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인적으로 뽑은 중요한 포인트가 담긴 작품들.
한동안 SNS나 브런치를 통해서 영화나 만화에 대한 개인적인 리스트인 '눈여겨볼 영화/만화들'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또 몇 년간은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귀찮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도무지 뭔가를 정리할 틈이 나지 않았어요. 그나마 만화는 2019년부터 활동하는 단체인 '합정만화연구학회'를 통해서 함께 '합정만화상'이라는 이름으로 한 해를 결산하는 리스트를 만들었지만, 영화는 짧게 내놓는 '단평', 또는 고료를 받고 쓰는 글이 아니면 정돈된 무언가를 도저히 쓰지 못했었네요. 이래저래 2018년 이후 한 4년 만에 '눈여겨볼' 시리즈를 재개해봅니다. 마냥 '명작'이라 부르기에는 어려운 작품도 섞여 있지만, 정말 이름대로 '눈여겨볼' 지점이 있는 작품을 뽑는, 연말을 마무리하는 나만의 글. 영화편입니다.
* 만화편은 https://brunch.co.kr/@skyjet/142 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김동원, <2차 송환>
<송환> 이후 20년.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수평적 정권 교체와 남북정상회담, 그 전후로 이뤄진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은 긴 분단을 끊어낼 것 같은 자신감을 낳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지금 보는 그대로다. 오히려 남북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가하고, 젊은 이들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김동원은 이러한 아쉬운 상황에 몇몇 동년배들처럼 푸념을 붙이는 대신, 이 상황 자체와 그 상황에 놓이 이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감독 자신의 상념을 지긋하게 보여준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작품은 평화를 위해 어떤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게 되었다.
김세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참으로 볼썽사나운 말 중에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애시당초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다못해 오래산 가족도 반목을 하기 쉬운 마당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오랜 시간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함께 살아온 두 여성이, 어떻게 각자를 한 명의 여성으로서 인식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였다. 단편 <컨테이너> 등에서 얼핏 보기엔 단순해 보이는 설정, 그러나 실제로는 깊은 숙고가 느껴지는 서사와 캐릭터의 구성을 보인 김세인은 첫 장편에서도 자신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아사 마사아키, <견왕 : 이누오>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자신이 세운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SARU’를 통해서 다른 작품의 프로듀싱에도 수완을 보인 유아사 마사아키는 <견왕>을 통해서 좀 더 과감한 실험을 선보인다.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는 않은) 자신이 직접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SARU를 통해서 제작된 <겐지모노가타리>의 연장선에 놓인 <견왕>은 혼돈이 넘치고, 다시 말해 새로운 가능성도 펼칠 수 있는 무로마치 시대를 무대로 ‘사루가쿠’를 선보이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뮤지컬 영화의 스타일처럼 선보인다. 서사에 대한 설명은 줄이고, 유아사가 구현한 무로마치 시대의 상을 파워풀한 노래와 장면 연출로 드러내는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보일 수 있는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내는 것에 성공했다.
김정은, <경아의 딸>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이를 말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중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로 인한 한 여성의 피해, 그리고 그 피해를 함께 연대하면서 이겨내는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단편 <야간근무>에서 여성들 간의 관계와 연대의 가능성에 초점을 기울이던 김정은은 전작 단편들 보다 더욱 다루기 쉽지 않은, 섬세하게 접근해야만 하는 주제에 대해서 영화적인 문법에 맞게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뻔한 클리셰의 반복 없이 드러내는 것에 성공했다. 앞서 언급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와 더불어, 가족 내, 친족 간 여성이 어떻게 '여성'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면이 있다.
정재은, <고양이들의 아파트>
<말하는 건축가>를 시작으로 정재은은 어느 순간 꾸준히 건축과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그려왔다. 그의 가장 최신작인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정재은 자신의 최근 작품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전작들에서 조금씩 드러났던 '공간에 사는 이들'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구성이 돋보인다. 마치 감독 자신의 데뷔자인 <고양이를 부탁해>를 연상케 하는 제목은, 구성에 있어서도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드러났듯 사회에서 쉽게 밀려나기 쉬운 존재들에 대한 시선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쉽게 기존의 공간을 없애고, 고양이를 비롯해 그곳에 살던 이들도- 기억도 지우는 흐름에서 감독은 카메라를 들어 그 공간과 움직임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반대에 동참하였다.
티무 니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제목에서 어떤 영화에서 쉬이 감을 잡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설마하니 <타이타닉>에 대한 씨네필적 취향이라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제법 궁금증을 자아내는 제목 이상으로 깊고 섬세하다. 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인의 삶과 시선, 그리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아도 영화를 말할 수 있고, 다른 이와 깊은 감정을 나눌 수도 있다.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장애를 상대화하여 보는 시선, 그리고 장애를 가진 이를 배려하지 않는 이 사회이다. 아키 카우리마스키와 더불어, 핀란드 영화의 세계를 잘 알려줄 작품이 될 것이다.
마리아 슈라더, <그녀가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결과적으로는 대형 특종이 되어 세상을 바꾼 기자들을 다루는 작품들은 이미 무척이나 많이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말했다>는 그러한 작품에 속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도를 보이는 작품이다. 미투 운동의 확산에 큰 기폭제가 된, 미국 할리우드의 거물인 하비 와인스틴의 장기간의 성폭력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두 기자를 다루는 영화는 작품이 바탕으로 한 두 기자의 동명 에세이를 매우 충실하게 다뤄낸다.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사건에서 취재원에게 다가가는 방법, 이 보도가 그저 가십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취재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공력을 말하는 작품은 취재 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특히 성폭력과 같이 생존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취재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넷플릭스 오리지널)
본래라면 <판의 미로>의 바로 다음 프로젝트가 될 작품이었다는 <피노키오>가 거의 10년 이상의 간격을 거쳐 돌아왔다. 감독 본인이 <악마의 등뼈>와 <피노키오>에 하나의 3부작이 될 작품이라 공언한 것과 같이, <피노키오>는 델 토로 특유의 환상과 기괴함이 넘치는 연출과 시선으로 이제는 고전 동화가 된 <피노키오>를 새롭게 재해석했다. (재미있게도, 이 재해석이 원작의 분위기와 제일 맞닿아 있다.) 내용 자체는 대다수의 관객에게는 익숙할지라도, 원작에 담긴 캐릭터의 특성과 행보를 뚜렷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피노키오>를 단순한 동화가 작품이 쓰여진 당대의 맥락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게끔 만들었다. 델 토로가 공을 들이는 CG의 적재적소 활용도 이러한 몰입을 돋구어 내었다.
라이언 존슨,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넷플릭스 오리지널)
<블룸 형제 사기단>이나 <루퍼>에서 흥미로우나 한 끝 아쉬웠고,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에서는 조금씩 정체에 놓여 있던 스타워즈 시리즈를 새롭게 일신하려는 노력에도 무수한 팬보이의 린치를 바았던 라이언 존슨은 <나이브스 아웃>에서 드디어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이었다. 요새는 도무지 찾기 어려운 고전적인 추리물의 정석을 따를 듯 하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펀치는 계속 구조에 짓눌려 있던 이가 날리게 만든다. 후속작 <글래스 어니언>은 'IT 스타트업'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었어도 전편의 구조는 조금의 변주를 거쳐 계속 된다. 추리의 흥미로움과 더불어, 추리가 일어나는 장에 있는 온갖 위선과 풍자와 비꼼을 보는 재미가 충분한다. 특히 일론 머스크와 마크 주커버그를 비롯한 무수한 'IT/스타트업 구루'를 패러디하는 에드워드 노튼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단하다.
최정문, <내가 누워 있을 때> (미개봉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을 것이 분명한 최정문의 작품은 윌리엄 포크너의 어딘가 축축 젖어 착 가라 앉은 고딕의 분위기를 현대 한국으로 가져와 재현한다.포크너의 고딕 소설이 '남북 전쟁 이후, 미국 남부'라는 시대와 공간의 황량함을 주된 대상으로 삼는다면, 최정문은 여성이 계속 압박받으며 지속적으로 누군가에 위협을 받는 시대의 초상을 자신만의 고딕적인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한 구성은 영화제 상영후 몇몇 혹평들처럼 영화의 접근에 대한 문턱이 될 수 있어도, 한국적인 고딕을 구현했다는 점은 무척이나 주목할 모습이다.
조던 필, <놉>
본래 코미디언으로 활동해 <겟 아웃>에서 성공적인 영화 감독으로의 전환을 알린 조던 필은 <어스>, 그리고 <놉>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공포 영화를 시도한다. 한편으로 조던 필은 마치 '좀비'의 창시자, 좀비를 통해 1960년대 미국 사회를 풍자한 조지 A. 로메로와 비슷하게, 매번 만드는 작품마다 미국 사회에 뚜렷하게 기초한 접근을 시도한다. <놉> 역시도 이러한 노선에 놓여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에 맞서는 것은 그럴듯한 누군가가 아니라, 변방에 살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에 영화를 처음 고안한 이 중 한 명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말 타는 남성의 활동 사진'의 주인공이 알고보니 흑인이었다는 과감한 주장에서 펼쳐 나오는 '영화에 대한 헌정'이 겹쳐지며, 더욱 복합적인 컨텍스트를 지닌 작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혁래, 김정영, <미싱타는 여자들>
조금이라도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전태일이 청계 피복 공장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자신의 몸에 스스로 불을 살라가며 저항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와 마음으로 함께하며 꾸준히 싸워온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미싱 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 여성 노동자를 다루는 작품이다. 그것도 과거의 역사를 다루는 것을 넘어, 지금 현재 어떤 삶을 보내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그녀들은 늙었고, 이전처럼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노인이 된 현재도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는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그렇게 노동 운동의 과거의 현재를 모두 바라보고, 다뤄내었다.
박문칠, <보드랍게>
2015년 위안부 합의 이후, 조금이라도 뉴스를 봤다면 ‘위안부’ 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업을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의 이야기를 1945년 이전으로 가두는 것은 얼마나 유의미한 접근일까. 이미 <마이 플레이스>나 <파란나비효과>에서 자신, 또는 치열하게 싸우는 현장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기록했던 박문칠은 <보드랍게>를 통해서 위안부 문제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비춰내었다. 이미 위안부 문제가 해방 이후 현재까지 받아들이는 시선의 문제로도 이어짐은 여러 저서나 학계를 통해서 지적되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었다. 박문칠은 이러한 이전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표면적인 폭력의 주체는 사라졌어도 계속 폭력의 후과가 이어지는 상황을 또렷하게 비춰낸다. 그렇게 위안부의 문제는 이미 끝나 사라진 문제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로서 계속 주시해야 할 문제가 된다.
이완민, <사랑의 고고학> (미개봉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누에치던 방>에서 느린, 그러나 지긋하게 두 여성이 걸쳐온 삶의 궤적을 바라봤던 이완민은 신작 <사랑의 고고학>에서도 다시 한 번 비슷한 실험을 감행한다. 주인공은 이제 한 명이지만, 주인공의 직업이자 제목인 ‘고고학’처럼 한 여성의 삶을 호미로 섬세하게 발굴하는 것처럼 접근하는 것이다. 누군가 보기에 매우 답답해보이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 감독은 이런 주인공을 쉽게 보호하는 시퀀스를 넣는 대신, 최대한 길고 충실하게 주인공의 삶을 담아내며 ‘이런 삶’도 있음을, 그리고 이런 삶 역시도 하나의 중요한 선택으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한다.
오세연, <성덕>
내가 열렬하게 좋아했던 사람이 알고보면 범죄자라면, 그것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오세연 감독이 본인을 스스로 담아낸 <성덕>은 이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슈퍼스타 K>에 나온 정준영의 모습에 10대 시절 팬이 된 오세연은 소위 ‘버닝썬 게이트’를 통해서 알려지게 된 정준영의 성범죄에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감독은 여러 분야에 걸친 스타와 팬/덤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지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양영희, <수프와 이데올로기>
<디어 평양>부터 가장 최근에 만든 작품이었던 <가족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양영희 감독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 중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경계인’이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직시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간의 작품에서 한 번도 포커스에 오르지 못했던 감독 자신의 어머니를 다루는 작품이다. 감독의 어머니를 살피는 과정에서 감독도 몰랐던 한국 현대사와 어머니 사이 ‘4.3’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감독은 후반부를 이 사건에 대한 집중으로 편성하며, 쉽게 풀릴 일 없는 동아시아의 현대사에서 ‘경계’를 인식하고 뚜렷하게 바라볼 것을 선언한다.
마츠모토 소우시, <썸머 필름을 타고!>
어떤 점에서는 일본 영화에서 꽤나 자주 등장했던 ‘청춘 하이틴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보이는 영화’라는 속성을 고려해도, 이러한 부류의 작품은 참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미 굳어진 장르 클리셰를 애써 피하지 않고 가끔씩은 그 흐름 위에 타면서도, 결국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작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가져가는 것에 성공했다. 그저 청량감 넘치는 ‘청춘’에 작품을 가두지 않는, 실제 청소년들의 삶에서 갑자기 엄습하는 정체 불명의 순간을 형상화한 SF의 조합은 <썸머 필름을 타고!>를 쉽게 잊지 못할 인상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내었다.
박소현, 이솜이, 강유가람, 소람, <애프터 미투>
‘페미니즘 리부트’가 제기된지도 어느 덧 5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모든 사회 운동과 흐름이 그렇듯, 한동안 빠른 주파수로 쏟아져 나왔던 목소리도 조금은 잦아든 모습이다. 그러니 이제 이 ‘리부트’ 자체도 꺼져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최근 여러 장단편 작업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왔던 네 명의 감독들은 함께 뭉쳐 만든 이 옴니버스 다큐를 통해서 ‘미투 운동’으로 상징되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순간, 그리고 필요한 행보와 시선이 무엇인지를 보인다. 작품들 사이에 조금은 편차가 있어도, 시의적인 작품을 적시에 만들어냈던 네 감독들 답게 작품들에는 쉽게 외면할 수 없는 결기들이 담겨 있다. 그렇게 작품은 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현재지를, 그리고 앞으로 뻗어나갈 장소를 비춰낸다.
장윤미,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 (단편)
장윤미의 작업은 추상과 미시적인 상세함을 오가면서 자신만의 서사와 연출을 만들어낸다. <어떤 곳을 중심으로 하여 가까운 곳>은 그러한 장윤미 감독의 특성이 빛을 발한 최근의 단편 작업이다. ‘근방’의 사전적 정의를 제목으로 삼은 작품은 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그러나 감독에게 있어서는 쉽게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흔적을 때로는 디지털을 통해서, 때로는 직접적인 현장 방문을 통해서 추적해나간다. 물론 누구도 쉽게 주목하지 않았던 존재기에 소득은 크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감독은 ‘기록’이 중심에 서는 다큐멘터리의 기본적인 속성을 살려내며, 끝내 자신이 고민했던 바를 살려내었다.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한국에서도 화제였던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주목받았던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아시아계 배우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메인으로 활약하는 것에 열광했던 점도 분명 크리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샹치…> 보다 더욱 농축되어 아시아계 할리우드 배우를 중심으로, 놀라운 SF적 상상력을 겸비하여 가족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시도이다. <007 : 골든아이> 이후 할리우드에서 꾸준히 여성 액션배우로 쓰였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에는 허락받지 못했던 양자경을 비롯해, 아시아계 배우를 위한 시도이자 여성을 SF를 통해 주체를 비춰내는 것에 모두 성공한 쉽지 않은 성과를 거둬내었다.
신수원, <오마주>
솔직히 말하여 신수원의 최근 행보에는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레인보우>나 <명왕성>에서 드러났던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다뤄내는 감독의 장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설익고 정돈되지 못한 연출과 흐름이 넘쳐났다. <오마주>는 감독이 최대한 자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2010년대 초반에 수행했던 한국 영화사 속 ‘홍은원’이라는 초기 여성 감독의 존재를 추적했던 경험을 살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여성 영화인에 대한 소고를 담아낸 것이다. 어느덧 ‘중견’ 영화인이 되었지만 미묘한 위치에 있는 작중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여판사> 등의 작품을 연출한 홍은원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흐름을 조금은 환상적인 터치로 담아낸 작품은 신수원이 그간의 부진에서 탈출한 하나의 신호탄이자- ‘영화계에서 여성이 놓인 위치’를 고민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동령, 박경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김동령과 박경태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기지촌 여성’을 다큐멘터리로 다뤄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기록’에 충실하면서도 ‘기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거미의 땅>에서부터는 좀 더 과감하게, 자신이 오랜 시간 라포를 형성해온 이들의 삶을 좀 더 적절하게 드러내고 하나의 ‘영상’으로 담아낼 방법론을 고민하고자 하는 시도가 느껴진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그러한 시도의 좀 더 진보한 결과물이자, 하나의 진혼이자 위로이다. 성우 김상현의 내레이션을 통해 마치 재해석된 판소리 같은 생각도 드는 작품의 흐름은, 두 감독이 바치는 이 의정부 뺏벌 기지촌에 살았거나, 죽었거나, 거쳐갔거나, 여전히 존재하는 여성들을 위한 하나의 헌사이자 더욱 명징한 기록이 되었다.
이수정, <재춘언니>
비록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콜트/콜텍 투쟁은 한국의 노동운동사에 있어 하나의 중대한 획을 그은 사건과도 같은 ‘장기 투쟁’이었다. 무수한 시간 동안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부당해고 노동자들, 그들과 연대하기로 결정한 전통적인 노동운동 활동가와 더불어 무수한 문화예술인의 결합. <시 읽는 시간>에서 자신만이 보일 수 있는 ‘사회 소수자’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를 보여준 이수정은 <재춘언니>를 통해 콜트/콜텍의 노동자였던 임재춘의 이야기를 최대한 진솔하게 담아내고자 시도하였다. 그렇게 <재춘언니>를 통해 임재춘은 치열하게 투쟁하는 노동자이자, 때로는 번민하고, 때로는 예술과 함께 자신의 지친 마음을 위로받는 ‘한 명의 노동자 인간’으로서 비춰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30일 별세한 故 임재춘의 명복을 함께 기원한다.
윤서진, <초록밤>
밤은 결코 낮과 같지 않다. 태양의 따가운 햇살이 비추는 낮과 달리, 밤은 인공적인 광원을 제외하면 빛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환경에서 사람들 역시 낮과 다른 심리와 행보를 밤에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무수한 작품들이 ‘밤’이 낳는 기묘한 분위기에 주목을 기울였고, 윤서진의 <초록밤> 역시 밤이 낳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아슬아슬하게 붕괴를 하기 직전의 가족을 말하는 작품은 꽤 있었지만, 제목대로 ‘짙은 초록색’으로 밤을 구성한 풍경은 더더욱 가족 구성원의 불안함과 이들을 끝내 무너지게 하는 상황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그렇게 작품은 이미지가 낳는 중요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작품이 되었다.
에리크 그라벨, <풀타임>
최근 전국장애인철폐연대의 장애인 이동권을 위한 지하철 출근 투쟁을 비롯해, 파업이 벌어지면 으레 나오는 말 중 하나가 ‘시민들의 불편함을 주니 자제해라’는 이야기이다. 분명 실제 물적 공간을 점거하는 파업은 불편함을 준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처음부터 분쇄해야만 하는가? 에리크 그라벨의 <풀타임>은 파업이 낳는 양면의 효과를 스릴러적인 어법으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먼 출근길과 까다로운 서비스업의 강도를 감수해야 하는 주인공의 삶은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재의 구조에서 착취당하지만, 착취에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으로 다시 힘든 상황에 놓인 주인공의 역설적인 처지는 파업을 부정하는 도구로 쓰이는 대신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보이는 중요한 영화적 요소가 되었다.
이마이시 히로유키, <프로메어>
가이낙스 시절 만들어 낸 <천원돌파 그렌라간>을 비롯해 <킬라킬>, 그리고 최근작 <사이버펑크 : 엣지러너>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트리거’의 작품은 폭발적인 열기, 그 열기에 걸맞는 역동적이며 원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로 가득하다. 한국에는 꽤나 뒤늦게 소개되는 <프로메어>는 트리거의 작품 전통을 충실하게 잇는 작품이다. 주인공들은 무수한 차별과 불합리에서 열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그러한 반격의 모습은 빠른 리듬의 작화가 되어 스크린을 장식한다. 여러모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2020년대 현재 놓인 새로운 전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박찬욱, <헤어질 결심>
이미 <헤어질 결심>에는 무수한 이들의 뺴곡한 상찬이 있었고, 필자 역시 브런치를 통해서 단평을 남겼기에 크게 말을 붙이지는 않으려한다. 다만 이 작품에 중요하게 봐야할 지점은, 오랫동안 도구처럼 쓰인 ‘팜므파탈’이라는 요소를 따라가는 듯 하면서 스스로 깨부수는 선택에 있다고 본다. 장르적 요소를 쉽게 넘어가는 것이 아닌, 그 뒤에 숨겨진 모습들을 비춰내며 디테일을 만들어 스스로 틀을 깨는 영화의 선택은 앞으로의 영화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과 변화가 가능한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단초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