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국 영화는 지금 한반도를 몰아치는 한파처럼 얼어붙었다. 상업영화, 독립-예술영화 할 것 없이 모두 전반적인 관객 흐름은 하향세를 기록했다.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거둔 작품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신과 함께> 시리즈는 여러 논란이 있음에도 ‘쌍천만’이라는 흥행 성적을 거뒀고, <어벤져스 : 인피니트 워> 같은 블록버스터 역시 강력한 흥행의 힘을 보였다. 그러나 중간이 사라졌다. 추석 시즌을 노리고 개봉한 한국 영화가 <안시성> 정도만 간신히 흥행에서 성과를 보였을 뿐, 모두 쓴맛을 보았던 것은 한국 영화 시장이 어떤 식으로든 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그 변화가 마냥 좋은 길로 갈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한국이 기어코 <보헤미안 랩소디>의 영국 흥행 성적을 넘긴 것, 올해 초의 <소공녀>에서 시작해 <허스토리>, <박화영>, <미쓰백>에 이르기 까지 ‘여성 서사 영화를 관람하자’는 열풍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뻔한 작품, 지나치게 고정 관념을 답습하는 작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분명 발생하고 있으나 얼마나 기존에 짜인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영화를 관람하는 개인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있는가. 그 갈림길을 각자 어떻게 인식하냐에 따라서, 한국 영화의 앞날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 2018년 한국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경향에 대한 글은 <레디앙>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 작품 순서는 제목의 가나다순입니다.
장윤미, <공사의 희로애락>
단편 데뷔작이었던 <군대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제외하면, 장윤미의 이후 모든 작업은 감독 자신의 기억과 주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과 <늙은 연꽃>에서 감독은 자신과 어머니 또는 할머니, 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놓인 일상과 다시 그 일상을 이루는 풍경과의 관계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서 가족-구성원의 존재를 사고했다. <콘크리트의 불안>은 스카이아파트의 철거 직전의 모습과 철거 당시의 상황을 포착하며 감독 자신의 어린 시절, 아파트에서 지냈던 경험을 한 층의 레이어를 올려 결합하며 ‘공간’과 그 공간의 사라짐을 고민하는 과도기적 경향의 작품이었다. <공사의 희로애락>은 <콘크리트의 불안>에서 감지되었던 자신이 겪었던 사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시선의 행방을 밖으로 본격적으로 확장하는 작품이다. 일평생 거제도 조선소의 하청 노동자로 일을 헀던 아버지는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자신의 ‘노동’에서 찾는다. 동시에 자신의 노동이 개입되어 쌓아 올린 전국 각지의 ‘모뉴먼트’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장윤미는 이전에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은 두 단편들에서 그러하였던 것처럼 자신의 아버지에게 접근을 시도하지만, 접근의 방식은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장윤미는 아버지의 삶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식하기 위해 아버지를 구성하는 속성들을 바라보고, 다시 그 속성들이 구축된 거제를 비롯한 공간을 탐사한다. 그 안에서 개발 시대의 한 가운데를 거쳤던 아버지의 삶이, 당시의 논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직접적으로 날선 구호를 외치지는 않아도, 에세이적인 접근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노동 관념을 드러내는 문제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박소현, <구르는 돌처럼>
전작이자 장편 데뷔작이었던 <야근 대신 뜨개질>에서 박소현은 일과 일이 아닌 것이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과 일상을 강조했었다. <구르는 돌처럼>은 이에 대한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감독이 나름대로 대안과 대안을 찾아내는 과정을 탐사한 하나의 기록이다. 다큐의 주인공 남정호는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배우며 무용가로써의 명성을 쌓아 올리고, 중년이 되어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무용원 교수로 강단에 섰다. 그러나 작품은 남정호가 얼마나 무용가이자 교수로서 지위를 획득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 명성과 지위, 이외 ‘남정호’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남정호 자신이 얼마나 고민하고 벗어나려 노력했는지에 시선을 기울인다. 그 탈선의 과정이 1988년에는 개인이 중심이 된 퍼포먼스로 가시화되었다면, 2017년 ‘교수’라는 지위를 내려놓는 시점에서는 주체를 더욱 외부로 확장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구르는 돌처럼>은 표면상으로는 남정호와 하자센터 아이들이 공동으로 즉흥 무용 공연을 준비하는 연대기이지만, 동시에 무용 퍼포먼스가 얼마나 행위자의 주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증명과도 같다. ‘댄스 무비’인 동시에, 댄스가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살피는 ‘에세이 무비’의 만남을 통해 <야근 대신 뜨개질>에서 채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질문에 비로소 다가가는 실험인 셈이다.
박경근, <군대>
박경근은 <청계천 메들리>와 <철의 꿈>을 통하여 ‘철’이라는 객체가 제조되고, 다시 여러 과정을 거치며 형태가 변형되는 모습을 조망했었다.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에 ‘씨네포엠’이라는 장르명을 붙였던 것은 마치 시에서 비유와 상징을 시도하듯, 철이 유통 과정 속에서 여러 형태로 바뀌는 모습이 단순히 철물의 체조 단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이 이리저리 이동하는 과정 안에 많은 것들이 함의되어 있음을 넌지시 선언하는 의미였다. <군대>는 이 비유를 통한 성찰을 ‘군대’라는 존재로 확장시키는 작업이다. 오랜 사전 준비 끝에 박경근은 군대 내부 촬영 허가를 받는 것에 성공했고, 영화는 청년 ‘우철’이 군에 입대하여 전역하는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다. <군대>는 명시적으로 군대를 비판하지 않는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부조리적인 순간을 애써 포착하여 고발하지도 않는다. 대신 군대에서 발생하는 집단 행동의 순간, 6.25를 기념하여 펼치는 리인액트먼트의 장면, 의장대에 배치된 우철이 대외 행사를 위해 여러 의장 기술을 배우는 모습을 긴 호흡으로 조망하며 한국 군대가 지닌 기이한 순간을 넌지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위에 감독이 경험한 군대의 순간을 말하는 내레이션이 더해지며, 작품은 최종적으로 군대라는 하나의 공간이 한국의 남성들에게 세대를 넘어 어떤 존재로 다가오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묻는다. 노골적으로 폭력의 순간을 드러내지 않고도 군대라는 공간의 이중성과 허구를 고발하는, 가장 강력한 고발이 탄생한 것이다.
문창현, <기프실>
문창현은 오랜 시간 같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박배일, 김주미와 함께 다큐멘터리 공동체 ‘오지필름’의 멤버로써 활동했다.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연출에 참여한 작품을 만들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문창현의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인 <기프실>은 현재는 영주댐 건설로 수몰된 경상북도 영주의 기프실 마을을 주된 공간으로 삼는다. <모래가 흐르는 강>을 비롯해 4대강 문제를 다룬 대다수의 작품이 이권을 이유로 환경 파괴를 강행하는 정부와 기업, 그에 반대하는 시민을 대립하는 구도로 극을 풀어나갔지만 <기프실>의 분위기는 비슷한 주제를 잡은 다른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길을 걸어나간다. 명시적인 투쟁과 정형화된 회고 대신 개발을 앞두고 오랫동안 살아오던 터전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마을의 면모에 문창현은 초점을 맞춘다.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무겁게 다가오는 소식이지만, 그 정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마을은 그저 오순도순한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마을 이주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마을에서 느꼈던 감정을 서서히 풀어내기 시작하고, 조금씩 진행되는 댐 개발 앞에서는 이미 고령화된 마을이 처한 역학적인 딜레마가 드러난다. 댐 건설이 확정되어 끝내 물속으로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문창현은 손쉬운 이분법을 택하는 대신, 건설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마을이라는 공동체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양상을 담아내는 것이 성공했다. 그 안에서는 자연스레 여성-노인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상흔이, 그리고 매우 형식적인 차원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는 행정의 문제가 드러난다. 좀 더 복합적인 면모로 도시와 마을, 철거와 이주의 문제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는 하나의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다.
강상우, <김군>
강상우의 단편 <클린 미>는 강상우가 하나의 사건과 일상을 어떤 식으로 주목하는지를 스스로 선언한 작품이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법무보호복지공단에서 청소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극으로 형상화한 단편은 청소라는 행위가 그저 사소해 보일지라도, 어떠한 공간과 시간과 인물에 놓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묵묵하게 성찰했다. <김군>은 이를 5.18이라는 중대한 사건에 다시 한 번 적용한다. <김군>의 서두이자 한 축에는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이 있다. 그는 5.18 당시 촬영된 기록 사진에 북한군 주요 인사와 ‘이목구비가 닮았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이들을 북한군이라 주장한다. 강상우는 그의 주장을 역으로 뒤집어, 공식화된 기록에서 조망되지 않은 개인들의 이야기를 호명하려 시도한다. 마치 양주연의 <옥상자국>이나 김태일의 <오월愛>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의 기념비적 존재가 된 사건에서 쉽게 가려지는 미시적인 기록을 찾아내려 분투한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고, 때로는 무척이나 위태한 순간에도 놓인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버전의 결말부는 ‘김군’이라는 확정되지 않은 다중의 존재에 쉽게 확정적인 인격을 부여하려는 욕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상우는 인터넷의 한 구석을 지배하는 ‘팩트주의’가 어떤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지를 이용하여 조금씩 박제되는 역사의 기록에 다시 생동감을 부여하려 시도한 흔적은 분명 인상적이다. ‘팩트’는 확고부동한 진실이 아니라,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쉽게 확정될 수 없는 것이기에.
박영임, <기억할 만한 지나침>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에서 박영임은 마을 사람들 6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물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쉽지 않은 질문에 조금씩 자신이 살면서 느껴왔던 이미지를, 그리고 일상의 편린들에 근간하여 자신을 설명한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에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서술하기 위해서 거쳐온 사고의 행로를 스크린 위에 서사극의 형태로 구현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시인인 ‘김’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시는 뜻대로 써지지 않고, 인간 관계는 모조리 파탄나 있다.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상황도 갖추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서 김은 로드킬을 당한 동물을 비롯해 자신이 주변에서 발견한 상처입은 자를 도우려 하지만, 자신조차 제 갈 길을 가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조차도 어려움을 맞이한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기형도의 동명의 시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작품이다. 물론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한다고 하여 ‘나’가 처한 상황도, ‘나’의 존재도 상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이 물음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의미를 발견했던 것처럼,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김’ 역시 계속 악화되어 가는 순간들의 연속에서 겨우 자신이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인식한다. 그 삶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치는 것으로 족할 존재일지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의 순간에서 그 지나침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게 된다.
트래비스 윌커슨, <누가 총을 쐈는지 궁금해?>
감독의 증조부 ‘브랜치’는 1946년 자신이 운영하던 식료품점을 방문한 흑인 ‘빌 스팬’을 총으로 살해했다. 곧바로 그는 1급 살인 혐의로 고소당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기소 자체가 취소되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죽을 때까지 평온하게 살다 세상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누구도 진지하게 살인자는 물론 살해당한 사람에 대해서도 기억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로지 사건 당시 지역 신문에 나온 기사와 관공서에 보관된 사망확인서,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서 8mm 홈 무비로 남은 브랜치의 모습이다. 트래비스 윌커슨은 망실된 기록들에서 조금씩 실마리를 발견하여 끝내 당대의 현실에, 그리고 공간을 감싸는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살던 공간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현재에도 과거를 감싸던 사회의 논리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음습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차별과 혐오의 정서는 공간과 사회를 감싸고, 다시 개인의 영역에 침범한다. 영화는 당시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던 역사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행로로 기록을 시도한다. 그 과정 안에서 사적인 기록은 그저 사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적인 기록 역시 확고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공적 기록과 사적 기록의 흐릿한 경계에서 감독은 시대의 정서를 포착하며, 미국 인종 차별의 역사와 의미를 고민한다. 쉽게 망각하며 미화하는 대신, 지금은 짧은 기록으로만 남은 명징한 역사의 흔적을 담담하게 호명하며 각인하기를 시도한다.
프레드릭 와이즈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다큐는 곧 ‘공간’과 ‘시스템’이다. 매 작품마다 특정한 하나의 공간을 고르고, 그 공간을 구성하는 공간과 사물- 그리고 그들 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공간이 작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을 파악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또한 이를 시도하는 작품이지만, 작품의 톤은 이전 작품이었던 <라 당스>나 <내셔널 갤러리>와 비슷해보이면서도 사뭇 다르다. 철저하게 공간 내부에 초점을 맞추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뉴욕공립도서관이 지닌 무수한 분관들의 외부 풍경에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그리고 풍경에 비중을 할애한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징하게 드러난다. 무척이나 복잡한, 그러나 끊임없이 생존을 고뇌해야 하는 거대한 행정 조직의 다양한 상들을 와이즈먼은 풍경을 하나의 중대한 구성 요소로 삽입하면서 공간의 시스템을 짚어낸 것이다. 뉴욕의 학문적 자원이 집결하는 장이지만, 정작 흑인 거주지의 분관에서는 공간의 존재 의미를 모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바쁘다. 최대한 많은 이를 위한 장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지만, 도서관의 장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뉴욕공립도서관이 어떠한 질서 위에 근간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선언한다. 계속 와이즈먼이 펼쳐오던 작업의 맥락들처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현재의 공공성이 지닌 한계와 함께 새로운 공공성의 저변을 모색하는 작품이 된다.
아녜스 바르다 / JR,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장 뤽 고다르와 함께 누벨바그 영화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아녜스 바르다는 후배 사진 작가인 JR과 함께 오래간만의 신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발표했다.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바르다가 사랑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말았지만, 영화의 원제를 그대로 직역하면 ‘얼굴들, 장소들’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그 말대로 영화는 바르다와 JR이 프랑스의 다양한 장소들을 방문하고,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하는 퍼포먼스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존재들의 얼굴은 확대 인쇄를 통해 마을의 거대한 ‘모뉴먼트’가 되고, 그 과정을 통해 존재들과 존재들의 이미지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마치 누벨바그가 언어와 이미지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려고 했던 것처럼, 바르다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타인과의 협업을 통해 ‘누벨바그’의 정신이 2010년대 어떻게 새롭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흐려진 경계에서, 개인의 주체성이 점차 사라지는 현대에서 바르다와 JR의 ‘퍼포먼스’는 영화의 새로운 주체를 고민하는 하나의 실험이자 도전이다.
김설해 / 정종민 / 조영은, <사수>
<사수>는 작품 초반부에서부터 쉽지 않은 주제를 던진다. 2011년부터 투쟁에 돌입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유성기업 문제에서 충청북도 영동군에 위치한 공장에서 근무하던 노동자 한광호는 사측의 폭력적인 진압 이후 심리적 후유증 등으로 인해 2016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동지의 죽음에 많은 이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매우 씁쓸하게도 동지의 비극적인 죽음은 투쟁의 향방을 바꿔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투쟁을 앞둔 노동자라면, 이 갈림길의 순간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사수>는 매해, 매순간 고통과 어려움에 놓여야 했던 유성기업 투쟁 노동자들의 행로를 통해 2010년대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 어떠한 상황에 부닥쳤는지를 내비친다.
김수목의 <니가 필요해>가 노동조합 활동에 서린 일상의 편린과 감정의 충돌을 진솔하게 드러내었듯, <사수>를 제작한 청주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의 사람들도 오랜 시간 투쟁을 이어나간 노동자들의 일상 속에서 노동 운동의 동력과 현실을 파악한다. 습관처럼 외치는 결연한 구호와 다르게,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은 다른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사측의 가공할 폭력 속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버텨낼 따름이다. 작품은 투쟁과 일상의 순간을 교차하며 노동의 문제가 결코 특별하거나, 일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노동의 문제가 더욱 첨예화되는 상황에서, 쉽게 악마화되거나 특별한 존재로 노조와 노동 운동을 마주하는 대신 운동과 안과 밖을 감싸는 상호 교차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며 노동을 이루는 구성원이 누구인지를 서서히 호명한다. 그 호명의 과정을 통하여, 작품은 비로소 현 시대 노동이 지니는 의미를 각인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
1950-60년대 미국의 정서는 여러모로 이질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이 대공황을 낳았던 것과 달리, 2차 세계대전의 결말은 미국이 패권 국가로 결정적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질적인 측면이 충족된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대중문화가 성장하는 시기였지만, 다시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정서가 감도는 판국에서 냉전 구도가 형성되는 자리기도 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러한 모순적인 시기에 발표되었던 SF 영화와 당대의 서브컬쳐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변용한다. 마치 감독의 전작이었던 <퍼시픽 림>이나 <크림슨 피크>가 감독 자신이 열광하는 서브컬쳐에 기반을 두었던 것처럼, <셰이프 오브 워터> 역시 이들 작품의 연장선에 놓인다. 두 명의 주인공이 서로의 종족을 넘어 사랑한다는 플롯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플롯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된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들은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쉽게 대상화되고 정체를 파악할 수 없기에 기피해야 할 존재로 여겼던 이종족과 성소수자, 여성과 ‘공산주의자’ 같은 인물들이 작품의 전면에 서고, 쉽게 정의의 존재로 여겼던 정부의 요원들은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변용을 통해 기예르모 델 토로는 자신이 열광했던 시대의 정서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그저 시대에 갇히는 것을 넘어 새롭게 독해하며 현재와 연결하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마틴 맥도나, <쓰리 빌보드>
<킬러들의 도시>와 <세븐 사이코패스>로 인상적인 스릴러와 누아르의 감각을 드러내었던 마틴 맥도나는 <쓰리 빌보드>를 통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두 편의 전작은 비현실적인 설정과 사건들의 연속이었지만, 기묘하게도 작품들은 ‘하이 컨셉’에 스스로 몸을 맡겨 취하는 대신 그 배경과 환경이 실제 현실에 구현될 때 어떠한 양상으로 서로 맞물리며 극이 고조될 수 있는지를 드러냈었다. <쓰리 빌보드>는 그 절정의 순간을 미국 남부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연쇄적인 비극과 사건의 연속에서 포착한다. 무참하게 딸을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레드넥 여성은 잔인할 정도로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원을 이용하고, 그렇게 활용된 자원들은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을 헤집어 놓는다. 감독은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통쾌한 복수를 기대한 이들을 위해 몇몇 장치를 마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장치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의 실체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드러낼 따름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후, 급작스럽게 미국 남부와 러스트 벨트를 바라보려는 시선이 증가한 상황에서 <쓰리 빌보드>는 사건과 장소의 중심에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한 걸음 멀리한 채, 사건이 발생하게 된 구조를 직시하려 노력한다. 마치 윌리엄 포크너가 집필한 남부 무대의 고딕 소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결코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구조 아래 허우적대는 개인의 모습을 관조하면서.
정재은, <아파트 생태계>
정재은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는 지금 다시 보아도 결코 낡은 기미를 주지 않는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감각을 주는 작품을 채우는 인물과 사건 만큼이나 돋보였던 요소는 ‘장소’들이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주된 배경인 인천을 형식적인 무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권으로 분류되지만 결코 서울이 아니며 묘하게 시대에 붕뜬 인천의 주소를 영화와 적절히 융합시키며 공간을 바라보았다. <말하는 건축가>와 <말하는 건축 시티 : 홀>은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감지되었던 공간의 감각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드러냈다. <아파트 생태계>는 <말하는 건축 시티 : 홀> 이후로 잠시 길었던 공백기를 마치고 다시 복귀했던 작품이자, 정재은의 건축 3부작에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새로운 서두를 만드는 다큐멘터리이다.
한 명의 건축가, 하나의 장소에 초점을 맞췄던 건축 3부작의 전작과 달리 <아파트 생태계>는 ‘생태계’라는 말대로 1970-1980년대 서울에 집중적으로 건축되며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주거공간의 형태가 된 ‘아파트’를 사고한다. 한국의 건물들은 대개 쉽게 지어져 쉽게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가까스로 형체를 유지한 건물들에 다가가 이들이 지닌 역사와 형태를 담아낸다. 그러한 기록의 연속성 안에서 ‘아파트’는 회색빛 콘크리트에 감싸여 곧게 뻗은 판상형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넘어, 한국의 격동하는 근현대사에서 사회와 함께 요동쳤던 주거의 변화상이 기록된 아카이브가 된다. 비록 그 시작은 정권의 요구였을지라도, 쉽게 훼손하거나 지울 수 없는 ‘생태계’가 되었음을 명징하게 외치는 것이다.
임철민, <야광>
근래 풍경과 공간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급증하는 마당에서, 임철민의 <야광>은 공간과 공간의 맥락을 독해하는 새로운 측면을 제시한다. 1인 작업으로 제작된 <빙빙>과 <프리즈마>에서 임철민은 개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개인이 머물고 스쳐 지나가는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우연의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공간을 포착하여 이를 이어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야광>은 이들 작업의 연장에 놓인 동시에, 좀 더 복합적인 맥락에서 풍경과 공간을 바라본다. 동시에 사람들이 인식하는 풍경과 공간에 대한 인식과 기억이 얼마나 엄밀하고, 각자가 지닌 역사에 따라 어떠한 양상으로 달라지는지를 짚어낸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제시되는 일련의 풍경과 공간들은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이들에게는 혼란과 모호함을 주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작중에 등장하는 사건과 공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혼란을 일으킨다. 영상 편집 기술과 각종 VR-3D 구현 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상황에서, ‘가짜’는 얼마나 거짓된 것이며 ‘진짜’는 과연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가. 분명 존재했으며 여전히 존재하는 LGBT의 역사와 문화가 손쉽게 기억과 공간의 풍화로 사라지는 사이, 임철민은 서로마다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공간의 맥락을 직접적인 지문으로 푸는 대신 함께 모이고 공유할 수 있는 계기와 장의 구축을 시도한다. 진짜와 가짜를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하는 대신, 이리저리 섞이고 이어지는 그룹과 공간의 맥락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형태로 말이다.
김응수, <오, 사랑> <초현실>
김응수의 영화는 2000년대 후반에 개봉했던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끝으로 더 이상 극장에 걸리지 못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김응수의 작품은 더욱 감독 자신이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에 깊게 매진하는 형태로 나아간다. 최근작 <옥주기행>과 <우경>이 각각 ‘진도’와 시각장애인 안마사 ‘우경’에 초점을 맞추며 이들이 품고 있는 심리와 일상에서 드러나는 역사를 철저하게 기록하고 제시하며 관객에게 초월의 순간을 선사했듯 말이다. <오, 사랑>과 <초현실>은 이성의 논리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감정을 세월호 참사 이후와 연관된 두 인물을 통해 드러낸다.
<오, 사랑>의 주인공인 중년 남성은 세월호 참사와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지만, 참사의 소식에 깊은 비통함을 느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일상적인 추모를 실현하려 노력한다. 세월호에 탑승해 사망한 아들의 영혼 입학식 이후 MT에 따라간 유가족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초현실>은 보다 직접적으로 아버지가 느꼈을 심리를 조망하며, ‘영혼’이라는 존재와 인식에 담긴 감정의 향방을 표출한다. 관객은 결코 이 두 인물의 행보와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감독 역시 굳이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진득한 자세로 행보를 카메라로 담고, 그에 대한 약간의 가이드라인을 스크린 속 가상의 공간에 그을 뿐이다. <다이빙벨>이나 <그날, 바다>를 비롯해 세월호 문제를 다룬 다수의 작품이 어떻게든 사고의 공백을 채우려 발을 동동 굴렸던 것과 달리,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공백을 두 편의 영화는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기에 두 작품은 더욱 깊고, 묵직하게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야기를 명징하게 바라보게 된다.
장우진, <춘천, 춘천>
한국은 무척이나 수도권-비수도권의 분리와 격차가 벌어진 국가이지만, 강원도나 충청도의 일부 도시를 비롯해 수도권과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공간일수록 더욱 기묘한 분리와 조응이 진행된다. 누군가에겐 빠르게 벗어나길 원하는 공간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잠시나마 자신이 살고 있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달하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각각 목적과 이유는 달라도, 도피와 탈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일치하거나 공명한다. <춘천, 춘천>은 강원도 춘천이라는 ‘변방’이자 ‘수도권과 인접해 있는’ 장소의 특성을 풍경의 이미지와 접합을 시도하며 서로 다르지만, 결국 맞닿아 있는 심리의 행방을 묘사하는 극영화이다.
크게 2부로 구성된 영화는 전반부에서는 춘천을 벗어나 서울로 가지 못한 청년의 갈 곳 잃은 일상을, 후반부에서는 서울을 잠시 떠나 춘천에서 사적이고도 은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중년 커플의 일탈을 그린다. 둘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같은 공간에 머무른다. 그리고 모두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부유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한 배를 타고 있다. 꾸준히 강원도를 기반으로 창작을 펼쳤던 장우진은 이미지와 인물에 따라 서로 다른 맥락을 형성하는 공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담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2부에서 등장한, 기묘한 리듬으로 밝기가 달라지는 빛의 흐름을 포착해 작품에 활용한 롱테이크 장면은 작품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인 동시에, 작품을 본 이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시퀀스로 남게 될 것이다.
우에다 신이치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는 오래전부터 심심치 않게 존재했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하는 행위는 영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결국 무수한 갈등과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에다 신이치로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야기에 장르 영화의 문법을 결합해내고, 다시 촬영적인 실험을 붙여내며 독특한 감각을 구현한다. 극중극으로 제작된 좀비 영화 <원 컷 오브 더 데드>와 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메이킹 필름’적 성격을 지닌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2부 구성으로 연출된 영화는 영화의 탄생이 다양한 맥락과 상황, 그리고 우연의 총합으로 완성됨을 강조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원테이크로 촬영된 <원 컷 오브 더 데드>는 실수나 NG가 발생하는 순간에도 결코 카메라를 멈출 수 없다. 카메라를 멈추는 것은 작품 완성이 실패한다는 점에서도 치명적이지만, 극중에서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에게도 여러모로 치명적이다.
영화는 이러한 긴장감을 바탕으로, <원 컷 오브 더 데드>로 비유된 한 편의 저예산-장르영화가 어떠한 구조 내에서 제작되는지를 재치있게 비유한다. 동시에 한 편의 영화가 어떠한 맥락과 돌발의 연속에서 완성되는지를 흥미로운 인과적 구성을 통해 드러내기를 시도한다. ‘영화 제작’이라는 오랫동안 영화 속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2018년에 이르러, 동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한 셈이다.
홍상수, <풀잎들>
홍상수에게 있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또는 <북촌방향>이 홍상수가 처음으로 맞이한 분기점이었다면, <풀잎들>은 그 이후로 다시 10여년 만에 찾아온 또 다른 분기점이다. 단 한 편의 작품도 연속되는 작품 없이 독립적이었던 홍상수의 전작들과 달리 <풀잎들>은 부분적으로 <그 후>에서 이어짐을 드러낸다. <그 후>에서 타인이 손쉽게 만들어낸 맥락 안에서 넘겨짚기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던 아름(김민희)은 <풀잎들>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글을 쓰려 노력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름은 이미 단편적인 대화의 연속에서 타인을 평가하는 대상이 되어 있다. 언제까지고 무대의 바깥에서, 부차적인 내레이션으로 아름은 계속 남고자 하지만 영화는 그 순간부터 아름을 무대의 한가운데로 호출하기 시작한다. 그 안에서 서로 평행하던 이야기는 하나로 모이고, 엇갈리던 시선 역시 하나의 소실점에 모여 뜻밖의 순간들이 연속으로 발생한다. 2010년대 이후의 홍상수가 연출한 작품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재구축하고, 서로 다른 맥락으로 변용하는 시도의 연속이었지만 그 안의 이야기들은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부딪치지 않았다.
하지만 <풀잎들>에서는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하나로 모여 충돌하고, 충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우발적인 상황들을 모아내 새로운 이후의 이야기가 탄생한다. 그 안에서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정적인 형태로 움직이던 카메라워크에도 다른 색들이 채워진다. 누군가에겐 <풀잎들>이 <그 후>에 이은 ‘세련된 변명’일수 있어도, 꾸준히 일정하게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냈던 홍상수가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도 <풀잎들>은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안건형, <한국인을 관두는 법>
안건형의 작업을 설명할 때, 두 편의 프로젝트를 반드시 짚고 가야만 할 것이다. 홍제천의 역사와 맥락을 소재로 만든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이로 인해 그대는 죽지 않을 것이다>와 2015년 이후로 매년 꾸준히 평론가 유운성과 함께 진행하는 교육-제작 프로젝트인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다. 안건형은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상이 지닌 정보와 맥락을 담아내어 작품의 틀을 구축한다. 철저하게 아카이브에 집중하는 그의 연출 방식은 대중적인 다큐멘터리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울 수 있어도, 자신이 모은 정보와 주장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일정한 참여를 유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안건형의 작품은 명징한 면모를 지닌다.
<한국인을 관두는 법>은 안건형이 이어나갔던 작품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이전 작품에서도 조금씩 드러냈던 위트와 블랙 코미디적인 감각이 새로운 형태로 구축되어 묘한 감각을 낳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로 한국이 시끄러울 때, 한국의 혼란상을 과감히 ‘조선총독부의 지하전선’으로 비유했던 최인훈의 풍자 소설 <총독의 소리>를 바탕에 삼은 작품은 일제 강점기부터 2010년대 현재에 이르기까지를 하나의 채널로, 다시 2010년대 동시대의 상황을 또 하나의 채널로 만들며 한국인의 정체성이 어떠한 기틀 위에 서있는지를 바라본다. 그리고 작품이 빼곡하게 담아낸 문자와 이미지 기록의 아카이브들은 시대를 관통하는 한국인의 정체성이 ‘기회주의’에 맞닿아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인들 다수는 쉽게 자신들을 ‘한민족’로 인식하지만, 안건형이 모아낸 자료들은 역설적으로 당대를 살아왔던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상황의 변화에 맞춰 쉽게 입장과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보인다. 그러기에 다소 도발적으로 느낄 수도 있을 ‘한국인을 관두는 법’이라는 작품의 명제는 결코 단순한 도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애시당초 ‘한국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이라는게 대체 무엇인지, 정말로 존재는 했었는지를 묻는 동시에 ‘한국인을 관둔다’는 선언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두터운 아카이브를 통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새로운 상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심는 것이다.
번외. 이지원, <미쓰백>
<미쓰백>은 분명 장점보다는 아쉬운 점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정 내 아동 학대를 고발하고자 하는 취지를 이해하더라도 작중에서 묘사되는 폭력의 수위는 무척이나 강하게 집중적으로 제시되며, 개인 스스로가 주체가 된 새로운 여성 주인공의 모습을 보인다기에는 어정쩡하거나 거친 지점도 계속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쓰백>은 2018년 한국 영화의 하나의 화두였던 ‘여성 서사 영화’에 대한 요구의 흐름 속에서 호명받은 작품들 중에서, 간신히 새로운 이정표를 발견한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저 나이브한 자세로 일관하거나 여성을 주체로 내세우는 척하면서 기존의 구도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지점까지 하나의 장르적인 특색으로 만드는 일종의 ‘우먼스 익스플로이테이션’이 될 것을 선언한다. 마치 68 혁명의 여파가 각국의 영화계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던 것처럼, <미쓰백>은 2010년대 후반 한국의 페미니즘 물결이 상업 영화에 미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인 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