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비평처럼, 2016년에 대한 전반적인 영화 상황 비평은 추후 <팝업시네마>에 업로드 됩니다. 지금도 몸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해가 가기 전에 이건 좀 정리해둬야 겠다 싶어 겨우 정리하고 있습니다…
김일란 이혁상, 공동정범
운동에 대해서 다루는 작품은 많지만, 운동 이후를 다루는 작품은 많지 않다. 설사 다루더라도, 적당히 회고적인 마무리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 봤던 영화들 중에서 운동의 과거를 되돌아 보는 동시에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는 김수목의 <니가 필요해>와 김미례의 <외박>과 <산다>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김일란과 이혁상의 <공동정범> 또한 필수적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원래 <두 개의 문 2>로써 기획되던 작품은 여러 시행 착오와 방향 재설정 끝에 <두 개의 문>의 후속격인 작품이며서도 <두 개의 문>에 묶이지 않는 '용산 참사'를 되짚는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작품은 마치 <다이빙벨>이나 같은 감독이 만든 <일어나, 김광석>, 최근 주목을 받는 유튜브 다큐멘터리 <세월X> 등등의 다큐멘터리 마냥 선정적으로 과거를 되새기지 않는다. 물론 뼈아픈 부분이 많긴 하다. 패배로 일단 종결된 운동의 책임을 묻는 것은 누구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작품은 운동을 내부적으로 다시 평가하고, 갈등의 골을 인정하면서 다시 나가는 것이 비록 실패한 운동일지라도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골을 만든 궁극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만약 참과 거짓, 착함과 선함의 이분법에 익숙했던 이라면 작품의 효과적인 편집과 연출로 결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만 분류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리니.
켄 로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켄 로치는 나이로도, 그간의 작품 행보로도 '거장'이라는 말이 손색 없는 감독이지만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날카롭다는 것을 상기시키게 만들었다. 물론 그 전에 만든 작품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나 <지미스 홀>이 과거의 사건을 되새기며 현재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도, <앤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 처럼 소소한 해프닝 스러운 이야기 속에 숨겨진 현대 영국의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켄 로치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통해 2010년대의 <케스>이자 <빵과 장미>를 만들었다. 이미 많은 사회 보장 제도가 파괴되거나 회복 불가능에 이른 지금, 그저 성실하게만 살아온 한 명의 노동자는 예전에도 마냥 행복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한편으로는 크리스티 푸이유의 <라자레스쿠씨의 죽음>이 생각날 정도로 씁쓸한 블랙 코미디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매 작품에서 계속 그랬던 것처럼 일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것이 우리가 켄 로치를 사회 비판적인 감독인 동시에 실천적인 감독이라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동우, 노후 대책 없다
그야말로 작품은 '대책이 없다.' 작중의 주인공격인 하드코어 펑크 밴드 '파인 더 스팟'의 노래 제목도 '노후 대책 없다'며, 감독을 비롯해 거의 모든 등장 인물 모두 별다른 인생 대책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는 영화도 이렇다 할 이후의 대책이 없이 찍은 것 같다. 대놓고 처음부터 '무작정' 찍기 시작했다고 선언하는 작품은, 감독과 주변인의 일상을 다루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감독 자신이 소속된 밴드 '스컴레이드'와 '파인 더 스팟'의 일본 초청 투어 공연을 그리다, 다시 또 어느 순간에는 한국 1세대 하드코어 펑크 밴드의 이야기를 그리더니 후반에는 다시 자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흐른다. 흐름이 뭔가 정신이 없다.
하지만 영화는 이 무질서 해보이는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만든다. 그야말로 현재에 대한 대책은 간신히, 미래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없게 사는 것이 한국의 하드코어 밴드의 삶이자 동시에 한국에서 마이너한 위치의 무언가를 하는 이들 대부분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아주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나름대로의 방식을 할 수 있다면 그 역시 괜찮지 않을까? 동시에 그러면서도 사회에 대해서 무언가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영화는 제작 중에, 관객은 점차 영화를 보는 중에 '의미'를 형성한다. 나오는 펑크의 파워도, 카오스 속에서 탑을 쌓고 올라가는 영화의 모습도 모두 힘이 넘친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경미, 비밀은 없다
차라리 워킹 타이틀인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개봉했으면 영화의 내용에도 살고, 최소한 지금보다는 좀 더 좋은 흥행 결과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행복이 가득한 집>은 <비밀은 없다>가 되었고, <비밀은 없다>는 대중들의 많은 혹평에 시달리다 매우 빠른 속도로 극장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흥행 성적과 상관없이 이 작품은 한동안 반실종 상태 였던 한국 영화의 '주체적 여성'을 다시 불러오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모두들 작품에 '의미가 없다' '스토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마치 작품에서 국회의원 후보의 '아내'이자 고등학생 딸의 '어머니'를 맡은 손예진이 출생지로 인한 폭력과 남편의 이상한 시선을 비롯한 각종 폭력과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사건들 끝에 주체를 다지는 것처럼, 도리어 영화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한국에서 '여성'을 말하는 영화가 서있는 위치를 생각하게 만들고 말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다들 한껏 품격을 갖춘 듯 하지만, 사실 한꺼풀 들춰내면 욕망에 너무나도 충실하게 살고 있다. 단지 이를 계속 깊게 누르고 또 누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져 악취를 강하게 풍길 뿐이다. 마치 주부를 위한 월간지 <행복이 가득한 집>과 같은 워킹 타이틀처럼, 영화는 거대한 허장성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품은 가면을 벗기고, 포장을 마구 뜯는다. 그렇게 묘한 힘을 분출하는 영화이다.
김성수, 아수라
<런어웨이>로 시작해 <비트>와 <태양은 없다>로 충무로 신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던 김성수는 <무사>에서 살짝 삐끗하더니 <영어완전정복>에서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중간에 제작자로 컴백을 시도했던 <중천>이 망한 것은 복귀를 더욱 늦추고 마는 요인이 되었다. 가까스로 컴백한 <감기>는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더이상 김성수에게 답은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선택한 길은 정말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선택지를 모색하는 것이었고, 그게 <아수라>였다. 분명 <아수라>는 기묘했다. 마치 <런어웨이>나 <비트> 마냥 90년대의 색채가 기묘하게 재현되는 느낌의 작품은 그래서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동시에 그러기에 흥미로운 컬트가 될 수 있었다. <검사외전>이나 <마스터> 같이 철저하게 흥행만 노리고 공장에서 찍은 액션 블록버스터만 가득한 가운데,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가 저마다 개성 넘치고 독특한 행동과 모습, 그리고 미친 듯이 스타일리쉬한 미쟝센과 촬영까지.
그렇게 <아수라>는 트위터 상에서, 그리고 거리의 깃발을 통해서 '안남시민'이나 '아수리언'을 자청하는 이들을 만들 수 있었다. 비록 누구나 1990년대의 스타일을 다시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이들의 '알탕' 지적은 이 재현의 어떤 한계를 고민케 한다.) 동시에 한국 영화가 처해있는 양극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박소현, 야근 대신 뜨개질
<야근 대신 뜨개질>을 보고 많은 사회적 기업의 사장이나 활동가가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그랬다. 며칠 전에 필자는 우연하게도 페이스북을 통해 <야근 대신 뜨개질>의 감독과 주인공이 다니는 사회적 기업이자, 영화 속에서 노동 문제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접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트래블러스맵'의 사장이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영화 속의 감독과 주인공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사장인 자신으로써 자본주의 아래 사회적 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사원은 줄어도 회사는 잘 정착했다.) 는 이야기였다.
역으로 돌려서 이야기를 하자면, 사장의 의견이 필자 역시 이해가 간다. 애초에 착한 자본가, 나쁜 자본가를 가르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업이 좋은 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들, 누군가를 고용하고 자본주의 아래에서 활동하면 결국 어떤 식으로든 갈등을 드러낼 수 밖엔 없다. <야근 대신 뜨개질>은 그 필연적인 갈등과 고민의 순간을 드러낸 다큐멘터리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써 한국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냥 사회적 기업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이도, 어떻게 자기가 다니고 있는 기업에서 노동 문제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이도 다 좋은 영화다.
트래비스 나이트, 쿠보와 전설의 악기
아드만 스튜디오와 함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서 양대 산맥을 구축하고 있는 라이카 스튜디오는 <쿠보와 전설의 악기>를 통해서 극강의 연출을, 그리고 깊숙하게 와패니즘적 요소에 접근한 서사를 선보였다. 누가 보기엔 유치하고 막장적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라이카 스튜디오가 만든 작품들의 서사는 그러한 전복의 묘미에서 출발하는 작품이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막장'이 아니라 '통속'이다.
<쿠보와 전설의 악기>는 '종이접기'(오리가미)의 움직임과 조합을 통해 다양한 감각을 선사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일본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한편, 이러한 요소들에 숨어있는 연결 관계를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으면서 동양의 것도, 서양의 것도 아닌 독특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하늘에 내려온 존재'에 대한 설정이나 작중 행보를 생각하면, 단순히 '유치하다'의 수준으로 치부할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가장 일본적인 소재로, 가장 근현대 일본의 속살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들여다 본 것이다.
번외 : 정윤석, 밤섬해적단 습격의 시작
단 한 번도 영화제에서 소개된 적이 없고, 후반 작업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로 후원자 시사회에서 본 작품이지만 너무나도 독특한 매력이 숨쉬고 있어 리스트에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점에서는 감독의 전작 <논픽션 다이어리>와 정반대에 있어보이지만 동시에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며, 같은 해에 공개된 이동우의 <노후 대책 없다>와 닮아 보이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다른 길을 가는 작품이다.
비록 지금은 해체했지만 <김일성 만세>나 <백범살인일지> 같은 기묘한 센스의 가사로 주목받았던 그라인드코어 밴드 '밤섬해적단'의 여정을 그리는 작품은 얼핏 보기엔 좌파 같기도, 우파 같기도, 아니면 그냥 비관론자 같기도 한 그들의 노래와 행보를 조금씩 밟아 나가며 그들의 활동에 대한 '의미' (또는 의미 없는 의미)를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제 밤섬해적단은 자신이 그렇게 찾고 싶지 않았던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의미를 국가에 의해 강제로 말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만다.
작품은 이 너무나도 기묘한 증명의 순간을 통해 한국의 각종 문화 예술적 실험과 시도의 어떤 귀결을 드러내다. 한동안 유행했던 'K' 딱지 붙이기 마냥, 일종의 키치(kitsch)를 지향했던 밤섬해적단은 한국이라는 공간적/시대적 조건 아래 결국 K-치(K-itsch)가 되고 만다. 전작 <논픽션 다이어리>에서 유감 없이 발휘 했던 파운드 푸티지의 편집은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밤섬해적단의 음악 스타일에 맞춰 스타일리쉬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맥락이 없어보이는 단락들을 효과적으로 이으며 맥락을 재구성하는 구성력도 여전하다. 후반 작업이 완료되어 영화제에서 공개될 순간이 기다려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