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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Jan 07. 2023

이노우에 다케히코 연출 <더 퍼스트 슬램덩크> 단평.

유명한 장면을 모두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모두를 위한 선물.

*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한국어 더빙판으로 관람하였습니다.




1990년대를 정면으로 거친 한국인 중에서 <슬램덩크>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작품은 일본 작품이어도, 작품 자체의 질이나 여러 시대적 상황과 얽매이며 작품은 1996년 완결을 맞이한 이후 25년 이상 지난 지금도 회자가 됩니다. 도서출판 대원(현, 대원씨아이)의 만화잡지 <주간 소년 챔프>(현 코믹 챔프)에 연재되며 경쟁사 서울문화사 <아이큐 점프>의 <드래곤볼>과 자웅을 겨루었고 (정작 일본에서는 같은 슈에이샤 <주간 소년 점프> 였지만요.) 챔프영상과 이후 SBS를 통해 소개된 TV 애니메이션, 그리고 ‘농구대잔치’나 KBL 출범을 비롯해 점차 뜨겁게 달아오르던 농구의 열기… 국적은 달라도, 이래저래 <슬램덩크>는 하나의 작품으로서만 말하기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슬랭덩크>의 애니메이션이 원작과 더불어 인기를 얻은 것과 별개로 평가가 참 미묘한 작품이었습니다. 만화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되었는데, 애니메이션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되었어요. 애니메이션의 분량이 연재분을 따라잡아 틈만나면 지긋지긋한 회상씬을 반복해 악명높았던 <드래곤볼 Z>까지는 아니더라도, <슬램덩크>의 애니메이션 버젼도 어떻게든 연재분을 따라잡지 않기 위해 후반부에서는 계속 서사나 연출이 지리해졌죠. 연출적인 면에서도 후반부에서는 확실히 힘이 떨어지는게 보였고, 결정적으로 만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종지부를 장식하는 ‘산왕공고전’은 다루지도 못했습니다. 이래저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시기에 같이 제작되는 것’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습이 되고 말았어요.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 본인도 애니메이션 버젼을 그다지 마뜩치 않아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슬램덩크>가 끝난 이후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웹으로 공개했던 SF 농구 단편 <버저 비터>를 공개하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를 그리는 액션 시대극 <배가본드>, 그리고 장애인 농구 만화 <리얼>을 매우 느긋한 페이스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마지막 승부>를 빼면 이렇다 할 인기를 끈 농구 관련 창작물이 나오지 못한 것도 있어서…) 계속 회자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상대적으로 ‘추억의 명작’ 수준으로 그치는 느낌이었죠. 농구 프로 리그도 일본은 2015년에서 겨우 출범하며 인기가 시너지를 이루지도 못했고요.



그렇게 조금씩 묻히던 <슬램덩크>가 2021년 갑자기 뜬금없이 하나의 소식이 들리게 됩니다. 2022년 연말 3D로 제작한 새 애니메이션을 공개하고, 이노우에 다케히코 본인이 연출과 각본까지 맡겠다는 이야기였죠. (또한 공개적인 언급은 없지만 제작위원회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자신이 그린 작품의 저작권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회사 I.T. Planning이 포함되어 있기에 이 작품의 ‘제작/프로듀서’까지 맡았다 봐도 과언은 아닙니다.) <슬램덩크>의 팬들은 오래간만에 <슬램덩크>가 등장하는 것에 환호했지만, 불안감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딱히 애니메이션 연출을 한 적이 그리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3D로 작품은 만든다는 이야기도 어딘가 이질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을 주었습니다. 개봉 몇 달 전에 터진 ‘이번 작품의 성우는 이전 TV 애니메이션판의 성우와 달리 모두 교체한다’는 정보도 올드 팬에게 큰 비난을 낳고 말았고요. (한국어 더빙판도 강백호 역의 강수진을 빼면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불안과 기대감을 동시에 낳은, 원작자가 직접 관여한 <슬램덩크>의 새 애니메이션은 과연 어떨까요? 일단은 먼저 기술적인 부문을 언급해야 할 듯 합니다. 이미 예고편 등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화제가 되었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셀 셰이딩은 그야말로 최정상급입니다. <Re:사이보그 009>, <공각기동대 SAC> 등등의 작품이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구현하려 했던- ‘제작비를 절감하며 더욱 다양한 앵글을 만들 수 있는 3D와 이미 다수의 시청자에게 익숙한 2D의 매트한 질감의 조합‘을 드디어 이뤄낸 수준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은 좋은 점도 일일이 프레임을 손으로 그려야 하는 2D와 달리 쉽게 60프레임 이상을 구현이 가능해 부드러운 화면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에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부드러움’이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프레임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특히 태생적으로 제작비 절감 등을 위해 일본 애니메이션 절대대수가 택한 ‘리미티드 프레임 애니메이션’과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텍스처나 프레임의 일부 경계면을 2D처럼 보이게 처리하는 셀 셰이딩은 계속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허투루 사용하면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초래합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를 ‘텍스처와 프레임의 적절한 변동’으로 해결합니다. 배경은 최대한 고정적인 느낌의 매트 페인팅으로 처리해 작업량을 줄이는 대신, 등장인물을 비롯한 주요하게 움직이는 대상은 매 시퀀스마다 동세나 명암에 어울리는 텍스처를 계속 새롭게 입혀냅니다. 동시에 카메라의 원근에 따라, 시퀀스의 긴장감 등 중요성에 따라 프레임의 속도가 가변적으로 조절됩니다. 2D보단 상대적으로 작업량은 줄어도, 또 다른 만만치 않은 작업량과 적절한 연출적 선택이 필요한 기술적 시도인데, 이노우에는 이게 첫 장편 애니메이션 연출이라는게 믿기지 않게도 매우 능수능란하게 이를 해냅니다. 물론 이 작품의 실제 애니메이션 연출을 맡은 ‘단델라이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이전에도 <셀렉션 프로젝트> 같이 유려하게 셀 셰이딩을 구현한 작품을 만든 곳이라는 걸 고려해야 겠죠.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3D로 2D를 구현한 (심지어 어떤 시퀀스에서는 실사까지 부분적으로 컴포지팅한) 이 결과물은 정말 흠 잡을 부분 찾기 어려운 유려함을 자랑합니다.


음악/음향의 선택도 좋습니다. BAAD, 오구로 마키, WANDS, ZARD(사카이 이즈미) 등 1990년대를 풍미한 Being 계열의 팝 사운드를 주로 사용하던 TV 애니메이션과 달리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생각 이상으로 ‘노래’를 자제합니다. 록밴드 10-FEET의 주제곡 <제0감>(第ゼロ感)과 이를 변주한 사운드를 활용하긴 해도, 다수의 시퀀스는 실제 농구 경기 장면처럼 선수가 움직이고 공을 튀기는 현장음, 인물들의 대사와 숨소리만으로 구성을 해요. 그 사이에서 중요한 흐름의 전환과 힘을 준 시퀀스가 <제0감>과 같은 록 사운드 기반의 배경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원작과 사뭇 달라도, 이노우에의 선택은 이 작품을 어떻게 완급을 조절하며 전달하고 싶은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캐릭터나 서사의 전달은 어떨까요? 사실 어떤 점에서는 작품의 중요 서사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슬램덩크>를 정말 좋아한다면 마무리를 장식하는 산왕공고전을 안 봤을리도 없고, 유명한 명장면들도(“영감님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죠?”, 시합 후 강백호와 서태웅의 강렬한 손뼉 등.) 나왔으니까요. <슬램덩크>를 보지 않았거나, 가장 인기가 있던 1990년대 이후의 사람들에겐 처음 보는 모습 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낡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개봉 이전부터, 그리고 일본 개봉 직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송태섭’(미야기 료타)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위에서는 언급안했지만 이노우에는 <슬램덩크> 완결 이후 단행본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송태섭과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아야코)의 과거 인연을 그린 단편 <피어스>를 발표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몇몇 이야기(송태섭의 죽은 형, 송태섭이 어렸을 적 살던 마을과 형과의 비밀의 장소)는 이에서 참고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송태섭을 중심에 놓아도, 송태섭만을 위해 이야기를 풀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는 ‘송태섭의 이야기를 주로 풀어내되, 북산-산왕공고전에 얽힌 인물들에 최대한 포커스가 맞춰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재구축하는 것입니다.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산왕공고전의 모습 사이사이에 플래시백으로 송태섭, 그리고 다른 등장인물들의(심지어는 라이벌인 산왕공고의 정우성까지도!) 이야기를 시합의 흐름이 전환되는 타이밍마다 삽입하며 이야기를 이중으로 구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작품의 투찹일 강백호(사쿠라기 하나미치)-서태웅(루카와 카에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비중을 줄입니다.


이노우에는 왜 자신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강백호와 서태웅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선택을 한 것일까요. 이는 이노우에 본인만이 알겠지만 그 결과는 무척이나 명확합니다. 작중의 무대인 ‘북산고-산왕공고전’은 한국에서도 열기가 높을 수 밖에 없는 전국대회지만, 상대적으로 클럽 활동이 더욱 활발한 일본에서는 ‘인터하이’로 불리며 많은 화제와 주목을 받는 전국대회의 2차전이 무대죠. 작중 누구나 인정하는 전통의 강자인 산왕공고를 비롯해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는 북산 모두 최종목표 우승을 위해 한판을 혼신을 다해 겨루는 사투를 보이는 것이 작중의 이 경기였습니다.


이노우에는 자신이 직접 이 경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며, 그 치열한 명경기는 단지 두 명의 주인공만이 아니라 주인공 팀의 모든 구성원들, 강백호의 사랑 채소연(아카기 하루코)을 비롯해 농구부를 응원하기 위해 모여든 북산고 학생들, 심지어는 산왕공고 농구부 모두가 각자의 목표와 생각을 향해 달려 들었기에 지금도 회자되는 씬이 탄생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송태섭을 비롯해 두 주인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려진 정대만(미츠이 히사시), 권준호(코구레 키미노부)의 생각을 비추는 장면도 증대되었어요. 최대한 포커싱을 넓게 비춰내며, 이 시퀀스들을 만들기 위해서 담긴 요소들 하나하나를 손수 되짚어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원작의 치열한 장면에 새로운 맥락들과 정서가 더해지며, 더욱 깊고 다채로우면서도 박진감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증대한 결과물이 탄생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작품의 주된 전개 방식인 ’플래시백‘이 거슬릴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선 순간순간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맥락과 요인’이 있음을 강조하는 연출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던 <슬램덩크>의 신작은 ‘더 퍼스트’라는 말이 아깝지 않게 새로운 첫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심상치 않은 흥행의 기세가 나오고 있죠. 여러모로 기존 인기작을 재해석하며 제작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여러모로 증대한 모습이 모두 인상적입니다. 강수진을 빼고 모두 교체된 성우들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요. (심지어는 단역급 분량을 맡은 배우 고창석도. 원래 음악극에 연극을 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목소리 연기가 생각보다 좋습니다.) 이래저래 <슬램덩크>에 있어서는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의 현재지와 새로운 흐름에서도 중요한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덤 1. 한국 쪽에서 맡은 작품의 화면 수정이 꽤나 좋습니다. 수정한 부분은 크게 많지 않지만 어머니가 준비한 송태섭과 형 송준섭의 생일 케이크, 송태섭이 산왕공고전 바로 직전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주로 한국에 맞게 수정이 되어있는데, 꽤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준수하게 되었어요. 굳이 그렇게 해도 되나 싶긴 하지만, 참 공을 들인 것이 인상적이었던. 한국에서 이 작업을 맡은 분들께 수고 많으셨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덤 2. 한국에선 이 작품이 ‘강백호’ ‘서태웅’이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한국어 현지화가 잘 된 덕분에, 1990년대 더빙의 경험이 상당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살리기 위해서 꽤나 더빙판이 걸린 상영관이 꽤 존재하긴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간대가 많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죠. 그나마 <슬램덩크>니 이 정도나 더빙 상영 회차를 확보한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슬램덩크>도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들게 되네요.


덤 3. 한국 개봉을 NEW가 맡은 덕분인지, 이 작품의 개봉 첫주 상영관은 악 800여개에 상영회차는 무려 2000회 이상에 달합니다. 한국에 개봉한 일본 영화/애니메이션 중에서는 정말 유례가 없는 규모에요. 덕분에 JK필름 <영웅>과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동시에 ‘상영관’의 문제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상영관 100-200개 수준을 배정받았다면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런 흥행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NEW도 사실상 도박의 심정으로 최대한 관을 끌어모은 공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영화관의 상영관 배분 문제를 고민케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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