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에 대한 전반적인 만화 상황 비평은 추후 <유어마나>에 업로드 됩니다. 제가 몸이 안 좋아 마감 시한이 계속 미뤄진 끝에 2016년 결산이 2017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가와사키 쇼헤이 (김연한 옮김). 중쇄 미정 (그리조아)
사실, 올해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중쇄를 찍자!>가 개인적으로 꼽는 올해의 만화가 되리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지나쳤던 탓일까. 변해가는 출판 업계의 사정과 그 안에서 일하는 이들의 사정을 다양하게 조합했던 <중쇄를 찍자!>는 어느 순간부터 낭만 자체를 다시 포장하는 식으로 흘러가 아쉬움을 주었다. (6권에 수록된 그라비아 표지 모델의 수정을 괴이한 방향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라던지.)
<중쇄 미정>은 <중쇄를 찍자!> 같은 작품 보다는 만화가와 편집부 사이의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삼았던 김나경의 <사각사각>과 비슷하거나, 더욱 힘이 빠져있는 작품이다. <중쇄 미정>에 등장하는 가상의 출판사 '표류사'는 역사만 대충 길 뿐 이렇다 할 영향력도, 인지도도 없는 출판사이며 가뜩이나 책이 안 팔리는 가운데 당연히 모든 주인공은 이렇다 할 의욕을 가지지 않는다. 무기력증과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인드 속에서, 얼렁뚱땅 출판사는 굴러간다.
작품 자체가 마냥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본 만화의 한편에 화끈하게 힘이 넘치는 열혈 만화가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힘을 쭉 빼는 것으로 승부하는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 한국을 비롯해 출판 업계의 판도가 이미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출판 문화를 마냥 추억을 삼기 보다는 현재를 관점으로 매우 시니컬한 시점으로 바라보는 작업은 매우 필요할 수 밖엔 없다. 씁쓸하더라도, 이게 현실의 초상이다.
김민희, 미드나잇 파트너 (카카오페이지 연재 완료, 이코믹스)
비록 잡지 만화 시절이 서서히 몰락하던 시점에 데뷔한 불운을 겪어 아직까지도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있지만, 김민희는 2000년대 이후 순정만화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라고 필자는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다. 장편 데뷔작인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로 시작해 <풀의 꽃>, <강특고 아이들>, <젤리장수 다로>까지 김민희는 '순정만화'로 분류된 잡지 아래에서 작품을 그려왔지만 결코 '순정'이라는 수식어로 함축할 수 없는 세계의 지평을 그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쌓아온 감각은 (데뷔 잡지 <슈가> 폐간 이후 이어서 작품을 그려온 <윙크>가 웹진으로 전환되며 반강제적으로) 웹툰에서 그리는 두 번째 장편 <미드나잇 파트너>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잡지 시절에는 가끔씩 권두 표지나 컬러 에스프리, 단행본 커버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녀가 색을 다루는 실력은 컬러가 전면화 된 웹툰과 맞물려 놀라운 감각을 선사한다. <강특고 아이들> 이후 구체화된 '남들과는 다른' 이들에 대해 그리는 표현도 결코 정형적이지 않다. 김민희가 앞으로 그릴 '색'의 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
김성희, 검은 물 검은 산 (케이툰 연재중)
김성희의 작품을 처음 봤던 것은 <내가 살던 용산>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단편집인 <몹쓸년>까지 볼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꾸준하게 개인의 경험에 기초해, 또는 사회의 경험에 기반을 두며 묵직하게 작품을 그려왔다. <똑같이 다르다>나 <오후 네 시의 생활력>은 이 두 가지 감각을 적절히 배합하며 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험이자, 공적인 시점으로도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왔다. 섬세하면서도 감정을 잘 살린 드로잉도 이에 한몫했다.
<검은 물 검은 산>은 김성희의 작품 중에서는 최초로 먼 과거를 그리고 있다. 아직 한창 탄광촌이 잘 굴러가고 있던 그 옛날, 마을에 살던 아이들은 조금씩 커가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공간과 사회를 인식하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들의 삶을 조금씩 만들어 나가게 된다. 탄광촌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직전에 겪었던 각종 노동 투쟁의 광경을 생각하면 이들이 맞이할 결말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미성숙'하다 부를 수는 없지만,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차츰차츰 공간과 시대의 두께를 드러내는 연출은 섬세하게 감각을 드러냈던 김성희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김유미 글, 반지수 그림, 너에겐 노조가 필요해 (오늘보다 연재중, 사회운동)
이미 틈이 날 때마다 좋은 작품이라 말해왔던 작품이긴 하지만, 정말 이 작품 만큼 꾸준히 노동을 만화로 풀어내려는 시도는 흔치 않았다. 물론 <송곳>이 있었고, <섬과 섬을 잇다> 프로젝트가 있었다. 독립적인 만화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최규석이 참여한 민주노총 법률원에 관한 책 <노동자의 변호사들>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들 모두 일상적으로 이어주는 시도가 되지는 못했다.
<너에겐 노조가 필요해> (또는 <오늘보다>에 연재 중인 코너 이름 <단결툰>) 는 사회진보연대가 발간하는 사회 운동 교양지 <오늘보다>에서 기획되며 좀 처럼 쉽지 않은 시도를 꾸준히 이어 나가고 있다는 '지속성'에서 큰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매호마다 다루는 다양한 노조와 운동의 이야기를 각각의 성격이나 특성에 맞게 구성을 고민하는 명민함도 느껴진다. 누군가는 '목적성'이 너무 강하다고 꺼릴지 몰라도, 이 만화는 그 '목적성'이 다시 작품의 힘이자 장점이 되는 작품이다.
란탄, 성숙의 지표 (개인 독립출판)
<성숙의 지표>는 현재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인 <유어마나> 초대만화로 처음 보고 무척이나 깜짝 놀란 작품이었다. 여성이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구조에 대해서 지적하는 작품은 무척이나 많았다. 정병각의 영화 <코르셋>도 그랬고, 더 올라가면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도 초기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여성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성숙의 지표>는 2010년대 현재 한국 여성의 눈높이로 다시 이를 이야기한다.
'성숙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는 더욱 성숙해져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폭력들. 누군가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며 이에 대해 지적하는 이들을 '프로 불편러'라 할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 대다수는 군대 이야기나 데이트 더치페이 같은 문제로 넘어가며 자신들이 겪는 문제를 드높인다.
그런 점에서 <성숙의 지표>는 한국의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을 비롯한 모두가 곱씹으면서 읽어 볼 작품이다. 우리는 그냥 무심코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성을 구성하는 요소를, 상업적인 포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나. 몇몇 이들이 이런 고민과 문제 지적을 페미니즘 서적 안으로 몰아넣으려고 할 때, 란탄은 좀 더 진솔한 어법과 감정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를 감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이미 공개되어 있는 작품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독립 출판물 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어볼 가치가 무척 충분하다.
마영신, 19년 뽀삐 (다음 웹툰 연재 완료, 씨네21북스) / 모두가 래퍼 (한겨레21 연재중)
<19년 뽀삐>에 대한 비평은 이미 <유어마나>에서 썼던 바가 있다. 마영신은 개인의 일상을, 또는 특정한 집단이나 공간의 일상과 삶을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이렇다 할 미화를 가하지 않는다. <남동공단>에서 딱히 노동 문제를 건드려야 겠다는 결기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동공단의 불안정하고 황량한 분위기가 잘 전달될 수 있던 것은 그의 이러한 재능 덕분이다. <19년 뽀삐>는 <삐꾸래봉>이나 <동동이>에 비하면 살짝 연령대가 높은 축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그러한 선택이 좀 더 많은 독자층을 만날 수 있는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19년 뽀삐>의 연재가 끝날 때 즈음 새롭게 한겨레21에서 연재를 시작한 <모두가 래퍼>는 일종의 직업 탐방 만화이지만, 마영신 특유의 터치가 살아 있어서 무척이나 독특한 느낌이 되는 작품이다. 한겨레21이라는 연재처의 특성상 모든 내용을 딱 한 장 내에 끝내야 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영신은 그 한 장 안에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삶과 애환을 담담하면서도 애정있는 자세로 그려내고 있다. 고용노동부에서 절대 말해 주지 않는 '리얼 직업의 세계'인 동시에, 가장 밀도 있게 직업에 접근한 작업인 것이다.
정재윤, 서울구경 (개인 독립출판)
정재윤의 <재윤의삶>은 '9컷 만화'라는 정사각형 공간의 틀 안에 온갖 다양하면서도 사소한 감정을 집어 넣은 작품이었다. 그저 삐딱하게 보자면 '이게 뭐지' 싶은 느낌이 들 수 있어도, 동시에 그냥 흘려 보낼 수 있는 감정을 꼼꼼히 묘사했기에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서울구경>은 <재윤의삶>에서 어렴풋이 드러난 '꼼꼼함'이 제대로 빛을 발한 장편이다. <월간 순정 노자키군> 처럼 가로로 길쭉하게 변형된 4컷 만화로 전개되는 <서울구경>은 남주인공, 여주인공, 그리고 남주인공의 남동생- 이렇게 3명의 시선으로 지방 소도시에 사는 이들의 욕망을 그려낸다. 그 욕망은 '막장 드라마'처럼 주변 사람들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마냥 순수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욕망의 물결은 무척이나 꼼꼼하게 묘사되어 있다.
남주인공은 공부를 잘하는 자신의 남동생이 서울로 가 성공하길 원하고, 그가 좋아하는 여주인공은 자신을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지방 소도시의 기분 나쁜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작 남동생은 마냥 자신에 가해지는 기대감도, 서울에 대한 동경어린 시선도 모두 부담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때로는 교차하거나, 때로는 정반대로 떨어져 있는 각각의 바람과 욕망은 한국에서 지방 사람이, 여성이, 그리고 청소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깊숙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영신의 <남동공단>과 더불어, 한국의 '지역'이라는 단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