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제 <특별시민> 단평.

바둑돌이 너무 많다.

by 성상민

박인제는 데뷔작 <모비딕>에 이어 또 거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모비딕>이 아쉬운 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80년대 말-90년대 초라는 미묘한 시대상을 꽤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엮어낸 작품이긴 했죠.


<모비딕>이 정보기관의 사찰이 주제였다면, <특별시민>은 정치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는 (대체 대표색이 빨간지 파란지 모를) 새자유당 소속 변종구 시장(최민식)을 중심으로 쉼없이 흐르는 한국 정치의 다단함을 그리는 거죠. 단순히 가상의 서울시장 선거를 다룰 것만 같았던 작품은 의외로 야심이 큽니다. 이미지 정치의 민낯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검은 음모가 오가는 정치의 추악함도 보여주고 싶고, 다시 그 판에서 언론이 어떤 위치에 서있나도 말하고 싶고, 오랜 시간 동안 정치판에 뛰어든 노련한 정치가의 두 얼굴과 젊은 패기 하나만 믿고 정치판에 뛰어들다 혼탁함에 혼돈을 느끼는 모습을 같이 보여주고 싶고, 여야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고, 정치인의 비도덕도 말하고 싶고…


말하고 싶은게 너무 많은 영화입니다. 130분이라는 꽤 긴 상영시간도 턱없이 부족하죠. 물론 정치판이라는 것이 그저 국회의원만 가지고 흐르는게 아니니 꽤 여러 정황도 많이 깔고, '플레이어'도 여럿이 있어야만 할겁니다. 여당, 야당, 중진, 신인, 청년, 중장년, 남성, 여성, 후보 단일화, 언론, 부패, 정치공학, 언론플레이 등등- <특별시민>이 깔아둔 포석은 무척이나 많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 수많은 정치물이 있어지만, 이렇게 정황이 풍부한 작품은 적었죠.


허나 바둑돌이 많은게 전부는 아니죠. <특별시민>의 문제는 바둑돌을 많이 쌓아놓은 이후부터 발생합니다. 정치의 다양한 지층을 보여준다고 깔은 인물과 사건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물론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확한 상을 안 보여줍니다. 누군가는 그 흐릿한 상 자체를 정치를 한 쪽으로만 재단할 수 없음을 말한다며 호평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입체적'이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습니다. 그냥 정치에 대해서 막연히 가지고 있는 상에 리얼리티를 주려다 실패한 느낌이에요.


게다가 중반부 이후로 배치된 사건들마저 가뜩이나 이어지지 못하는 이야기를 더욱 흐트려놓습니다. 내심 정치의 혼탁함과 그 안에서 '노련함'이라는 이름의 정치공학을 발휘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그리려 했던 시도라 생각은 되지만, 거의 모든 사건이 '해프닝'이상을 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작품이 정치인인 주인공들의 악행과 위선을 다루면서 카타르시스를 주긴 했지만, 최소한 그들이 내뱉는 말과 정책을 연계시키면서 작중의 '정치'를 구체화시켰습니다.


하지만 <특별시민>은 정치를 말한다면서 도리어 정치가 무엇인지를 계속 우회만 하고 있어요. 변종구와 함께하면서도 결국 대립하는 광고회사 출신으로 캠프에 섭외된 청년-여성 박경(심은경)이나 오랜 기간 변종구를 도왔지만 슬슬 야심을 꿈꾸는 중년-남성 심혁수(곽도원) 사이의 관계는 급작스레 '정의'와 '복수'의 문제로 전도됩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붙는 '다함께미래당'의 후보 양진주(라미란)과의 갈등도 얄팍할 따름이고, 자연스레 양진주 캠프의 홍보 담당인 임민선(류혜영)이나 정치부 기자 정제이(문소리)에 대한 파트는 더욱 얇습니다. 포석은 많지만, 쓰는 돌은 적습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에서 정치가 무엇인지를 이끌어내는게 아니라, 변종구의 행보와 '정치공학적' 처신에 작중의 주제나 서사가 휘둘릴 따름입니다. 그냥 변종구 캐릭터가 먼치킨이고, 양진주 캐릭터는 운이 없다고 밖에는 뭐라 말을 못하겠어요. 그리고 박경 캐릭터는…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지만 그냥 생략하고요.


정치가 도덕으로만 굴러가진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선택이라쳐도, 이건 <모비딕>의 음모론을 더욱 열화된 버젼으로 정치에서 재반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비딕>은 그래도 기자들을 주인공으로 놓으며 파헤치는 묘미를 줬다면, <특별시민>은 음모론의 키 자체가 주인공일 뿐이죠.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현실 정치에 대한 혐오와 밑도 끝도 없는 청년 정치와 도덕성에 대한 강조입니다. <하우스 오브 카드> 처럼 악독하지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처럼 명확한 지향을 제시하지도, <더 와이어>처럼 사회의 지층을 탐사하지도 못한채 그저 정치에 대한 관념을 재생산하는 것에 머무릅니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작중 인물들이 놓인 정치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시퀀스 배치가 있지만 작품 자체가 '척'만 하며 갈피를 잃는 바람에 빛을 잃습니다.


올해 초 개봉한 한재림의 <더 킹>이 그랬듯, 모호한 이야기를 확실하다는 듯이 포장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 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개봉을 앞둔 소위 '사회파' 한국 영화들이 전부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추신. 영화의 사이드 스토리로 남성 위주의 정치판을 넌지시 말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양진주를 제외하면 작중 모든 정치인은 남성이고, 변종구를 통해서는 이들이 지닌 여성 혐오적 정서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에요. 제시 이상으로 풀지도, 그렇다고 딱히 유의미하게 제시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잠시 나오고 매우 잠시 소모되다 사라질 뿐이에요. 이 역시 깔기만 하고 쓰지 않은 영화의 바둑돌이라 부르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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