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라는 이름의 욕망, 아카이브가 구현하는 ‘객관의 상상성’
급히 부산에 내려갈 일이 있어 서울역에 왔다, 시간이 좀 남아서 문화역서울284에서 <개성공단>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전시는 9월 2일까지 계속된다.)
전시 제목이 내용 그 자체이다. 그 말 이상의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 정말 그야말로 ‘개성공단’에 대한 거시적-미시적 시선을 총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시선들’의 디테일과 구성이다. 전시는 소개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박계리가 쓴 서문의 초두에는 ‘갑과 을의 노동관계, 자본주의적 욕망과 사회주의적 욕망의 공존’을 언급하지만, 결국 정말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말미의 ‘평화로웠던 내부, 외부의 긴장어린 시선’이다. 개성공단은 서로 다른 욕망이 병치되는 와중에 나름대로의 규칙을 만들며 잘 굴러갔던 공간인데, 북한을 바라보는 지난 9년 간의 시선이 공간을 해체했다- 는 식의 규정은 얼마나 개성공단에 얽히는 정치경제적 논점을 담지하는가.
몇 달 전, JTBC <썰전>에서는 개성공단에 대한 너무나 솔직한 이야기가 나왔다. 개성공단이 남한에 절실한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은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계속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는 와중에, 전국에서 각종 공장을 굴리는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박근혜 정부 시기 개성공단 폐쇄 결정으로 인한 정책 불신을 넘을 정도로 솔깃한 이야기였으리라. 그리고 전시의 어떤 부분에서는 차라리 <썰전>의 해당 방송분을 그대로 틀어도 적절하지 않나는 생각까지 들고 말았다.
전시는 주로 거시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부분을 ‘아카이브’로, 당시 개성공단에 일했던 남-북 노동자와 공장의 이야기를 비롯한 미시적인 접근은 개별작가들의 전시로 편성한다. 물론 <개성공단> 전시의 모든 아카이브가 거시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있지는 않다. 개성공단을 다룬 기사들을 스크랩부터 공단에 대한 각종 통계, 실제 개성공단 현장 모습을 다룬 사진까지 미시적인 지점도 담겨 있다. 그러나 결국 개성공단을 다뤘던 외부의 시선, 개성공단이 탄생하고 실제 입주를 결정하게 만든 정치경제적인 조건은 ‘아카이브’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아카이브와 창작물의 영역 분리는 어떤 효과를 만들까. 가장 큰 효과는 객관과 주관이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아카이브가 개성공단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적 파장에 치중할 때, 전시물은 개성공단 내부의 ‘관계’에 집중하고, 동시에 ‘평화’라는 표상에 초점을 기울인다.
김봉학프로덕션의 <아리 프로젝트>, 최원준의 <피륙의 결>은 개성공단 내부에서 실제 벌어지는 노동자와 노동자, 그리고 공장주라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조망한다. <아리 프로젝트>가 실제 남북 경협으로 생산된 운동화 ‘아리’에 얽힌 이야기에서 남측의 기술자본-경제자본과 북한의 노동인력이 만나 벌어진 효과에 치중한다면, <피륙의 결>은 가상의 남-북 노동자 관계를 구현해 과거를 재현하는 동시에 미래를 상상한다.
반면 이부록의 <로보다방>, 이예승의 <30분의 차이 그리고 그 어딘가에>, 임흥순의 <형제봉 가는 길> 등의 작품은 좀 더 직접적으로 남-북의 만남이 가지는 과정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평화의 문제를 정치경제의 논리와 대립을 짓거나 분리시키는 접근을 가한다. <로보다방>은 마치 ‘체 게바라 티셔츠’처럼, ‘굿즈’화된 동시에 ‘자본주의화’된 ‘북한식’ 표어들을 중심에 놓는다. (이 표어들은 실제로 개성공단에서 사용된 것들이다.) 개성공단 폐쇄와 함께 갈 길을 잃은 표어들은 개성공단을 상징하는 미싱 테이블 위에 놓이고, 다시 상품처럼 진열된다. 서로 다른 체제가 섞인 결과물이었던 표어는 전시 작업을 거치며 남한-자본주의 내부에서 북한-주체적 사회주의의 정서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내비춘다.
<30분의 차이 그리고 그 어딘가에>나 <형제봉 가는 길>은 보다 대립의 표상을 활용한다. <30분의 차이 그리고 그 어딘가에>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 위에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오브젝트를 설치하고, 다시 그 뒤에 프로젝터를 통해 영상을 맵핑하는 형태로 구축된 작품이다. 보통 숨겨져 있을 기계 장치의 오브젝트는 관람객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노출되어 있다. 영상이 덧씌워지는 스크린의 겉과 안을 모두 보이는 선택은 ‘개성공단’이 ‘공단’의 성격을 취하고 있지만, 그 공단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작동 방식은 ‘차갑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동시에 모두 전면에 드러나지만, 어떤 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는 개성공단의 모습을 그리는 시선의 차이도 함께 드러낸다.
임흥순의 <형제봉 가는 길>은 201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한 <려행>,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환생>과 같은 북한을 소재로 삼은 다큐-퍼포먼스 작업물의 연장선이다.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반 년이 지났던 2016년 11월 개성공단 기업 대표자들은 국회의사당에서 장례식을 컨셉으로 한 퍼포먼스 시위를 열었다. <형제봉 가는 길>은 당시 장례식 시위에서 사용된 장례용품을 가지고 북한산 형제봉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줌과 함께, 다른 영상 채널에서는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했던 이들의 모습과 인터뷰를 배치한다. 영상 안에서 개성공단의 공장주들은 평화를 위한 과정에서 함께했던 ‘플레이어’가 되고, 다시 정부의 공격적인 대북 정책에 희생당한 ‘피해자’가 된다. 영상 중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그날이 오면>이 게이코러스 지보이스의 합창으로 흐르는 부분은 그러한 인식관이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다.
분명 개성공단은 유례없는 하나의 남북 간 경제 합작이자, 실험이었다. 동시에 쉽게 꿈꾸기 어려웠던 관계나 시선을 만든 일이기도 했다. <개성공단> 전시에 걸린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이러한 대중적인 인식을 그대로 따른다. 작품들이 암묵적으로 처리하는 개성공단 외부의 ‘객관적’ 시선은 ‘아카이브’를 통해 분업화한다. (정말 그야말로 ‘공장’인 셈이다.)
하지만 ‘아카이브’는 정말로 객관적인가? 전시의 아카이브는 보수언론의 기사를 통해서는 개성공단에 대한 냉전 중심 시각의 한계를, 소위 ‘진보언론’의 기사들에서는 개성공단이 지닌 평화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개성공단 운영을 위해 작성된 각종 문서, 개성공단 ‘근로자’의 일상 영상-사진은 ‘화합’을 위한 과정과 그 단면을 비춘다. 허나 정작 ‘아카이브’는 개성공단이 지니고 있던 정치경제적 속성을 짚지 않는다. 정치적 지점은 신문기사에 수록된 ‘논란’으로 대체될 뿐,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 경협 사업이 지녔던 욕망은 애초에 들어설 자리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시선의 분업이 난항에 빠진 사이, 나머지 반쪽인 전시물들 역시 개성공단의 표피를 바라보는 이상을 넘기 어렵게 된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개성공단에 서린 욕망을 드러내긴 하지만, 결국 어떤 순간에는 개성공단 안에 ‘평화’의 속성이 있었다는 결말로 수렴되고 만다. 개성공단에 얽힌 지점들이 평화 이외에도 IMF 이후 남한 기업들의 출구 전략, 김대중-노무현 시기 남북 경협을 통한 분업화 구상, 미국의 대북 제재 등을 비롯한 지점들이 수두룩 했던 것을 생각하면, 중대해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간편하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의 반복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성공단>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올해 상반기 개최된 <더불어 평화>와 기묘한 공명을 한다. 쉽게 평화라는 호명으로 수렴되기 어려운 남-북 문제의 사안이, 평화라는 이상만 남은 채 증발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두 전시는 맥락을 같이한다. 동시에 2017년 논란이 된 아트선재센터의 <기업보고서 : 대우>와 함께 근래 한국 전시에서 자주 보이는 ‘아카이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어떤 점에서 전시 서문에서 언급한 ‘욕망의 공존’은, 정부의 욕망과 게으름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욱 나은 수사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