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은 상실되고, 획일화된 표상만 남다.
* 전시는 학고재 갤러리 1관에서 10월 21일까지 열린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 <크리틱-칼>의 태림 씨가 올린 포스트를 보고, 그리고 마침 짧은 마감 하나가 들어와 매주 토요일마다 있는 행사를 가기 전에 잠시 소격동에 들러 이종구의 전시를 봤다.
이종구의 이름을 모를 수는 있겠지만, 80-90년대를 함께한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작업을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쌀부대, 비료부대 같이 농촌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부대자루’에 아크릴 물감으로 농촌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저곡가 정책을 통해 도시의 물가를 낮추려 했던 장기적인 정책 속에서 자영농은 피폐해져갔고, WTO-우루과이 라운드 같은 개방 정책은 ‘기업이 아닌’ 개인의 농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민중미술 운동과 함께 했던 이종구의 작업은 캔버스 자체를 부대자루로 옮기는 일종의 ‘콜라주’를 시도하며 계속 변방으로 밀려가는 농촌 민중의 삶을 클로즈업했었다.
그가 2018년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 <광장_봄이 오다>에서도 자신이 잘 했던 작업의 유형이 무엇인질 아는 느낌이 돋보인다. 명암이 두드러진 인물 묘사와 채색, 전통적인 천캔버스에서 탈피한 시도. 그러나 슬프게도 이번 개인전의 작업들은 이전 이종구가 했던 작업들과 비슷한 양태를 지녀도, 이전에 지녔던 대상과 표현 사이의 관계성은 깨져있다. 도리어 그가 한때는 경계하고자 했던 즉물적인 시도가 위태한 작업을 더욱 곤란하게 만든다.
홍성담이 <세월오월>과 <더러운 잠>을 거치며 그가 지녔던 민중과 사회, 정세를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의 민중에 머물러 있음을 보였다면, 이종구의 이번 작업은 한층 더 심각한 후퇴를 보인다. 이번 개인전 속에서 민중의 적은 박근혜와 미국으로, 민중을 구원할 존재는 문재인과 북한이다. 이전의 작업은 미국을 비롯해 자본주의화된 농업이 직격으로 들어올 상황에서 농촌의 붕괴와, 위기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민중이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형상화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이러한 주체성이 사실상 실종된채, 어느 한 인물과 대상으로 수렴된다.
물론 그의 작업에서는 여전히 분노와 투쟁이 담겨 있다. 2016-2017년의 박근혜 퇴진 촛불을 소재로 삼은 <광장> 시리즈는 당시 배포되았던 주장 피켓과 광장에 나온 사람들, 그리고 ‘촛불’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광대해 보여도, 그 안의 맥락은 이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축소되어 있다. 박근혜를 퇴진하자는 ‘크지만’ 역설적으로 ‘일부의’ 주장만이 강조된채, 연작 역시 그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상을 넘지 못한다. 도리어 그가 포착한 이미지는 홍성담의 <더러운 잠>처럼 과거의 ‘정상가족’에 갇혀 있다는 슬픈 현실만 더욱 극대화할 뿐이다.
그리고 2018년 연이어 벌어진 남북정상회담을 소재로 한 <봄이 왔다> 연작으로 가면, 가뜩이나 붕괴 직전에 놓인 작품의 흐름은 스스로의 파괴로 다다른다. 이제 이 작품은 당대의 민중미술을 비롯한 현대의 미술이 끊임없이 경계한 ‘(기록) 사진’과 다를바 없는 작업이 된다. 그가 걸었던 삶을 생각하면, 남북이 다시 평화의 길을 걸어가려 하는 시도에 필시 열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념은 너무나도 쉽게 작품에 고스란히 담기며, 역설적으로 작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나마 이제는 미군기지가 지어진 평택 대추리 마을 사람들의 옛 사진에 미군기지 마크가 새겨진 액자를 씌워놓은 <대추리 사람들 - 캠프 험프리스> 연작이 체면치레를 한다.)
무엇이 이종구를 비롯해 홍성담, 임옥상 등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게 만드는가. 물론 ‘시대’와 ‘나이’로 그 한계를 쉽게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로만 한정 짓기에는 올해 초 서울시립미술관의 ‘더불어 평화’ 전에서 드러난 역행적 시도, ‘참여’와 ‘시대 반영’을 빙자해 벌어지는 맥락 상실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 정세를 깊게 들여다 봐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