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윤이 구축하고자 했던 세계관, 수면에 오르다
* 제 23회 부산국제영화제(2018) 비디오룸에서 감상하였음.
장형윤의 그간 애니메이션에 공통점이 있다면 가장 먼저 ‘의인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 말한다면 장형윤의 시선을 반쪽만 보는 것이죠. 그의 작품은 참 독특하게도 ‘의인화된 대상’이 쉽게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인간과의 조응을 통해 생성되는 드라마의 감각을 반복하며 제시하는 작업의 과정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주목받은 <아빠가 필요해>나 <무림일검의 사생활>, (지금도 인디스페이스에서 볼 수 있는) 인디스페이스 리더 필름, 첫 장편이었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까지 모두 말입니다.
장형윤의 작품 속 세계관과 인물들은 ‘의인화’ 자체에 놀라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인 인물이 놓인 어떤 부족함과 ‘의인화’된 대상이 벌이는 면모 사이에서 간극을 포착하고, 그 간극을 놓고 스토리 라인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마왕의 딸 이리샤>도 이 시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마왕의 딸 이리샤>는 일종의 ‘판타지 모험극’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요정 세계가 존재하고, 그 요정 세계에는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가는 ‘마왕’이라는 존재가 있고, 주인공 ‘이리샤’와 동료들은 친구의 혼을 가져간 마왕을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정말 흔한 판타지죠. 그런데 이 수도 없이 반복된 이야기가 장형윤 특유의 연출과 만나는 순간 꽤나 독특한 질감을 갖게 됩니다. 주인공은 ‘평범’해보이지만, 한국 고등학생으로써 지니는 속성이 구체화되어 드러나죠. 보통은 ‘약속’하듯이 지나가는 요정 세계에서 동료를 만나고, 마왕을 찾아 나서는 과정 역시 좀처럼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일단 어떤 식으로든 ‘평범한 여고생’ 주인공으로써 따져 묻고, 다시 자신의 욕망과 환경 사이에서 고민하며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기존의 장르 컨벤션이나 클리셰에 익숙한 사람이 보기엔 빨리 갈 길을 무척이나 돌아간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전의 작품에서도 장형윤은 장르의 관습적인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 상황이 ‘실제로’ 작중의 세계에 적용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양상을 현실적이면서도 나름대로의 상상을 담아 제시했었습니다. <마왕의 딸 이리샤>는 그러한 길을 좀 더 유려한 작화를 통해, 그리고 처음으로 여성인 주인공을 통해, 나름대로의 비밀을 지니고 있고- 다시 갑작스럽게 현실과 비현실(그리고 다시 그 안의 현실-비현실) 사이에서 오가며 벌어질 수 있는 흐름에 최대한 밀착해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장형윤이 그간 구현하고자 했던, 판타지이지만 마냥 현실과 멀리 떨어져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애니메이션이 추구할 수 있는 창조적인 연출도 배제하지 않는 세계관을 (영화진흥위원회 KAFA Next D 지원을 통해) 좀 더 완성도 있게 선보이게 된 하나의 귀결인 셈이기도 하죠. 장형윤이 그간 선보인 작품을 흥미롭게 지켜봤다면, 꽤나 이질적이지만 독특한 리듬의 판타지 애니메이션을 경험하고 싶다면 눈여겨 볼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입니다.
추신. 작중의 ‘마왕’은 기독교 세계관의 ‘루시퍼’ 보다는, 괴테의 시나 슈베르트의 곡으로 익숙한 <마왕>의 이미지에 다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