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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May 05. 2022

아나이스 타라세나 <스파이의 침묵> 단평.

어두운 폭력과 독재의 역사를 기록의 복원으로 아카이빙을 실천하다

대다수 남미 국가가 그렇듯, 과테말라도 폭압과 독재의 아픈 경험을 지닌 국가입니다. 그리고  독재에는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의도적인 방조나 직간접적인 지원이 있었죠.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부당하게 쫓겨나야 했습니다. 권위적 폭력의 통치에 많은 이들이 숨을 죽였지만 모두가 잠자코 있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감수하고 투쟁을 하거나, 게릴라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스파이가 되면서 반정부 활동을 이어나갔죠.


다큐 <스파이의 침묵>이 다루는 대상인 ‘엘리아스 바라오나라’는 기자 출신으로 도심 게릴라에 참여해, 1970년대 후반 독재 정권의 스파이로 4년간 활동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것도 과테말라 독재 정권에서 각종 탄압과 폭력, 살해, 미화를 담당했던 내무부에서 말이죠. 비록 그곳에 있으면서 독재 정권의 부정을 정당한 것으로 계속 포장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내무부에서 일하며 입수한 정보를 게릴라 동료에게 전달하는 스파이 활동에 충실했으며, 억울히 죽음을 당할 뻔 한 이들을 구해내고, 4년 간의 잠입 생활을 끝내고서는 망명을 떠나 과테말라 독재 정권의 실체를 폭로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아무리 건조하게 서술해도 무척이나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쉽지 않은 임무를 해낸, 마치 ‘영웅같은 인물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일종의 ‘민주화 투사 다루는 작품이기에 영화는 그의 삶과 공로에 집중하지만, 동시에  지점에만 몰두하지는 않습니다. 과테말라 독재 정권은 범죄 조직을 이용해 납치와 살해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을 처리했고,  상흔은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중 증언자  명이 언제 납치나 살해당할지 몰라  외부 구석구석에 감시 장치를  것은  위협이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독재를 자행하고 시민을 학살한 고위층은 이미 체포되거나 해외 도피를 떠났지만, 완벽하게 과테말라가 민주화를 완결지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진행형’의 상황에서 다큐는 엘라이스의 삶을 중심으로, 그가 스파이로 활동했던 시기의 과테말라의 상을 각종 증언과 어렵게 구한 기록으로 복원해가는 작업의 과정과도 같습니다.


너무나도 기록 통제에 철저한 독재 정부였기에 작중에 등장하는 아키비스트가 “1910-20년대 정부 영상은 남아있는데 1970-80년대 정부 영상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남은 기록은 너무나도 제한적입니다. 정부가 저지른 더러운 일을 증명할 방법은 구석에 처박혀 운좋게도 기록 폐기에서 살아난 약간의 흔적, 그리고 엘라이스를 비롯해 폭력의 시대에서 생존한 이들이 남긴 기록과 구술 증언입니다.


그 기록을 끼워 맞추는 과정을 통해 과테말라를 비롯해 남미 정부가 반공을 명목으로 자행한 폭력 독재, 미국 정부의 협조가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이 가공할 폭력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 당시에도 비밀리에 진행되고 지금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반정부 투쟁의 기록이 선명해집니다. 이러한 작업은 과테말라 뿐만 아니라 칠레, 아르헨티나 등처럼 어두운 독재의 기억이 있는 국가에서 계속 되어온 실천적 아카이빙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속되는 프로그래밍 경향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좀 더 이러한 기록들을 함께 묶어 이야기할 세부 프로그램이나 연속 기획이 많지 않은게 아쉬울 따름이죠.)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지는 않아도, 묵묵하게 기록을 이어 하나의 상을 만들어나가는 작품의 모습은 누군가가 잊기를 요구하고 지우기를 시도한 시대의 기억을 어떻게 다시 복원할 수 있으며, 다시 어떻게 그 복원한 기록을 마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걸어왔던 하나의 축과도 이어지기도 하죠. 어떤 이들은 근래 들어 <다이빙벨>이나 <그날, 바다>, 아니면 <당신이 조국> 같은 작품으로 매우 성기고 조악한 방식으로 기억을 억지로 재조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나 <나쁜 나라>, <낮은 목소리> 등의 작업을 통해서 한국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지우고 없애기를 바라마다 않는 기억을 차근차근히 모으고, 담아내고, 이어내며 조금씩 상을 만듭니다.


그것은 아카이빙의 중요성과도 이어지지만, 동시에 어떤 아카이빙을 할 것인지를 묻는, 그 아카이빙을 통해 어떤 실천으로 향할지를 고민하는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스파이의 침묵>은 2020년대 현재 다양한 국가들에서 아카이빙과 그 실천을 모색하는 하나의 움직임이자, 다시 아카이빙을 고민하는 이들로 하여금 추동을 독려하는 작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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