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과 <더 킹>에 <빅 쇼트>를 어설프게 더하다
한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도박 볼링’을 소재로 액션 스릴러를 만든 <스플릿>은 흥미로웠죠. 빈틈이 많이 보이긴 해도, 꽤나 재치로운 저예산 스릴러였습니다. 그런 감독 신작이 안 궁금할 수가 없죠. 게다가 주제가 IMF 직전의 한국 경제-사회입니다. CJ도 나름대로 밀어줬던 프로젝트였던지, 제작사도 <그 놈 목소리> <전우치>를 비롯해 근래는 <마스터> <골든 슬럼버>(2018 리메이크)를 만들며 CJ의 가까운 파트너가 된 ‘영화사집’이 붙었습니다. 주연도 김혜수-유아인-허준호-조우진에 뱅상 카셀까지 불러냈죠.
영화의 줄거리는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겠다고 선언하기까지 일주일 사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만 하면, 연출자 딴에는 ‘밋밋할’ 것이라 생각했던지 네 명의 주인공을 통해 1997년 당시 한국 사회의 다양한 요소를 조망하려 시도합니다. 김혜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 ‘바른 말’을 하는 캐릭터입니다. 반대로 김혜수와 계속 부딛치는 조우진은 ‘재정국’(정작 2018년 시점에서는 기획재정부라 원래 이름을 그대로 쓰던데, 여기서는 ‘재정경제원’이라는 표현을 안 쓰더군요.) 차관이고, 어떤 꿍꿍이가 있습니다. 유아인은 실제로 IMF 당시 사라진 고려종합금융 직원으로, 위기를 미리 예측해 풋옵션과 달러, 부동산 매수로 한몫 두둑히 챙긴 역할로 나옵니다. 허준호는 식기 같은 철물을 다루는 공장 사장이죠. 뱅상 카셀은 다들 알다시피 IMF 총재인 미셸 캉드쉬고요.
특별출연까지 포함해 메인 타이틀롤에 이름을 올린 다섯 사람의 성격은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김혜수-조우진-뱅상 카셀을 제외하고 같은 시간에 놓여는 있어도 공간과 조건은 제각기 다릅니다. 앞서의 세 명이 관료라면, 유아인은 철저히 이익만을 쫓는 금융계 인사고, 허준호는 금융의 동학을 모른채 공장 하나만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중소기업 사장이죠. 어느 한 쪽이 돈을 벌면, 어느 한 쪽의 인생은 파탄이 나도록 구도가 짜여져 있습니다. 관료들은 어떻게든 국가 경제를 구하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입장은 갈리죠. 잘만 짰다면 희비극적 군상극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참으로 씁쓸하게도, 이 다섯 명의 인물과 세 개의 공간은 뜨거우면서도 텅 비어 있습니다. 김혜수와 허준호는 분명 열연을 하고 있는데, 정작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모두가 다 알고 있거나 ‘그렇게 되었을거야’라며 미루어 인식하는 내용만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뜨겁게 드러나는 건 김혜수와 조우진의 갈등이지만, 보고 있으면 사실상 조우진이 흑막입니다. 조우진이 인기를 끌었던 <내부자들>의 역할 그대로 극중 인물은 물론 관객들의 속을 슬슬 긁는 연기를 하는데, 여기에 시대적 트렌드에 맞게(?) 여성혐오적 대사도 쏟아냅니다.
하지만 조우진에게 주어진 악역의 크기와 무게와 달리, 정작 왜 그가 한국이 그토록 IMF 구제금융을 받고 싶어했는지가 얄팍합니다. 정말 뻔한 이야기의 연속이에요. 게다가 영화는 어쨌든 실제 전개된 현실을 기반으로 하니, 자세히 따지고 있으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반의 조우진이 설파한 논리와 달리 후반의 조우진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나쁜 놈’ 인거에요. 감성만 있을 뿐 이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김혜수의 배역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꽤나 지적이고 냉철한, 차갑게 분노를 뱉는 연기는 인상적이지만 캐릭터가 움직이는 원리에 내용이 없는 상황에서 모든 말들이 얼핏 보기엔 묵직할 듯 하지만 실은 비어있습니다.
모든 대사가 이러다보니 중후반부 IMF 협상 장면에 이르러 조우진-김홍파(재정국 장관 역으로 나옵니다. 실제 모델은 임창열이겠죠.)-뱅상 카셀-김혜수 간의 설전이 그냥 ‘말싸움’ 이상이 되지가 못 합니다. 물론 좋게 이해하자면 국가의 운명을 가를 협상이 쓰잘데기 없는 몽니의 연속이라는 걸 엿보여주는 선택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경제적 틀거리는 갖춰야 하지 않습니까. 온갖 어려운 경제 용어를 쓰고 있지만, 정작 ‘논리’는 없습니다. 그 와중에 정리해고, 비정규직 도입 등을 꺼내 분노를 끌어오르게 하지만- 애초에 이를 1996년 노동법 개정에서 처음 나와 민주노총이 장기 투쟁에 나섰다는 맥락은 당연히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조우진과 뱅상 카셀은 악, 김혜수는 선이라는 식의 이분법이 논리가 나와야 할 자리를 매운채 배우의 연기와 설정만 2시간 동안 낭비할 뿐입니다.
그럼 유아인과 허준호는 뭐냐고요? 김혜수와 조우진 만큼이나 도구적인 존재가 됩니다. 여기에 유아인은 <사도> 이후로 고착화된 분노 연기의 문제인지 디렉션의 문제인지 감정을 추스려야 할 파트에서도 그냥 과잉된 연기만 반복합니다. 허준호는 유아인에 비하면, 오래간만에 출연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인상적인 모습들을 보이지만 계속 주어진 역할이 이를 돕지 않습니다. 유아인은 그냥 <빅 쇼트>의 주인공의 열화 복사판이고 허준호는 IMF 전후로 흔히 나왔던 ‘가족 감동극’ 따위에 보이는 주인공을 조금 꼬았을 따름입니다.
그나마 <빅 쇼트>는 철저히 주인공들이 경제 위기를 이용해 한몫을 챙기는 여정에 집중하며 구조를 드러냈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이미 내용과 주인공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유아인이 서야 할 대립구도는 이미 김혜수와 조우진이 차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유아인의 이해타산적 행동도 설자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냥 분량 자체가 애매합니다.) 혀준호의 역할이야 구조적으로 벌어지는 위기에서 ‘결과물’로써 극한에 놓이는 철저한 수동적 존재라 쳐도 유아인은 감독 스스로도 이 존재를 주체적인 생존 본능의 캐릭터인지, 아니면 돈을 무진장 벌었으니 성공한 것 같지만 사실 그 조차도 구조의 종속된 존재이지를 결정을 못 짓고 끝냅니다. 체계적으로 짜여졌어야 할 군상극은 ‘대중정서’에만 의존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정서를 <내부자들>이나 <더 킹>이 심은 매우 나쁜 경로인, ‘우리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기대감으로 어설프게 치환해 대체하려 할 뿐입니다. IMF 때 벌어졌던 사건의 경로를 알기에도 좋지 않고, 당시 발생했던 서민들의 고통을 굳이 이걸로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최근 한국 기획영화의 어느 한 관습처럼 좋아보이는 요소는 외부에서 벤치마킹하고 (<빅 쇼트> <마진 콜>) 이를 채울 이야기는 파탄난채 의지주의적 정서에 의존하는 겁니다. <내부자들>과 <더 킹>, 더 거슬러 오르면 <작전> 같은 영화의 철저한 답습일 뿐입니다.
애초에 왜 최국희가 다시 한 번 <스플릿> 같은 스릴러 장르를 만들지 못하고, 단 한 번도 전문적인 데이터가 필요한 영화를 손 대지 않은 채 <마스터>나 <골든 슬럼버>를 만든 제작사가 이런 영화를 만들고 다시 흥행해야 하는 걸까요. 이 영화가 어찌보면 한국 영화의 어떤 현실입니다. ‘국가부도의 날’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이 영화가 2018년 한국 영화에 발생한 위기와 빈곤함을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추신. <더 킹>에서 클론의 ‘난’을 추는 씬은 확실히 근래 한국 영화에 어떤 모델이 된 듯 싶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언타이틀의 ‘날개’가 그 자리를 대체합니다.
추신2. 이 영화의 각본은 신인이지만, 대신 두 명의 ‘전문가’가 경제 자문을 했습니다. 한 명은 김택수 현 대전시 정무부시장 (구, 노무현 정부 시민사회비서관)과 다른 한 명은 유종일 KDI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