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쿠퍼, 평범하지 않은 웨스턴 무비를 만들다
* 본 영화는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로 감상한 뒤 작성한 것이며, 그 이외의 편의 제공은 영화사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스콧 쿠퍼의 작품은 한국에서 개봉을 하지 않거나, 설령 개봉하더라도 극장에 얼마 걸리지 않고 직행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점에서 <몬태나>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비로소 (특정 극장이나, VOD를 뒤적거리지 않아도) 개봉일에 맞춰 근처 극장에서 용이하게 관람할 수 있는 최초의 스콧 쿠퍼가 연출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스콧 쿠퍼는 그간 어떤 작품들을 만들었는가? 본래는 배우로 활동했던 스콧 쿠퍼는 2009년작 <크레이지 하트>로 감독으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흡사 컨트리 뮤직판 <더 레슬러>라 불러도 위화감이 없을 법한 작품이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크레이지 하트>는 작품이 다루는 '컨트리 뮤직'의 특성상 미국 남부를 주무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크레이지 하트>의 주인공은 잘 나가던 컨트리 뮤지션이었지만 쇠락했듯이, 그가 머물고 돌아다니던 미국 남부 역시 이미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락한지 오래다. 2010년대 들어서 <쓰리 빌보드>나 <로스트 인 더스트> 같이 '쇠락한 미국 남부'라는 공간을 중요한 요소로 삼는 작품이 등장하는 것을 생각하면, 한 발 앞서서 '미국 남부'라는 공간의 근원적인 속서을 들여다 봤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이후로 만든 작품 역시 <크레이지 하트>에서 처음 선보였던 '공간'의 무게를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아웃 오브 더 퍼니스>(2013)는 이라크전에 참전한 주인공이 '평범한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꿈과 상관없이 현실의 무게와 흐름에 휩싸여 범죄자로 전락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조금은 아쉬웠던 <블랙 매스>(2015)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보스턴 갱들의 흥망을 그려내며 등장인물들이 점차 범죄에 물드는 과정을 차가운 톤으로 그려내었다. 그런 점에서 스콧 쿠퍼는 직접적으로 '서부 개척시기' 같은 과거를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현재를 바탕으로 범죄를 비롯하여 비정하고 쇠락하며 차가운 상황을 그려내는 '네오 느와르'에 최적화된 감독이라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랬던 그가 신작으로 본격적인 '서부극'(웨스턴 무비, western movie)를 만들었다. 그 작품이 바로 <몬태나>이다.
물론 스콧 쿠퍼는 결코 단순하게 '웨스턴'을 다루지 않는다. <몬태나>는 80년대 이후 하나의 경향이 된 '수정주의 웨스턴'의 자장 위에 서있다. 선악은 불분명하고, 영화의 웃음기는 최대한 제거되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맹렬히 꼬집는 동시에 성찰적인 자세를 드러냈던 것처럼, 수정주의 웨스턴에서 '서부'는 '개척자 정신'(frontier spirit)을 위한 광활한 초원이 아니다. 처절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공간이다. 또한 서부를 개척하고자 원주민을 몰아내는 동시에 학살하고, 그 와중에 미국에 흘러들어온 흑인 노예나 일확천금을 위해 달려든 하층민 등등 온갖 권력적인 구도와 갈등이 수도 없이 벌어졌던 유혈의 대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몬태나>는 어떠한 방식으로 '서부'의 역설을 드러내고 있을까. 그 말을 꺼내기에 앞서, <몬태나>의 원제를 뜯어볼 필요가 있다. <몬태나>는 한국 수입사가 다시 붙인 제목이다. 영화의 원제는 'Hostiles'로, (무장한) 적들을 의미한다. 계속 유행하는 '영어 발음 그대로 읽기' 식의 제목처럼 <하스타일>이 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다. 최소한 '몬태나'는 등장인물들이 목표로 삼은 도착 예정지라는 점에서 영화의 내용을 조금은 드러내고 있다. 왜 스콧 쿠퍼는 영화의 제목을 '적'으로 칭했을까. 왜냐면 영화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이들도,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과 폭력의 그림자 앞에서 최대한 똘똘 뭉쳐 움직이는 이들은 모두 '적대하는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매우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묘사하며 시작한다. '조셉 블로커'(크리스찬 베일)는 동료들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잃은 뒤로 수도 없이 많은 원주민을 죽이며 '대위'라는 높은 직급까지 올랐다. 그는 곧 퇴역을 앞두고 있고, 그러한 상황에서 마지막 임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 임무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매우 상충되는 것이다. 샤이엔 족(Chenyenye)의 수장으로써 필사적으로 미국과 싸우고, 그 와중에서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인 걸로 악명 높았던 '옐로우 호크' 추장(웨스 스투디)를 그가 원래 살던 고향 '몬태나 주'로 호송하라는 임무가 조셉에게 주어진 것이다. 약 10년 동안 미군 주둔지에 감금했지만, 암에 걸린데다가 마침 그를 풀어달라는 청원까지 들어오니 인심 쓰는 척하며 미국 대통령이 옐로우 호크를 풀어준 것이다.
무척이나 못 마땅한 임무지만 그래도 임무는 임무고, 게다가 미국 대통령이 지시한 임무이다. 조셉에게는 이렇다 할 거부권이 없이, 마지막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분대를 구성하고 뉴 멕시코 주에서 몬태나 주까지 1000마일, 약 1609km의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그 와중에 조셉은 코만치 족(Comanche)에게 습격당해 집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잃은 여인 '로잘리 퀘이크'(로자문드 파이크)를 만나 같이 움직인다. 계속되는 코만치 족의 습격, 점차 조여드는 적들의 압박. 과연 이들은 무사히 몬태나에 도착할 수 있을까. 설사 도착하더라도 이들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아마도 관객들은 영화의 제목과 시놉시스를 보고서 그러한 점들을 먼저 생각하리라. 하지만 <몬태나>는 결과나 액션 그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가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여정'의 '과정'이다.
'임무'라는 이름 아래 함께 행동하고 있지만, 조셉 일행은 이미 무척이나 분열되어 있다. 가장 직접적인 분열은 조셉이 이끄는 분대와 그들이 호송하는 옐로우 호크 일행과의 미묘한 관계이다. 지금은 비록 옐로우 호크의 샤이엔 족이 패배하여, 미군들에게 잡히고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지만 한 때는 치열하게 싸우고 서로를 학살하던 사이이다. 미국과 원주민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싸웠던, 그러나 동시에 미국에게 일방적이었던 '인디언 전쟁'('인디언'은 참으로 부적절한 표현이지만, 통상적으로 쓰이는 표기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앙금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인디언 보호구역 수용을 거부하고 미국 백인, 원주민 할 것 없이 모두 학살하는 코만치 족이 이들의 주된 적이다. 심지어 중간에 합류한 '로잘리'는 이들에게 소중한 가족들을 잃고, 힘겹게 일궈온 재산까지 모두 잃었다. <몬태나> 안에서 이들의 갈등은 현재 진행 중인 것이다.
심지어는 '조셉' 부대 내부도 분열되어 있다. '조셉'은 전형적인 미국 북부 출신 백인이자 군인이지만, 그 안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전부 제각각이다. 당장 '헨리' 상병(조나단 메이저스)는 흑인이고, 아직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도 얼떨떨한 신입 '필립' 이등병(티모시 샬라메)은 성인 '디잘딘'(DeJardin)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계 미국인이다. 게다가 부대 멤버 중 한 명은 원래 남북전쟁 다시 '남군' 출신이었다. 아직 미국의 사회-인종 구성이 서로 융합된 '용광로'(멜팅 팟, melting pot)냐, 섞인 듯 보이지만 따로노는 '샐러드 볼'(salad bowl)이냐가 나오지도 않은 1892년이 배경 시점이지만, 단일하다고 느껴졌던 미국 연방군조차도 결코 단일하지 않다. 모두가 제각기 입장이나 처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너무나도 위태위태한 조셉 일행은 생사를 넘나드는 여정을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나간다. 물론 그건 단순히 위기를 넘다보니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추악한 과거를 고백하는 과정이자, 증오를 넘어서 서로를 이해하는 극복의 순간이 있어야지만 이들은 비로소 함께 움직일 수 있다. <몬태나>는 그러기에 전투 장면은 무척이나 차갑게, 대신 드라마적인 순간들은 내밀하게 묘사한다. 전투 장면은 사실적이다 못해 냉정하다. 동료나 적군들이 총에 맞고 픽픽 쓰러지지만 이렇다 할 클로즈업이나 슬로우 모션 같이 죽음의 순간을 극대화하는 장면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전투에서 죽는 것은 죽는 것이오, 사는 것은 그저 살아남은 것이다. 이러한 극한이 일상화된 순간에서, 사람들은 좀 더 자신들의 과거와 내면에 솔직해진다. 이미 모두가 '인디언 전쟁' 또는 '남북전쟁' 등의 PTSD를 내재한 상황에서, 서로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는 길이야 말로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여기에 스콧 쿠퍼는 자신이 이전에 만들었던 <아웃 오브 더 퍼니스>나 <블랙 매스>에서 놓치지 않았던 '미국의 위선적인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는다. 암에 걸려 거의 다 죽을 위기가 되어 옐로우 호크를 풀어주는 것은 물론, 여정 중간에 만난 탈영 군인이나 다른 군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원주민들과의 '선의'를 말하는 듯 하지만 적대적이며 상대화하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는 미국의 모순을 드러낸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이자 클라이막스가 될 순간, 조셉 일행들이 맞닥뜨리는 적들의 정체는 미국의 경제적인 빈부격차를 상징화한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이렇게 <몬태나>는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상징적이며 미국 역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물론 <몬태나>가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셉 대위를 비롯해 로잘리 등의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백인이고, 그렇지 않은 인물들의 비중은 무척이나 낮거나 빠르게 퇴장하고 만다. 또한 미국의 원주민 학살과 원주민의 미국 백인 학살을 등치시켜 이야기하는 방식은 은연 중 미국이 먼저 원주민들을 향해 야욕과 폭력을 드러냈음을 순간적으로 잊게 만든다. 아무리 백인과 원주민이 서로 잘못을 저지르고, 화합을 말하자고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인과'는 결코 놓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몬태나>는 스콧 쿠퍼가 그간 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했던 작품들의 미덕을 그대로 가져가며, 수정주의 웨스턴을 자기 식대로 해석한 흥미로운 작품임을 부정할 수 없다. 크리스찬 베일, 로자문드 파이크, 웨스 스투디의 연기는 작품의 몰입을 더욱 극대화한다. 또한 이미 스콧 쿠퍼의 <아웃 오브 더 퍼니스>부터 모든 작품에 참여하고, <더 그레이>(2011)나 <스포트라이트>(2015)에 참여하며 차가우면서도 인물의 시선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타카야나기 마사노부의 촬영도 영화의 황량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몬태나>는 그렇게 '현대'의 시선으로 과거 '서부'가 지녔던 모순을 말하고, 다시 이를 넘어 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작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