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풀잎들> 단평 : 프레임의 안과 밖의 관찰

홍상수 영화의 집약체인 동시에, 새로운 흐름의 시작

by 성상민

<북촌방향> 이후로 홍상수의 영화는 꾸준히 감독의 자발적인 의사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했다. 이전과 달리 이젠 더 이상 직접적인 정사의 장면도 묘사되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20대 이상만 보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클레어의 카메라> 이후로 홍상수는 더 이상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화로 만들어낸 길을 보라는 듯, 이젠 ‘청소년 관람불가’의 뒤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풀잎들>은 그러한 차원에서 홍상수가 꾸준히 작업한 영화들의 총체이자, 새로운 시작점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풀잎들>은 <그 후>의 후속이다. 김민희는 <그 후>의 주인공이자 출판사 직원이라는 설정인 ‘아름’으로 출연한다. 아름은 <그 후>에서도 쉽게 완성되지 않는 글을 쓰고,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그 후>에서는 수동적으로 타인에게 행동과 가치를 정의를 받게되는 입장이었다면 <풀잎들>에서 아름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사이를 계속 오간다는 점이다.

영화는 크게 낮과 밤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아름은 카페에 앉아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남녀 세 쌍의 대화를 듣는다. 자세한 연유는 몰라도 세 쌍 모두 영화판에 몸을 담고 있으며,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 놓여 온갖 감정이 고스란히 전면으로 드러난다. 아름은 이를 노트북으로 기록하며 자신이 생각한 코멘트를 남기고, 이는 나레이션으로 영화 상에 드러난다. 아름에게는 이들이 주고받는 발화가 삶의 덧없음과 고통스러움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중반부터 아름은 관음증처럼 남의 대화를 듣고 기록하는 대상에서, 영화의 전면으로 불려나와 ‘기록되는’ 대상이 된다. 자신이 타인들에게 속으로 내뱉은 말은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아름은 이를 견디지 못 해 하며 의도적으로 대화를 어그러지게 만든다.

관찰자로써 타인을 프레임 안에 위치시킬 때는 다신이 마음대로 생각한 서사와 인과 관계 안에서 논할 수가 있지만, 자신이 프레임의 밖에서 안으로 호출을 당하는 순간 아름은 혼란에 빠진다. 여전히 쉽게 관찰자의 위치를 놓지 못하지만, 이제 아름은 책임소재를 따져 묻는다. 막연한 상상에는 디테일이 채워지고, 그 디테일은 다시 정념으로 드러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딱 한 번 등장하는 순영(이유영)-재명(김명수) 사이의 대화는 앞서 나온 아름과 진호(신석호)-연주(안선영) 사이에서 나온 발화의 연장으로 기능한다. 성별이 반전되어 전개되는 이야기는 일종의 ‘미러링’이자, 상대방을 자신의 구도 안에 마음대로 집어넣고 전개하는 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인다. (어쩌면 이는 홍상수가 2016년 이후 자신에게 가해진 어떤 비난에 대한 자기 항변일지도 모를 것이다.)

낮이 지나고 밤이 되면서, 전반부에 나왔던 세 커플은 후반부가 되어 다시 카페에 등장한다. 아름의 예측했던 것과 달리 세 커플이 지닌 서사와 흐름은 꽤나 이질적인 면모로 전개되고 있다. 부질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삶 속의 관계가 (어떤 의도에서 든지) 이어지고, 쉽게 닿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프레임의 구도와 중첩된다. 아름은 이 모습이 불편하지만,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 이 불편함이 크게 부질 없었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자신은 꾸준히 관찰자가 되고 싶었지만, 사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던 사이에 자기는 이미 관찰 대상이 된지 오래였던 것이다. 애초에 거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름은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프레임의 안과 밖,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딜레마라는 소재는 이미 홍상수의 2010년대 작품에서 무척이나 활용되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그간의 작품들에서 전개했던 이야기들을 옴니버스에 가까운 대화의 연속 안에 농축시켰다. 관찰자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관찰당하는 대상 역시 마찬가지다. 확고불변할 것 같았던 이야기 또한 언제-어떻게-누구에게 기록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짐 자무쉬가 만든 <커피와 담배>처럼, 주인공들은 카페의 안과 밖을 오가며 커피와 담배와 함께 이를 자연스럽지만 의도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가볍고 통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조차도 누군가에겐 결코 가볍지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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