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건형 <한국인을 관두는 법> 단평.

밀도 높은 아카이브와 패러디로 빚어낸 한국의 정체성

by 성상민

* 작품은 11월 2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2018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 좋은 삶>에서 상영된다.


안건형의 작업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그가 유운성과 함께 지속적으로 미디액트를 기반으로 펼치는 프로젝트 ‘오디오비주얼 필름 크리틱’일 것이다. 어려워 보이는 말이지만, 제목들이 뜻하는 그대로 오디오-비주얼로 필름을 크리틱하는 일련의 ‘영상 평론’이다. 그 말 그대로 안건형은 기존의 영상을 영상으로 크리틱을 하거나, 또는 영상으로 공간과 시간을 비평한다.

그 질감은 김경만, 박경근, 마민지 등이 선보인 파운드 푸티지 스타일의 작품과는 결코 결이 같지 않다. 최대한 ‘움직이는 영상’(무빙 이미지)와 사운드의 사용을 절제하며,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무척이니 밀도 깊게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교차하여 자신만의 ‘연구’가 담긴 아카이브를 선사한다. 홍제천-세검정에 담긴 역사-사회적 맥락을 영상으로 만들었던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2014)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보기엔 무척이나 낯설지만, 그가 택한 자신만의 서술-기록법은 높은 밀도와 끝없는 가지치기로 시공간에 담긴 역사를 호출한다.


그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 발표한 신작은 여러모로 양분되어 있다. 서로 스크린을 맞대어 상영되는 2채널의 영상은 한 쪽으로는 현재까지도 계속 발생하는, 박근혜를 지지하는 태극기 시위의 장면과 공간의 모습을 중심으로 영상과 텍스트가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다른 한 쪽으로는 태극기 시위대들이 필사적으로 지키려하는 박근혜가 상징하는 역사들이 영상과 텍스트 사료로 교차되어 제시된다. 전자의 영상이 최인호의 패러디 소설 <총독의 소리>를 다시 패러디한 <출세의 소리>를 낭독한 사운드를 배경음으로 삼는 것과 달리, 후자의 영상은 박근혜 신화가 상징하는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발표된 음악들이 흐른다.

전자가 이미 신화가 깨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신화의 재생을 꿈꾸려는 움직임이라면, 후자는 그 신화를 아카이브를 통해 구체적인 질감을 제시한다. 누군가에겐 (특히 ‘태극기 시위대’에게는) 전자가 비참한 현실이라면, 후자는 자랑스럽고 그리운 노스탤지어이다. 다시 그 반대편 극에 놓인 이들에겐 전자가 추악한 몸부림이자 조롱감이라면, 후자는 추악한 이들의 추악한 과거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둘은 스크린도, 사운드도 분리되어 있지만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다. 스크린이 맞대어 흐르는 것처럼, 이 둘은 마치 유기체처럼 서로가 서로의 디딤돌이자 어떠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쉽게 어떠한 현상과 집단을 비웃는 대신, 제목 그대로 ‘한국인’ 전반의 현재와 과거를 거친 초상이라는 차원에서 과거의 사료와 현재의 사료를 동시에 파악하려 시도한다.




전자에 흐르는 사운드 <출세의 소리>가 패러디한 <총독의 소리>는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가 일방적으로 한일 국교를 재개하고 협정을 맺으려 할 때 집필한 소설이다. 조선총독부의 지하방송을 자처하는 소설은 역설적으로 한일협정을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도리어 위기와 기회는 동등하며, 다시 한일 협정 전과 후, 독립 전과 후가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졌냐며 조소하는 냉소가 담겨 있었다. 안건형은 이를 ‘출세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의 발언으로 바꿔, 다시 이를 한국 전반의 역사에 삽입한다. 태극기를 들며 시위하는 이들이 지키는 대상이 과연 ‘박근혜’인지, 아니면 ‘박근혜’로 표상되는 다른 무언가인지를 패러디의 방법론을 거쳐 묻는다.

그리고 후자의 영상은 전자의 물음을 다양한 영상-문자-음악 사료를 통해 나름대로의 답을 찾는 과정이자, 당대의 시대상을 재현한 그 자체이다. 일반 민중-인민을 비롯해 문인도, 종교인도,
기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이 되어- 다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 시기가 되어 자신들이 믿고 지향했던 것을 시대에 끼워맞춘다. 2018년이 되어 이 사료를 보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쓴 웃음을 짓게 만들지만, 이 사료들이 제작되었을 시기 ‘제작자’ (또는 창작자) 의 자세는 어떠하였을까. 후자의 영상은 궁극적으로 당대의 심리를 묻는다. 동시에 시기가 바뀌며 태도가 바뀌는 것이 과연 ‘특정한’ ‘일부’의 문제였는지를 질문한다. 정말로 그것은 ‘이단’만의 독자 행동이었을까. 안건형은 ‘왜’ 이들이 기회주의적이었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단지 한사코 거부하는 ‘기회주의의 시대정신’을 보라고 만든 것이다.

비엔날레의 주제가 ‘좋은 삶’이었음을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안건형은 애초에 ‘좋은 삶’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뒤틀린 시대정신과 이중의 정서를 발견했다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기회주의의 시대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쉽게 시대에 편승했고, 그 시대에 편승한 자 일부는 새로운 시대에, 다시 일부는 지나간 시대에 계속 머무른다. 이 모습들은 결코 ‘부분’의 초상이 아니라, 시대를 거쳐간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은 경험했을 ‘전체’의 표상이다. 그 표상에 담긴 욕망은 그저 거부하는 것으로 가볍게 지워지는가. 그렇게 안건형은 역사를 기록하고 사고하는 정치성을 묻는다. 정체성 자체를 다시 쓰지 않으면, 결코 그 역사는 자신의 것이 감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둬야지만’, 비로소 새로운 모습도 꿈꿀 수 있는 역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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