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와이즈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단평.

와이즈먼, 일상적인 모습들의 연속으로 구조를 관통하다

by 성상민


영화의 원제는 Ex Libris : The New York Public Library 이다. Ex Libris는 도서관이 소장한 책의 옆면이나 표지, 내지 등에 찍혀 있는 장서표를 의미한다. 제목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자면, 영화는 일종의 ‘뉴욕 공립 도서관’에 대한 ‘장서표’ 찍기를 시도하는 셈이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다양한 뉴욕 공립도서관-분관에서 진행하는 행사, 그 주변을 감싸는 행인과 공기들, 그리고 도서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온갖 졸류의 회의들 모두 좋든 싫든 뉴욕 공립도서관의 자산이라는 소리다.

한국에 개봉했던 <라 당스>나 <내셔널 갤러리>를 비롯해 이전부터 프레드릭 와이즈먼은 ‘공간’을 비추는 다큐멘터리를 찍어왔다. 더 정확히는 사람들로 인해 구축되어 있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공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와이즈먼은 표면적으로 해당 공간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부터, 이 공간의 구성원들이 공간의 일원으로서- 또는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일상적인 활동을 벌이는 지를 주목한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피상적으로 공간을 사고하는 이상으로 내부의 다양한 장소와 인물,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살펴야 한다. 와이즈먼의 작품이 유독 러닝타임이 길고, 하나의 행사-발언을 최소한의 편집을 통해 길게 담아내는 것은 이러한 지향이 담긴 선택지다. 동시에 매우 차가운 방식으로 공간의 작동 구조를 해체-재구축하는 길이기도 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역시 이러한 반복 작업을 수행하지만, 이전의 작품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공간의 외부적인 모습과 내부의 작동 구조를 보이는 것은 같지만, 공간을 감싸는 외부적인 환경에도 꽤나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작품 속에 담아낸다. 와이즈먼은 어떠한 의도를 담아 이러한 편집을 선보였는가.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작품이 뉴욕 공립도서관의 면모들을 어떻게 등장인물들의 발화와 공간으로 담고 있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작품의 초반부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뉴욕 공립도서관은 ‘철강왕’ 카네기의 재단 후원으로 설립되어 현재도 뉴욕시의 예산과 민간 예산이 조합된 ‘거버넌스’의 형태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도서관에 비교하면 무척이나 방대한 예산과 풍부한 이용자 프로그램을 구비했지만, 수많은 분관들과 장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순간들은 민-관이 조합된 도서관의 생존을 위해선 필요할지 몰라도, 도서관에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하기엔 애매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결정들이다. 와이즈먼은 주기적으로 도서관 운영과 직결된 회의와 운영 프로그램, 그리고 도서관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며 이 역설을 강조한다.

어떤 분관에서 강사는 칼 마르크스와 조지 피츠휴 사이의 노예제 입장 차이를 말하며 미국 경제 구조를 말하지만, 결말 직전에 등장하는 흑인 커뮤니티의 분관에선 미국에서 무척이나 높은 교과서 점유율을 자랑하는 출판사 ‘맥그로힐’(McGraw-Hill)의 지리 교과서에서는 미국의 흑인 노예들이 그저 ‘일을 하러 왔다’는 서술만으로 남은 것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자리에서는 최대한 다양한 이들이 도서관에서 함께할 것을 강조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운영 회의에서는 다수 이용자에게 원활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숙자의 출입을 제한할 것을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와이즈먼은 장면들 사이의 미묘한 불일치와 간극을 통해 뉴욕 공공도서관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뉴욕’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다.




이 간극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 중간중간 도서관 부근의 풍경을 비추는 모습들이다. 뉴욕 공립도서관의 다양한 분관들에서는 각각의 공간적 특성을 신경쓴 맞춤 프로그램이 진행되지만, 차츰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것은 이 분관들이 처한 상황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뉴욕 중심가에 놓여 있는가, 브롱크스 같은 흑인 거주 지역과 가까운가의 문제부터 분관을 찾는 사람들의 특성들, 분관 자체의 규모까지 모두가 제각각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성들은 각 분관이 자율성을 가짐을 드러내지만, 중간에 등장하는 ‘독지가의 기금으로 분관 시설 개설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말처럼 중앙의 예산 투여 없이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음을 보인다.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지만, 그 자율성이 실질적으로 변화를 낳기에는 사회적 장벽은 거대하다. 활발한 학술적 시도가 벌어지는 공간 밖의 풍경은 생각 이상으로 고요하거나 따로 놀고, 심지어는 내쫓을지를 고민하는 노숙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와이즈먼이 담아낸 쇼트와 그 쇼트를 이어붙이는 방식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양상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막판의 장면에서 영화는 크게 세 개의 시퀀스를 붙여 보여준다.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사료가 가득 담긴 숌버그 콜렉션의 내용 하나를 인용해 도서관위 어느 위원회에서 말하는 장면, (아마도 운영 후원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파티를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일하는 장면, 그리고 본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흑인 커뮤니티 부근의 어느 분관에서 일군의 흑인들이 모여서 흑인 사회 속 도서관을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는 묻는 장면이다. 서로 분절되어 있고, 시간-공간도 제각기 다르지만 200분의 시간 속에서 계속 리듬 있게 쌓은 구조의 감각은 이 세 개의 시퀀스로 사실상의 결론에 닿을 수 있게 돕는다. 와이즈먼이 꾸준히 했던 감각을 그대로 말이다.

한편 이 일상적이고도 묵직한 쇼트의 몽타주는 한국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고민할 지점을 던진다. 조금씩 한국에서도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아카이브-파운드 푸티지 다큐멘터리, 어느 특정 공간을 다뤄낸 다큐멘터리. 모든 작품이 와이즈먼 처럼 될 필요는 없지만, 얼마나 많은 작품이 공간의 특성과 구조,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있는 동시대적 역사와 구성원을 치밀하게 짚어내고 있는가. 단순히 ‘담았다’를 넘어 적확하게 다가가는 촬영과 편집의 중요성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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