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정상성’에 대한 또 다른 변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TV 다큐멘터리 연출자 시절까지 소급한) 작품들이 지니는 맥락을 몇 가지 단어로 정리한다고 치면, 결코 ‘가족’과 ‘정상성’이라는 용어를 빼긴 어려울 겁니다. 더 정확히는 ‘대안 가족’일 수도 있겠죠.
<어느 가족>은 그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자, 변주입니다. 이래저래 ‘생물학적’ 가족에서 방치된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점과 실화 바탕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아무도 모른다>가, 어딘가 모자라고 철 없지만- 구성원을 이해하는 아버지가 나오고 그 역할을 릴리 프랭키가 맡는다는 점에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흐름 위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작품은 원제인 ‘만비키’(万引き) 가족이라는 말처럼, ‘도둑질’이라는 공통점으로 형성되어 도둑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습니다. (여전히 일본에 남은 지역 차별인 ‘부라쿠민’에 대한 은유와 함께 있죠.) 그 도둑질은 단순히 가게의 물건을 훔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늙은 노인의 연금을 빼먹기도 하고, 때로는 ‘버려진’ (그러나 분명 친권은 남에게 있는) 타인을 ‘훔치기도’ 합니다.
영화는 크게 몇몇 인물의 행적과 연계지어 2부로 나뉘어 집니다. 전반부의 모습은 꽤나 낭만적인 동시에 서정적입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표현처럼, 일상 속 판타지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대안’ 또는 ‘가짜’ 가족의 삶을 중심에 놓습니다.
하지만 후반부터는 새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2부의 전면에 드러나는 관점은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시선이자, ‘매체’의 시선입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자료에 근거한 흐름이자, ‘법적’인 판단 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행로죠. 전반부에서 낭만적으로 처리되었던 사건들은 하나씩 ‘법적 저촉 여부’에 의거해 분석되는 동시에 해체됩니다. 애초에 자본도, 가족 구성원도 자의반 타의반 ‘도둑질’로 형성된 가족인 만큼 존립이 상당히 위태로움을 보이는 장치가 계속 드러나긴 합니다.
영화는 그렇게 공식과 비공식, 그리고 정상성에 대한 경계와 구분을 넘나듭니다. 우연한 사건으로 가족이 후천적으로 ‘재구성’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지만, 절정을 맞으며 결말으로 치닫는 시퀀스는 <아무도 모른다>나 근작이었던 <세번째 살인>과도 맡닿아 있는 거죠. <어느 가족>은 그간 다른 작품들로 드러낸 고레에다 특유의 시선과 포착을 집대성한 작품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수차례나 자기 자신이 스스로 변주한 이야기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결코 뻔하지 않은 맥락을 구성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물론 한계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일각에서 지적받았던 ‘사야카’(마츠오카 마유)가 유사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또 다른 ‘소수’를 만난다는 설정을 비롯해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은 분명 남성 캐릭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얇습니다. 하위 계급에 놓인 사람일수록 유흥업에 종사하는 비중이 큰 현실을 마냥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좀 더 다양한 맥락을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것은, 고레에다에 분명 한계가 있음에도 대중영화의 영역에서 고레에다 이상의 깊이나 사회에 대한 시선을 가진 감독이 일본 영화에 많지 않다는 겁니다. (그나마 저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유아사 마사아키를 더 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 역시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죠. 역사를 말하고, 스케일을 키운 영화들이 줄줄이 나오지만 이들 작품은 결코 맥락을 짚지 않습니다. 정동의 순간도, 심리에 대한 포착도 없이 그저 순간적인 자극에 머무르기에 바빠요.
<어느 가족>에는 장점도 단점도 모두 존재합니다. 어느 하나를 간과할 수는 없어요. 좀 더 다른 가족 이야기, 지금과는 다른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접근이 모두 필요하지만 갈수록 그 방법론은 옅어지는 듯 해요. 그런 점에서 고레에다가 한일 양국에서 모두 흥행하지만, 정작 양국에서 제작되는 작품 대다수의 색깔은 획일화되는 현상 역시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고민을 낳습니다. 마치 <어느 가족>이 일본 정부로부터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의 모습을 왜곡한다며 비난 받았듯, 한국 역시 어떤 맥락과 시선을 잊은채 그저 ‘다양성’의 흥행만 외치는 건 아닌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