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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상민 Feb 16. 2023

이미영 <초토화작전> 단평 : 재현을 고민하는 명징함

<먼지, 사북을 묻다> 이후로 20여년 만의 신작, 재현을 사유하다.

* 2월 14일 망원 플랫폼c에서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 편집위원회'가 비정기적으로 주최하는 영화 상영회 '씨네토크 동동'의 1회 행사로 관람하였습니다. 앞으로 플랫폼c는 '씨네토크 동동'을 통해 다양한 동아시아 지역의 문제를 다룬 작품의 상영회를 가질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아마 모르시는 분이 더 많을 것 같지만, 2002-3년 서울인권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된 장편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는 정말 쉽게 기억에서 잊을 수 없는 독립 다큐멘터리였습니다. 그나마 2023년 현재는 좀 더 활발하게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보상을 위한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지만, 2002년 당시에는 정말 아는 사람도- 규명을 위한 움직임도 적었던 '사북 탄광 투쟁'을 파고드는 작품이었죠.


5년 넘는 시간 동안 사북에 체류한 감독이 실제 투쟁에 참여했떤 노동자이자 주민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고, 다시 이를 당시 구할 수 있던 각종 자료 사진과 영상과 이어내어 공개적으로 사북 항쟁을 다시 주목해야 함을 말한 작품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선을 보인 김동원의 <송환>, 홍형숙의 <경계도시> 등 감독의 시선으로, 한국에서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역사를 다뤄보는 작품이 다수 등장하던 시기- 이 작품은 감독의 시선임을 숨기지 않으면서, 때로는 서늘하게, 그러나 다시 때로는 파편으로 분명 존재하지만 제대로 끼워맞추지 못했던 역사의 조각과 기억의 실마리를 제대로 이어내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접근이 앞서 언급한 두 작품 이상으로 좋았어요.


이렇게 <먼지, 사북을 묻다>로 다큐멘터리나 독립 영화의 영역에서 이름을 각인한 이미영 감독은 2022년까지 한동안 장편 다큐멘터리를 내놓지 않게 됩니다. 완전히 다큐멘터리 작업을 멈춘 것은 아니었어요. 네팔 국경지대를 다룬 <인터뷰>(2009), 평창 동계올림픽에 얽힌 환경 파괴 등의 문제를 조망한 <인터뷰 프로젝트 - 놀림픽>(2015) 처럼 꾸준히 단편 작업을 발표해왔었습니다. 동시에 이미영 감독은 2005년부터 캐나다에 유학을 가 영화학을 전문적으로 배워 석사 학위를 취득해,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쳐왔었습니다.


그리고 <먼지, 사북을 묻다> 이후 장장 20여년 만에 이미영 감독의 신작 장편 다큐멘터리 <초토화작전>이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2019년 리영희재단의 다큐 지원작으로 선정이 되었기에, 그 때부터 계속 꾸준히 작품을 제작 중이라고 언론에 노출은 되어왔었죠. 현재는 2023년 중으로 극장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랜 장편의 공백을 지나 관객들 앞에 등장하게 된 <초토화작전>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요. 기본적으로 <초토화작전>의 전개는 기본적으로는 전작이었던 <먼지, 사북을 묻다>의 구성과 비슷해보이는 점이 많습니다. 감독의 담담한 내레이션이 주를 이루고, 실제 사건의 전개를 차근히 따라가고, 그 당시의 모습을 담아낸 영상과 사진을 삽입하여 사건의 흐름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토화작전>은 <먼지, 사북을 묻다>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갑니다. 실제 투쟁 참여자의 인터뷰를 담아내었던 <먼지, 사북을 묻다>와 달리 <초토화작전>은 감독이 직접적으로 찰영한 인터뷰 영상을 하나도 삽입하지 않습니다. (상영회에 참석한 영화 관계자 말로는 촬영 자체는 이뤄졌으나, 편집 및 제작 과정에서 부득의하게 현재의 스타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대신 마치 김경만의 <미국의 바람과 불> 같은 작업처럼, 직접적인 장면 촬영은 최소화하되 감독이 확보해낸 다양한 사진과 영상, 그리고 여러 문서 사료를 바탕으로 기워낸 '파운드 푸티지'적인 성격이 상당히 강화되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작에 대비하여 '무빙-이미지로서의 에세이'적 성격이 강화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장면이 이미 당대에 기록된 (또는 근래 피해자의 증언 영상) 사진과 영상에 기초하는 가운데, 내레이션들이 파운드 푸티지를 이어내는 중요한 편집 포인트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레이션은 크게 감독의 내레이션, 그리고 '한국 전쟁 당시 미군/UN군의 무차별 폭격의 피해를 받은' 증언자의 당대 나이를 맞춘 것만 같은 청소년-청년의 '증언 낭독 내레이션'으로 나뉩니다. 감독의 내레이션은 처음에는 담담히 사실을 요약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전쟁 시기 발생한, 노근리 학살 사건으로 대표되는 표적의 분간없이 전방위로 진행된 마을과 인간에 대한 대규모의 폭격을 말이죠. 그리고 청소년-청년의 증언록 낭독은 당시 급박한 전쟁과 피난의 현장에서 난데없이 대량의 폭격으로 자신은 물론 자신의 소중한 가족, 친척, 이웃이 끔찍한 일을 맞이했을 순간을 말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내레이션에 어떤 변화가 감지됩니다. 영화 내내 감독의 내레이션이 지니는 톤 자체에는 변화가 없지만, 점차 이 역사적인 비극 이상으로 이 비극을 영화로 옮겨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내레이션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미 청소년-청년이 낭독을 통한 '당시 상황에 대한 재현'에서도 자막을 통해 '최대한 낭독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 낭독이 이뤄졌다.'고 강조할 때부터 어슴푸레 감지되었지만, 감독의 내레이션은 다큐멘터리라는 기법을 토애 전쟁을 말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생각하게 됩니다. 감독 자신의 할머니가 무자별 폭격으로 겪은 끔찍한 피해를 말하는 것에서 시작한 내레이션은 감독과 영화 자신이 수행하고자 하는 '재현'이 과연 적절한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한국 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재현은 이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철저히 상업 영화와 살짝 수정이 이뤄졌어도 여전히 진한 내셔널리즘의 문법 아래서 부분적으로 보도연명 학살사건을 다룬 강제규의 <태극기 휘날리며>나, 텀블벅 같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존재하기 전 전통적인 영화 제작 후원의 형태로 제작된 이상우의 <작은연못>, 민중의소리 기자 출신의 구자환이 연출한 <레드툼>과 <해원> 같은 작품이 있었죠.


하지만 이들 작품에 대한 일정한 의의나 성과와 별도로 이들 작품이 수행한 학살의 재현은 떄로는 관객들 사이에서, 때로는 영화계 내부의 논의에서 의논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신파와 비극을 더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된 <태극기 휘날리며>야 그렇다쳐도, <작은연못>은 '문자 그대로' 신체가 찢어지고 피와 살이 휘날리는 현장을 정말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했죠. <레드툼>과 <해원>도 어떻게든 학살의 현장을 '가득가득' 전달하기 위해 뒤로 갈수록 마음이 앞서는 모습이 스크린 위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그러한 '직접적인 재현'은 다른 재연 위주의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이 그렇듯 직접적으로 자극을 주는 것에는 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이 극한까지 밀려나가는 것을 그저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과연 사건에 대한 접근을 돕는 길이 되는 것일까요? 이는 단순히 영화가 지니는 수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단 이러한 전쟁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역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 또 다른 '스펙타클'이 되어 현상이 지니는 맥락과 현상에 서린 다양한 기억에 대한 접근을 방해했던 사례, 그러한 일의 반복에 대한 고민은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상황주의'의 등장 이후로 계속 되었던 일입니다. 특히 '무빙 이미지'만이라는 특성 그 자체가 스펙타클로 이어지기에 좋은 영화는 더욱 연출자나 제작 스태프의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이를 고민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미영 감독은 실제 입수한, 당시 폭격기에 설치된 카메라로 기록된 기총 사격 및 폭격의 순간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보여줍니다. 낭독의 형태로 들려주는 사건의 순간도 감정의 고조를 의도적으로 급격하게 드러내게 연출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감독의 말로서 "영화가 폭격의 소음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며, 단순히 현장을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것이 사건에 대한 접근을 돕는 것인지를 계속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사람이 폭격으로 인해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장면을 보여줘도, 재연자나 실제 경험자 본인이 감정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줘도 그렇게 스크린에 드러나고 스피커로 들리는 모습들이 정말 한국전쟁의 끔찍한 순간과 문제적 본질을 전달하는 것에 도움이 될까요? 영화 이론에서는 물론 철학이나 사회하게서도 '재현'의 문제는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직접적인 재현이 당사자 본인이나, 이를 접하는 제3자에게 다른 트라우마로 작동하기 쉬운 상황에서 대안적인 형태의 재현을 고민하는 흐름은 지금 현재도 계속 중입니다.


대신 <초토화작전>은 많은 이들에게 기호적인 존재로, 신화적으로 남아있는 사건을 '차분하지만, 명징한' 계보학적 시선으로, 미시적인 시각과 거시적인 시각을 합치하는 접근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1950년 개전한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으로 '장기간 이어지는 전쟁'으로 남을 때까지, 그 사이에 있던 인천상륙작전이나 1.4 후퇴, 흥남 철수와 같은 순간들이 사건 자체가 지니는 스펙타클과 맥아더와 같은 '핵심 인물'의 이야기로 축소되는 것을 기록으로 남은 그 날, 그 시기의 순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해체하며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접근이 직접적으로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성이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재현의 딜레마를 말했던 것처럼, 그저 소리를 높인다고 그 소리의 반향이 멀리 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 사건이 이렇게 벌어진 것일까요. 왜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문제를 말하는 목소리는 온갖 꼬리표를 달고 여전히 말하기 어려울까요. 이미영 감독은 전작 <먼지, 사북을 묻다>에서도 여러 인물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렇게 '쉽게 치워지는 역사'를 고민했습니다.


<먼지, 사북을 묻다>를 통해서도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이미영 감독은, 그때부터 지녀오던 재현에 대한 고민을 절제를 통해, 공식화된 기록과 그렇지 않은 기록과의 만남을 통해, 그렇게 벌어지는 '공백에서 살아나는 역사'의 응시를 통해 한국 전쟁의 본질적인 끔찍함을, 그외에도 2023년 현재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전쟁의 문제를 말합니다. 마치 존 지안비토나 켄 번스의 작업처럼, <붕괴>나 <옵티그래프>로 사적 경험의 순간이 거대한 역사와 교차할 때를 순간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원우, <아메리칸 앨리> <거미의 땅>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로 이어지는 김동령과 박경태의 기지촌과 위안부 여성의 관계나 맥락을 다양한 형태로 재현하며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처럼. <초토화작전>은 그 '방법'을 섬세하게 고민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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