 쉽게 인식에게 화 한 마디 못하고, 도리어 인식과 헤어지고 난 8년 뒤 지금에도 인식과 계속 교류하고 있습니다. 정작 인식은 자신이 했던 말을 쉽게 뒤집는데도 영실은 인식과의 약속을 계속 지키고 있죠. 이 모습은 무척이나 답답한 모습이고, 작중 지도교수가 영실에게 조언하는 모습처럼 뭐라고 큰 소리라도 하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완민 감독은 영실이 좋아하는 ‘고고학’처럼 느리지만 진중한 리듬으로 영실의 삶과 주변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계보학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마치 작중에서 발굴 현장을 찍는 드론이 현장 전체는 비출 수 있어도, 기술의 발전이 현장 파악에 도움을 줄 수 있어도 결국 누군가는 현장을 가야하듯 영화는 이 ‘느려 터진’ 것만 같은 영실이 사실 어떤 인물인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매우 빼곡하게 기록하는 것입니다.


과연 영실은 계속 느리게만 움직이는 사람일까요, 아무리 손해를 입어도 그저 순진하게 참는 사람일까요, 남을 배려하느라 감정 표현 조차 제한하는 사람일까요. 그저 외부나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영화는 현장에서 느리게 흙을 걷어내며 유물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처럼, 푸코가 여러 계보학의 시도를 통해 당연하게 여겼던 것의 관념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상을 보였던 것처럼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영실이 남보다 조금 느리고, 감정 표현을 참을 수 있어도 마냥 느린 것도, 마냥 참는 것도, 마냥 희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영화는 영실의 모습을 롱테이크로 길게 비추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영실의 모습과 자세, 행동을 통해 영실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떠한 사람인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떤 점에서 영화는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춘 ‘질적 필드 트립 노트’인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냥 편안한 일은 아니지만, 작품은 설령 관객이 영실의 선택한 길에 동의하는 것을 떠나 영실이 어떠한 생각 아래 살고 있으며 꾸준히 이를 관철하며 살고 있음을 소리 높지 않아도 묵직하게 드러냅니다.


오히려 영실에게 강도 높게 인식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이 고고학이라는 세계의 어떤 위계 질서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영화는 쉽게 어떤 사이다 같은 자극을 만들기보다는 답답하더라도 서서히 변화가 이뤄지는 과정 그 자체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전작 <누에치던 방>에서 성격도, 행보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모두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무게에 자유롭지 않음을 긴 호흡으로 포착했던 것처럼, 이완민 감독은 이제 한 명의 여성 인물이 개인이 살고 싶은 길대로 어떻게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것이 이뤄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기반한 디테일의 설득력을 만들기 위해 영실을 감싸는 고고학의 세계를 최대한 이미지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도 재현하며 ‘실제 존재하는 하나의 계(界)’를 영화에 삽입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그 ‘계’의 존재를 서서히 주인공을 감싸며, 때로는 심리와 행동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실체화된 구조임을 입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에치던 방>이 역사/공간과 연결된 개인/들의 삶을 말했다면, <사랑의 고고학>은 그 개인이 형성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결코 마냥 통쾌하지도, 내 맘대로 흐르지도 않지만 영화의 주인공 ‘영실’은 그렇게 부자유의 속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공간을 긴 러닝타임 동안 구축해 나갑니다. 그 안에서 실제 영화의 모티브가 된 한국 사회도, 그 안의 여/남도 다시 관객이 ‘관찰하여 접근할 수’ 있게 재조직됩니다.


그렇게 영화는 정말 제목처럼, 하나의 연구를 수행하며 결말에서는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영화를 본 각자가 자신만의 주석과 주해를 덧붙일 수 있는 여백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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