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기 쉬운 사회, ‘감성 에세이’를 원하는 독자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월간 <K-Book Trends> 2018년 5월호 원문.

by 성상민

* 이 글은 한국출판만화산업진흥원이 해외 출판 관계자를 위해 발행하는 웹진 <K-Book Trends>(중국어판 <韩书趋势>)의 2018년 5월호에 실린 번역문의 원문입니다.

* 영어 번역본은 http://kbook-eng.or.kr/bbs/board.php?bo_table=201805en&wr_id=7

중국어 번역본은 http://kbook-chn.or.kr/bbs/board.php?bo_table=201805ch&wr_id=3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는 한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특히 지금처럼 책을 사는 사람이 눈에 보이게 감소한 상황에서, 책을 산다는 행위는 사회의 개개인이 소중한 돈을 바쳐서라도 그 책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대변한다. 단순히 유행하는 책이 팔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흐름과 정서를 제대로 포착하는 책이 좋은 판매고를 얻는다. 그런 차원에서 베스트셀러를 살피는 행위는 곧 한 사회의 흐름을 분석하는 일이 된다.


6_01.jpg


2018년 현재, 한국 서점가에는 ‘감성 에세이’를 표방한 책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온/오프라인 서점 ‘교보문고’와 ‘알라딘’의 2017년 연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가 1위를 차지했다. <언어의 온도>는 수년간 기자로 활동하다 청와대에서 전문적인 ‘스피치 라이터’(speech writer, 연설물 작성자)로 활동했던 저자의 경력이 잘 살아있는 에세이다. 이전부터 작문법과 대화법에 대한 책을 주로 쓰던 이기주 작가는 <언어의 온도>에 이르러 주변에서 흥미롭게 접했던 말과 글을 수집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제시한다. 책에 실린 글 하나하나는 무척이나 짧지만, 이기주의 문장들은 다양한 처지에 놓여있는 독자들에게 귓속말처럼 포근하게 전달된다.

<언어의 온도>를 제외해도 2017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안에 있는 책들 대다수는 ‘감성적’인 에세이다. 윤홍균의 <자존감 수업>는 표지에서부터 ‘하루에 하나, 나를 사랑하게 되는 자존감 회복 훈련’을 강조한다. 본래 정신과 의사이자 자존감 전문가로 활동했던 저자는 제목과 홍보 문구에서 언급한 그대로 좌절과 열등감, 무기력에서 벗어나 내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 이전에도 정신과 의사들이 개인의 심리에 대해서 집필한 책은 여럿 나왔었지만, <자존감 수업>처럼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 책은 많지 않았었다. 특히 ‘개인의 행복’을 강조하고, 자기 자신을 ‘긍정’할 것을 강조하는 심리학 계통의 에세이가 열렬한 사랑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언어의 온도>나 <자존감 수업>이 필자가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의 전통적인 작법으로 전개되는 에세이라면, 최근 1년 사이에는 독자들이 누구나 쉽게 알 만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소재를 삼은 감성 에세이도 서서히 보이고 있다. 김신희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가 대표적인 사례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는 이가라시 미키오의 스테디셀러 만화 <보노보노>의 지적재산권을 활용해, 원작에 등장하는 대사나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에세이를 전개하고 있다. 작가가 직접 창작한 분량은 많지 않지만, 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진 작품을 바탕으로 재창작한 시도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의가 있는 접근법이다. 실제로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가 출판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후, ‘곰돌이 푸’와 같은 작품을 소재로 삼은 에세이도 등장해 시장에서 호응을 얻는 등 한동안 ‘인기 작품’을 원작으로 한 에세이는 계속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SNS에서 먼저 화제가 된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어 다시 인기를 얻는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SNB 채널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는 2014년 처음 시작한 이래, 페이스북-인스타그램-피키캐스트 같은 개별 SNS 플랫폼에서 많게는 80만명의 누리꾼들이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콘텐츠를 게재하는 SNS를 통해 직접 사연을 받아 그에 대한 감성적인 답변을 들려주는 것으로 이름이 높다. 이렇게 약 5년 간 게재한 에세이들은 지난 2년 사이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와 <나, 있는 그대로 참 좋다>라는 책으로 독자들 앞에 다시 등장했다. 특히 해당 책들은 SNS로 사정상 공개하지 못했던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등을 공개한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SNS로 이미 한 번 읽은 독자들도 다시 한 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동기를 유발하는 마케팅 전략을 취했다.

이외에도 무수한 에세이들이 독자들의 감성을 전달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표지나 본문에는 파스텔톤으로 채색된 동시에 간결하게 화풍으로 그려진 일러스트를 삽입한다. 책 제목 역시 비유적인 수사 대신 직설적으로 책의 내용을 전달하는 문구를 채용한다. 과거의 감성 에세이들이 필자의 경험담이나 인생관을 들려주는 차원이었다면, 현재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에세이들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거나 구할 수 있는 소재에 기반하며 집필된다. <언어의 온도>처럼 일상 주변의 ‘글귀’나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같이 유명 콘텐츠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 외에도 SNS에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에세이에 도전하는 책들도 늘고 있다. 반면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감성 에세이는 <자존감 수업> 정도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왜 한국 사람들은 감성적인 에세이에 빠지게 된 것일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출판시장의 주류는 ‘자기계발서’였다. 개인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성공을 쟁취하거나,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얻게 될 것임을 강조하는 책이 많았다. 2000년대 중반 유행했던 호아킴 데 파사다의 <마시멜로 이야기>나, 2010년대 초반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경제 저성장과 청년 실업은 ‘노력’이라는 단어의 가치를 퇴색시켰다. 대신 지금 당장 행복과 위안을 얻길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16-2017년 무렵 한국에서 서서히 유행하기 시작한 ‘YOLO’(You Only Live Once, 네 인생은 오직 한 번 뿐)나 ‘소확행’(小確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이자,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신조어)은 개인의 변화나 도전을 촉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개인이 각자 놓인 처지 위에서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꾹꾹 참은 뒤에 나중에 더 크게 즐기라는 조언을 거부하고, 지금 당장 행복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어떤 식의 조언으로든 상처받기 쉬운 사회 속에서 개인에게 힘을 북돋기는커녕 위로조차도 될 수 없는 세상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한계나 상처를 그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보노보노’나 ‘곰돌이 푸’처럼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의 모습을 동경한다. 조금이라도 뇌를 굴리며 사고하는 대신, 직설적이지만 상냥한 말투와 섬세하고 따뜻한 그림으로 내 자신의 자존감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에세이가 유행하는 현실은 각박한 한국 사회에서 완벽하게 지쳐 움직일 힘도 잃어버린 개인들의 현주소를 상징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016년 결산 / 눈여겨 볼 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