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게 청탁을 받았던 2018년 한국 만화의 작품적 경향을 정리한 글을 작성한 뒤에, 매년 해오던 것처럼 ‘눈여겨볼 만화’를 정리하는 글을 썼다. 이러한 류의 글쓰기에 ‘추천작’이라는 꼬리표를 달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취향이 각자 다른 것도 아직 감히 ‘추천’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경험이 많지 않은 문제도 있다. 그저 매년 말, 한 해 동안 전개되었던 흐름과 현상을 짚으면서 자연스레 그 안에서 부각된 작품들, 또는 마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들을 뽑으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개인 연감’을 만들 뿐이다. 디지털만화규장각에 게재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올해 나온(한국에 라이센스 출간된) 작품들은 크게 ‘젠더’외 ‘독립’이라는 차원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쉽게 이야기되지 않았던 영역의 문제들이 대두되고, 기존의 작품적-매체적 한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전개되었다. 2018년, 어떤 만화들을 눈여겨봐도 좋았을까.
● 작품의 순서는 제목의 가나다순입니다.
타카노 후미코 만화, 정은서 옮김, <노란 책> (북스토리)
한국에서 타카노 후미코의 만화가 처음으로 정식발매된 것은 2016년에 동 출판사에서 발매된 <막대가 하나>였다. 2010년에도 그림책 <요 이불 베개에게>가 출간되긴 했었으나, 본격적으로 만화책이 나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6년의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한국에 두 번째로 나온 작품집 <노란 책>은 <막대가 하나>에 이어 작품을 전개하는 ‘화자’의 초점에 따라 사물과 인물의 상이 변화하고, 다시 그에 맞춰서 심리나 감정이 변화하는 양상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중/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제목을 장식한 중편 <노란 책 – 자크 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는 곧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여자-주인공의 심리와 시선에 맞춰, 부제에 언급된 프랑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소설 <티보가의 사람들>을 읽는 과정을 이미지로 풀어 나간다. 특별한 사건도, 큰 개인적인 문제도 없지만 주인공 ‘미치코’를 감싸는 환경은 어딘가 막막하고 그 안에서 <티보가의 사람들>의 문구들은 ‘타이포그래피’로서- 또는 갑작스럽게 주인공 앞에 나온 이미지로써 구현된다. 여기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주인공이 여러 소식으로 건너 들었을 전공투의 이야기까지 미치코의 상념에 영향을 미친다. 주인공이 위치한 공간과 시간, 심리가 바뀔 때마다 타카노 후미코는 적극적으로 영화를 연출하는 것처럼 사물의 위치와 크기, 배치와 시점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사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에 가상의 깊이감을 더한다. 쉽게 ‘에세이 다큐멘터리’나 ‘일상툰’을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수 없듯, 타카노 후미코는 중편 <노란 책>을 비롯한 수록 단편들에 실제 각각의 에피소드를 겪는 작중의 개인만이 느낄 수가 있는 감정의 깊이를 작중 초점의 깊이로 비유하며 드러낸다. 만화의 완성은 서사와 함께 이와 상호 작용하는 이미지가 작용할 때 이뤄짐을, 타카노 후미코는 너무나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OOO(정세원), <무슨 만화> (작가 개인 트위터 / 인스타그램 연재, 유어마인드 단행본 발매)
2017년에는 수신지의 <며느라기>가 있었다면, 2018년에는 OOO의 <무슨 만화>가 있었다. 고정된 플랫폼을 벗어나 SNS의 형식에 최적화된 컷과 이미지의 전개로 작중 주인공이 겪는 일화들을 곧 독자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작품이 <며느라기>였다면 <무슨 만화>는 <며느라기>와는 장르도, 스타일도 새삼 다르지만 SNS의 포맷에 최적화된 타입으로 제작된 만화이자, 단행본으로 출간된 뒤에도 무수한 화제와 인기를 모았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작품은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기본적인 사진 게재 기능을 통하여, 스크롤을 하지 않고 스마트폰에서 한 번에 볼 수 있는 작은 스크린의 크기를 곧 작품의 기본적인 캔버스 크기로 결정한다. 작은 스크린 상에서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픽셀’(pixel)과 ‘도트’(dot)는 어떠한 환경에서 보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을 주지만,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에서 보이는 ‘픽셀’의 질감은 결코 투박하지 않고 도리어 섬세한 감각을 낳는다. 작품에 담겨 있는 콩트의 형식 또한 쉽게 타인의 속성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길이 아닌, 특정한 사물이나 개념애 담긴 고정 관념을 단 네 개의 컷 안에서 뒤집어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SNS라는 사적이지만 공적인 공간을, 그리고 개인의 중요성이 대두하는 시기에서 어떠한 외적-내적 형식을 갖춘 만화가 주목받을 수 있는지 작가는 깊게 인식하고 있다.
에밀 페리스 만화, 최지원 옮김, <몬스터 홀릭> (사일런스북, 한국에서는 Vol. 1 분량까지 발매)
<몬스터 홀릭> (원제 : My Favorite Thing is Monsters) 은 그야말로 ‘문제적 데뷔작’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196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작품은 마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 그러하였듯, 당대를 수놓은 서브컬쳐와 펄프 픽션에 대한 애정과 이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풀어나가는 센스를 결합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시대와 그 재해석을 펼쳐내는 방법론에 있다. 주인공이 틈날 때마다 쓰고 그린 ‘스프링노트’를 책으로 펴냈다는 설정을 지닌 작품은 철저하게 일정한 간격으로 줄이 그어진 공책 위에 오직 볼펜을 통해서만 사물과 풍경의 외곽선을 그리고, 에칭 기법을 연상케하는 사선들의 결합으로 하나의 면을 완성한다. 볼펜 드로잉은 스프링노트의 배경과 겹쳐 일견 투박한 느낌을 자아내지만, 1960년대의 시대상과 함께 작품이 근간한 정서를 뒷받침하는 효과를 낳는다. 볼펜으로 재탄생한 1960년대의 ‘어번 판타지’(Urban Fantasy)는 기괴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작가는 그 이미지 안에 여성과 유태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정서를 융합시킨다. 매카시즘을 비롯한 불안과 차별의 정서에 기반하여 공동체-사회 외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형상화했던 1960년대 대중 문화 속 ‘괴물’은 이미 젠더-인종적으로 차별을 받는 주인공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동경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괴물과 정상인을 분리하는 대신, 분리 체계를 작동하고 있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괴물’이나 ‘기괴한 존재’로 분류당하는 이들에 대한 접근과 시선은 에밀 페리스의 손을 거쳐 독특한 판타지로 다시 구축된다. 제목 그대로, 괴물 같은 작품이 등장했다.
반-바지, <슈뢰딩거의 고양희> (작가 개인 트위터 및 온라인 커뮤니티 연재, 나무야미안해 단행본 발매)
한국이 SF의 불모지라는 말은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씨앗이 싹을 틔우듯, 한국에서도 흥미로운 SF는 전체적인 수 자체로는 많지 않아도 느릿하고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감히 말할 수 있는 만화가로 2015년에는 네이버 웹툰에서 작품을 공개한 <오민혁 단편선>의 오민혁을 들 수 있었다면, 2018년에는 반-바지를 들 수 있지 않을까. 반-바지는 자신의 트위터, 그리고 디씨인사이드나 루리웹을 비롯한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에 오랜 시간 꾸준히 자신만의 SF 단편을 공개해왔다. 아무리 길어도 2쪽 이상을 넘지 않는 초단편이 다수였다. 한정된 공간 안에 자신이 구상한 SF의 설정과 세계관을 풀어야 하기에 이미지는 절제되고, 그 빈자리는 대사를 비롯한 각종 서술 문구가 채웠지만 그러기에 반-바지의 작품은 더욱 독특해졌다. 마치 SF의 세계관이 현실로 구현된 상황인 것처럼, 그 안에서 사진을 촬영하거나 영상에서 고정 스틸을 찍은 결과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계속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온라인의 영역에서 작품을 공개한 결과물은 <슈뢰딩거의 고양희>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이 되어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웹툰 단행본 대다수가 그렇듯이, <슈뢰딩거의 고양희> 역시 책으로 접하는 기분은 웹에서 접하던 느낌과 사뭇 다른 감각을 준다. 온라인 속 가상의 프레임으로 막혀 있던 단편이 상대적으로 넓은 감각을 주는 책의 지면 위에 펼쳐질 때, 갑작스럽게 확장되고 밝아진 매체의 감각은 결코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슈뢰딩거의 고양희>는 한국에서 유독 심하게 보이는 ‘SF는 진지하고 무거운 매체’라는 고정 관념을 해체하며, 사변적인 실험과 감각의 조합으로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시도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반-바지가 무수하게 쌓아올린 단편들로 입증한 SF와 서사, 연출의 감각이 좀 더 확장된 지반에서 어떠한 의미를 구축할 수 있을지 궁금함을 낳는다. 물론 굳이 확장할 필요는 없다. 지금도 반-바지는 자신이 방문하는 사이버스페이스 공간에, 사변의 가능성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으므로.
쇼쇼, <아기 낳는 만화> (네이버 웹툰 연재, 위즈덤하우스 단행본 발매)
제목 그대로에 충실한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가 결혼 후 임신을 하고, 이후 출산을 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러기에 작품은 의미를 지닌다. 만화를 비롯한 대다수의 한국산 콘텐츠가 ‘임신’과 ‘출산’을 손쉽게 모성의 성스러운 상징으로 묘사한다. 분명 임신과 출산은 의미있는 사건이자 행위이지만, 이를 독해하는 방법은 개인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이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정상 가족 체계를 유지하는 작동 기구임을 무의식적으로 긍정하는 형태로 이뤄지는 것이다. 쇼쇼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행위의 주체를 실제로 이를 경험한 작가 개인에 초점을 맞추며, 그 과정에서 겪는 심리와 감정도 개인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대체 어떤 작품이 출산의 순간을 “따뜻하고 미끄덩한 무언가가 빠져나간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방법론이 근간이 있기에, 동시에 매 순간을 진솔하게 회고하고 그려나가는 작가의 섬세함이 기초하기에 <아기 낳는 만화>에서 표현되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모습은 잔잔하면서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아기를 낳는 과정은 그저 아기를 위해서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도 아닌 개인과 개인의 사적인 결합이 낳은 산물임을 작품은 넌지시 드러낸다. 에세이 만화가 개인의 신체와 결합할 때, 더욱 멀리 뻗어나갈 수 있음을 <아기 낳는 만화>는 입증한다.
황벼리,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개인 출판)
아무리 척박한 여성 만화의 역사 속에서도, 일상을 다시 마주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어진다. 1990년대 여성 만화의 한 차례 중흥기 속에서 일상에 근간하여 여성의 삶을 성찰하려 했던 대표적인 작가로 <사춘기>와 <피플> 연작의 이진경이 있었다면, 2000년대 중후반에는 <눈부시도록>의 윤지운과 <그녀의 완벽한 하루>의 채민, <몹쓸년>의 김성희가 있었다. 2010년대에는 <두 여자 이야기>의 송아람, <재윤의 삶>의 정재윤, 그리고 황벼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황벼리의 첫 번째 단편집 <또 다시 성탄>이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들의 군상을 살펴보는 작품이었다면,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는 <또 다시 성탄>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다양한 연령과 세대에 놓인 여성의 삶과 시선을 바라보는 것에 더욱 공을 들인다. 극을 전개하는 서사의 톤으로, 작가 자신- 또는 작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놓였던 여성들의 일상적인 흐름은 재구축된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다양한 일상 속에서 무심코 날아드는 발화와 상황을 황벼리는 결코 가벼이 넘어가지 않는다. 각각의 말과 상황이 지니는 무게를 잘 담아내어, 쉽게 잊을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은 작가에게 포착되어 흥미로운 단편들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제목처럼 특별하거나, 아무런 맛이 나지 않더라도 일단 경험하는 순간 그 삶의 순간들은 의미를 가지게 됨을 작가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김수박, <아재라서> (사계절출판사)
2000년대 초반부터 새만화책을 중심으로 <아날로그 맨>, <빨간 풍선> 등 자전적인 에세이 만화를 그리던 김수박은 2010년대를 기점으로 조금씩 결이 다른 에세이를 시도했다. <내가 살던 용산>을 기점으로 여러 차례 르포 만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험은 사회 주변의 모습들을 새로이 바라보게 만들었고, 이러한 작업들이 낳은 경험은 자신의 과거사를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와 ‘경상도’라는 지역성을 인식하는 <메이드 인 경상도>를 만들었다. <아재라서>는 <메이드 인 경상도>에서 짤막하게 드러나거나 예고되었던 작가의 고등학생 시절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 인식했던 10대 초반과 달리 고등학생이 된 작가와 또래들은 조금씩 세상이 돌아가는 질서를 깨닫는다. ‘학교’라는 공간은 좋든 싫든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고, 폭력과 강압이 팽배하던 사회의 질서는 고등학교의 폐쇄적이고 좁은 사회 내부에서 굴곡진 형태로 재현된다. 작가의 초기 작품이 이미 10년 이상 지났지만, 밢표된 당시를 기준으로 동시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2010년대 이후로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향을 정한, 자신이 상호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회의 근원을 마주하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꾸준히 자신을 들여다 보는 작업은 그렇게 하나의 미시사를 만든다.
마영신, <아티스트> (다음 웹툰 연재중)
<팝툰>에서 새만화책, <고래가그랬어>에서 다음 웹툰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공개한 매체는 계속 바뀌었어도 마영신의 작품을 감싸는 정서는 ‘자책’과 ‘쉽게 바뀌지 않는 주변’이다. 주인공들은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도 뒤틀려있고,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바꾸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환경을 맞추거나, 아니면 끝내 맞추지 못해 파멸하고 만다. 상대적으로 저연령층을 상대로 했던 <삐꾸래봉>이나 <19년 뽀삐>에서도 마영신의 시선은 꾸준했다.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법이 시대에 뒤처진 스타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영신의 이러한 표현은 작가 자기 자신을 비롯해, 사회의 주변부를 인식하는 하나의 지속적인 ‘탐구’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가진다. <남동공단>과 <엄마들>이 노동의 순간과 일상을 조합하는 작품이었다면, <아티스트>는 같은 해 발간한 <연결과 흐름>에 수록된 단편들에서 드러난 ‘창작자의 찌질함’을 소재로 삼는다. 등단을 하면 권위나 실권이 없고, 등단을 못하면 남은 건 가난함과 자괴감 뿐이다. ‘창작자’ 주인공은 자신의 이런 찌질함을 때로는 예술이라는 핑계를 들지만, 갈수록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사회적 상황은 자신들을 스스로 계속 밑바닥으로 몰아 넣는다. <아티스트>의 기반이 된 단편들이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초반에 발표한 것들임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로는 자기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창작자들의 새로운 위치와 정체성을 다시 고민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이토 준지 만화, 다자이 오사무 원작, 오경화 옮김, <인간실격> (대원씨아이 임프린트 미우, 2권까지 발매)
다자이 오사무는 여전히 문제적으로 독해되는 근대 일본 문학 작가이다. 발표된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의 작품에는 강한 흡입력과 함께, 어떠한 기이함이 느껴진다. 그런 작가의 대표작 <인간실격>을 근래 일본 공포 만화의 대표 인사 이토 준지가 만화로 재창작을 시도했다. 이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만화로 만들었던 이토 준지는 자기 특유의 섬세하고 얇은 선의 작화, 인물의 고조되는 심리를 곧 신체의 변형으로 드러내는 표현을 통해 기괴하고 음습한 고전 고딕 호러를 능숙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었다. 이토 준지의 <인간실격>은 <프랑켄슈타인>에서 드러났던 고전의 재해석을 다시 한 번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주인공의 회고와 독백에서 이토 준지는 인간의 추악함과 나약함,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어두운 감정들을 시각화하며 원작에 서려 있던 광기를 끄집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간합격>이 <인간실격>의 흐름을 뒤집는 방식으로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했었다면, 이토 준지의 만화적 재해석은 서사와 행간 사이의 심상을 곧 시각적 이미지로 드러내며 고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 셈이다.
김금숙, <준이 오빠> (한겨레출판)
김금숙의 최근 작품이었던 <풀>은 위안부 생존자에 대한 만화이자, 위안부 생존자를 마주하는 ‘사회’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었다. 이들이 겪었을 슬픔과 공포를 그저 무심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이들이 ‘사건 이후’로 겪어야 했던 삶의 여정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마주한다. 작가의 신작 <준이 오빠>는 이러한 작가의 장점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천재적인 실력을 지닌 장애인 음악가 ‘최준’의 삶을 바탕으로 삼는다. 하지만 <풀>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준이 오빠>에서 작가가 주안점으로 삼는 것은 최준에 대한 사회적인 주목과 음악의 재능이 아니다. 재능으로 인해 미디어가 주목하기 전,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 가정’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지를 작가는 집중적으로 바라본다. 한국 사회가 국가적 성폭력의 피해자를 차별적으로 시선으로 바라봤음을 <풀>이 드러내었듯, <준이 오빠>는 한국 사회가 장애인에게도 결코 녹록치 않음을 담담히 서술한다. ‘장애’는 오로지 개인이 지녀야 할 천형이 되고,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을 이루는 가정은 조금씩 뒤틀려 간다. 소수의 문제를 지긋이 바라보는 작가만이 짚을 수 있는, 쉽게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삶의 편린을 김금숙은 살며시- 그러나 지긋이 기록한다.
선우훈, <평면이 새로운 깊이다 (Flat is New Deep)> (2018 광주비엔날레 및 온라인 공개)
선우훈의 장편 데뷔작 <데미지 오버 타임>은 여러모로 독특한 작품이었다. 고전 SRPG를 방불케할 정도로 인물부터 사물, 배경까지 모든 작중의 등장 요소를 ‘점’의 집합으로 드러내었다. ‘점’은 모여 하나의 선과 면을 이루고, 선과 면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배치되며 평면의 공간 내부에 가상의 깊이감을 만든다. 현대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근법적 공간 배치와는 또 다른, 마치 작중 가상의 상공에서 CCTV로 비춘 것만 같은 시선의 감각을 선우훈은 웹툰을 통해서 구현했었다. 그리고 이제 선우훈의 행보는 고정된 플랫폼의 웹툰에 머무르지 않는다. 창작자로써 자신이 활동하는 판 내부를 비평하는 것은 물론, 웹툰이 다루는-웹툰이 놓인 공간과 영역을 적극적으로 확장해 나간다. 2018 광주비엔날레에서 발표한 자품 <평면이 새로운 깊이다>, 그리고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개최된 까르띠에 미술문화재단 소장품 전시회 ‘하이라이트’를 공개한 <가장 평면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연작은 작가 자신이 만든 ‘점’의 세계가 세상을 어떠한 기호의 연속과 조합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인상적으로 드러냈다. 평면을 뜻하는 ‘flat’의 다른 뜻에는 한국 사회의 대중적인 주거 공간 ‘(판상형) 아파트’가 있음에 착안한 작품은, 길쭉한 판상형 아파트의 내외부에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의 기호를 배치한다. 길쭉하게 뻗은 직선의 외부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건축물은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면을 형상화하고, 이윽고 2010년대 이후 페미니즘 운동을 비롯하여 개인의 주체를 고민하려는 시도가 밖으로 나왔을 때 작중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무르던 flat을 벗어나 새로운 깊이감을 지닌 flat을 실현하려 나선다. 픽셀을 그저 ‘레트로’의 측면에 머무르는 대신, 세계의 기호적 구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Mountains, <florence> (Annapruna Interactive, 애플 앱스토어 / 구글 플레이 스토어 판매)
<florence>는 엄밀히 말하면 ‘게임’으로 판매되는 제품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구입해서 <florence>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만화’로 분류해도 큰 상관이 없다는 것에 쉽게 수긍하리라.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치한 게임 스튜디오 Mountains가 개발하고, 2010년대 이후로 <마스터>를 비롯한 아트하우스 영화를 주로 만드는 신생 투자배급사 ‘안나푸르나 픽쳐스’(Annapruna Pictures)의 게임 부문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퍼블리싱을 맡은 작품은 기본적으로 두 주인공들 사이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중국계 호주인 ‘플로렌스 여’는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던 중 우연히 만난 첼로 연주자 ‘크리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윽고 동거하며 살아가는 연인 관계가 된다.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의 감정은 단조로웠던 일상에 청량감을 주고, 감미로운 느낌을 선사하지만 사랑이 언제까지나 부드러울 수는 없는 일이다. <florence>는 두 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만나면서 변화하고, 다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을 게임의 형식이 가미된 인터랙티브 만화로써 제시한다. 작중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스크롤과 화면의 방향은 자연스레 전환되고,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은 게임 속 요소와 리듬으로 전환되어 독자들이 플로렌스와 크리쉬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터랙티브 요소를 도입한 만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게속 존재했지만, <florence>는 그저 독자의 참여를 넣는다고 ‘인터랙티브 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서사와 인물과의 적절한 만남을 고려할 때만이 인터랙티브가 유효함을 입증하는 매우 훌륭한 사례이다. 동시에 게이머게이트와 페미니즘 크리에이터 공격으로 얼룩졌던 게임계의 어떤 모습에서, 게임을 비롯한 서브컬쳐 매체들이 어떠한 가치를 지향해야 할지는 보여주는 단적인 이정표이다.
란탄, <화의 방향> (핀치 웹툰 연재중)
<성숙의 지표>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출판 만화를 통해 여성과 여성의 일상, 그리고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나갔던 란탄은 ‘여성 생활 미디어’를 표방한 웹진 <핀치>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일상 속에서 여성이 겪는 압박을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상적으로, 가정을 비롯한 사회 공간들 내에서 벌어졌던 직간접적을 폭력의 양상을 조망하는 측면에서 <화의 방향>은 가정 폭력 당사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렸던 <단지>와도 맞닿아 있지만, <화의 방향>은 회고를 넘어 좀 더 당사자들 간의 ‘발화’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주인공은 과거를 회고하며 자신이 지금 당장 느끼는 분노의 근원을 찾아 나서고, 그 근원은 다시 한편으로 논쟁하며 싸워야 할 대상이 된다. 발화를 하는 것 역시 일정한 수준 이상의 용기를 지녀야 하지만, 설사 마음을 굳게 먹고 날선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당사자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저 당사자가 지닌 차별과 혐오의 근원을 확고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따름이다. 작가는 이러한 작중의 발화를 통하여 일상 속의 문제와 마주하는 새로운 측면의 ‘에세이 만화’의 양상을 드러낸다. 일상의 편린을 포착하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포착한 단면들에 밀착하여 다가가 적극적으로 묻고 따지는 스타일.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펀 홈>을 비롯한 앨리슨 벡델의 작업들과도 맞닿아 있다. 쉽게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기억한 심원으로 다가가 날카롭게 질문하며 대응하는 것이다.
번외 1 : 김성희, <너는 검정> (케이툰 연재, 창비 단행본 발매)
케이툰에서 연재했었던 <검은 물 검은 산>이 일부 작화와 내용의 수정과 보충을 거쳐 2018년 초 창비를 통해 <너는 검정>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미 2016년 언급을 했었기에 부득의하게 번외로 언급한다.
번외 2 : 오세영, <부자의 그림일기> (글논그림밭 → 거북이북스 개정증보판)
2016년 별세한 오세영 작가는 한국 만화의 새로운 흐름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 작가였다. 비교적 젊은 독자들에게 오세영 작가는 <토지>를 비롯하여 각종 문학 작품이나 위인전을 주로 만화로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을지 몰라도, 그는 1980년대 중후반 전두환 정부의 유화책 속에서 가까스로 창간한 한국 최초의 성인 대상 만화잡지 <만화광장>을 통해 주로 작품을 발표하며 사회의 주변부와 시대의 파편을 가깝게 응시하는 단편들을 그려왔다. 글논그림밭을 통해 출간되었던 작품집 <부자의 그림일기>는 작가의 초기 작업들을 마주하는 창구이자, 이제는 다시 확인하기 어려운 <만화광장>을 비롯한 1980년대 한국 만화를 관통한 하나의 흐름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지 2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새롭게 거북이북스를 통해 출간된 <부자의 그림일기>는 1980년대 시대의 냉혹함을 뚫고 사회를 마주 보고자 했던 작가의 시선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구판을 이미 봤던 독자일지라도, 새롭게 일신한 편집과 개정증보가 이뤄지며 추가된 두 개의 단편을 확인할 수는 기회라는 점에서 다시 볼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