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지무라 미즈키의 긴 소설을, 영상에 맞게 따뜻히 다시 풀어내다.
때는 5월, 아직 한창 학기 중인데 중학생 ’코코로‘(토우마 아미)는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아니, 갈 수 없습니다. 학교에 간다고 부모님과 약속을 해도, 이전에 있던 사건이 코코로의 배를 너무나도 아프게 만들어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어요. 어머니도 그런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나마 자기 같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 밖 지원 기관의 키타지마 선생님(미야자키 아오이) 정도만 자기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방 안에 박혀있는 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우연히 방의 거울이 오로라처럼 빛나며 자기를 끌어당기네요. 정신을 차려보면 코코로는 마치 그림에 나올 것만 같은 바다 위 ‘외로운 성’에 와있습니다. 자기를 부른 늑대가면을 쓴 키 작은 어린 여자아이 ’늑대님‘(아시다 마나)가 이끄는 가운데, 성 안에는 이미 자기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6명의 청소년들이 있어요.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들 앞에서 지금 5월로부터 내년 3월 말까지 힌트를 모아 소원을 이뤄줄 열쇠를 찾으라는 뜻모를 말을 하는 늑대님, 대체 코코로를 비롯한 이들은 어찌하여 모인 것일까요. 그리고 이 공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영화는 이런 큰 줄거리를 지닌 츠지무라 미즈키의 동명 미스터리 소설을 기반으로 합니다. 원래도 꾸준한 독자층이 있던 작가의 작품이기에 한국에도 일찌감치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만화로도 연재되기도 했어요.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로 데뷔한 미스터리 작가의 작품 답게 기묘한 분위기를 다루는 감각이 좋았고, 600여쪽의 꽤나 긴 작품이지만 그 긴 분량을 8명의 주인공에게 할애하며 일종의 군상극이자, 이들의 이야기를 장르적 어법과 이어내는 식으로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그것도 연속 TV 시리즈도 아니라 2시간도 안 되는 한 편의 극장 애니메이션으로도 특유의 분위기와 여운을 잘 살릴 수 있을까요.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한 <거울 속 외딴성>은 그런 ‘재구축’의 맥락을 꽤 중요하게 언급해야 하는 작품입니다. 원작이 앞서 언급했던대로 인물 하나하나가 이 외딴성에 오기까지,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켜켜이 쌓여지는 군상극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은 원작의 핵심을 살리되 꽤나 과감하게 한정된 시간에 맞춰 그에 맞는 어법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꽤나 길었던 이야기를 원작에서도 주인공격 존재였던 코코로에 맞춰 나머지 이야기를 과감하게 생략해냅니다. 나머지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정말 말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원작 훼손’이 아니에요. 양적인 언급 시간은 줄었어도, ‘적층의 감각’은 영상이라는 매체에 맞게 변용되고 다시 그에 맞게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법도 바뀌었으니까요. 상대적으로 정적인 작품은 후반부로 갈 수록 ‘풀 애니메이션’에 가까울 정도로 프레임을 늘려 캐릭터와 사물의 움직임에 집중하게 만들고 그렇게 점층되는 감각이 마침내 폭발할 때, 코코로는 물론 관객들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이야기가 겹치면서 하나의 진실과 공감으로 향해갔던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의 문법을 통해 조금씩 표현의 폭을 넓히다 클라이맥스에서 활짝 펼치는 식으로 감각을 변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연출이 가능한 것에는 이 작품의 연출자가 원작의 굴레가 강한 <짱구는 못말려>의 극장판에서도 <어른제국의 역습> 같이 ‘캐릭터 상품‘을 넘어 작품적으로도 짚을 수 있는 시도를 해내고, 이후로도 <컬러풀>이나 <백일홍 : 미스 호쿠사이>(한국 미개봉) 같이 원작이 있는 작품을 꾸준히 만들었음에도 ‘원작 그대로’가 아니라 연출자의 의도와 ‘영상으로 변용대는 작품’이라는 것을 제대로 캐치하는 하라 케이이치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도 전작이었던 <버스데이 원더랜드>는 조금 아쉬웠음을 생각하면 이 작품은 하라 케이이치에게 잠시 찾아왔던 정체기를 완벽하게 날렸다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컬러풀>에서 인상적으로 드러냈던, 아직 성장하는 가운데 때로는 혼란을 겪고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 아이들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같은 시각을 담지하는 원작과 만나 작지 않은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한, 어찌보면 더욱 섬세하지 못한 교육 환경에서 비슷한 불안정한 감각을-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하지 못 하는 청소년을 위한 하나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모르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요.
여기에 하라 케이이치의 이전 작품처럼,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드물게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 시선이 이번 작품에서도 내용과 합치되며 잘 살아나는 것도 좋습니다. (자칫하면 몇몇 관객들의 심리적 트리거를 건드릴 수 있는 폭력적 장면에서, 폭력 그 자체를 재현-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하면서도 ’애니메이션’에 맞게 폭력과 공포의 순간을 한 시퀀스에 함축하는 연출은 정말 상징적입니다.) 여러모로 연출, 그리고 작품이 담는 시선이라는 측면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어떤 미래 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덤. 작품의 자막 번역은 무난한 편이지만 인물 호칭에 왜 굳이 원 대사에도 없는 형, 오빠 같은 표현을 덧붙였나 싶어요. 한국은 이름으로 호칭하는 문화가 아니라 나이를 가르는 언어 표현이 익숙하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모두가 같은 고민을 지닌 또래’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특성을 못 살리는 선택이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