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로마> 단평 : 시대의 원근법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시선으로, 폭력의 시대를 바라다보기

by 성상민

알폰소 쿠아론의 작품을 핵심적인 틀거리만 보자면, 의외로 할리우드의 하이 컨셉과 큰 차이가 없다. <칠드런 오브 맨>에선 출산이 사라진 세계에서 태어날 소중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분투했고, <그래비티> 또한 마찬가지였다. 생존을 위한 명확한 목표가 있고, 결말 역시 그 목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이 중요하게 본 것은 그 ‘과정’이다. 절실한 가운데에서도 쿠아론은 발단과 절정, 결말에 도달하는 큰 이야기 안에서 어떠한 흐름과 맥락이 있었는지를 명확히 짚는 선택지를 택했다. 충실한 설명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장센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에 설득력을 주는 한편, <이 투 마마> 등 이전 작품에서도 계속 반복하였던 개인과 개인 간의 만남과 관계라는 요소가 더욱 강하게 묻어나게 되었다.

그가 넷플릭스, 그리고 일부 극장을 통해서 공개한 2018년 신작 <로마>는 이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의 최근 필모그래피와 달리 <로마>의 설정과 배경은 환상의 마법학교도, 디스토피아적 미래도, 먼 우주 밖도 아니다.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했듯, <로마>는 감독의 고향이자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인 1971년 멕시코의 거주구역 ‘로마’를 무대로 삼는다. 하지만 비교적 빠르게 작품이 근간하는 배경과 설정을 서술했던 이전 작품과 달리 <로마>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마치 갑작스레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관객은 서서히 제시되는 당대의 상황을 느린 페이스로 인식할 수 밖엔 없다. 애시당초 영화의 주인공이자, 중산층 백인 가정을 위해 고용된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여러모로 제한적인 정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넌지시 들리는, 자식들에게까지 자신의 도피를 숨겨야 하는 복잡한 집안 사정과 일상에 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군대의 존재로 간접적으로 시대상을 인식할 따름이다. 같은 공간, 바로 근처의 공간에서 이러한 소식을 접해도 클레오에게 그 이야기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




영화는 약 130분 간의 러닝타임을 통하여 시대와 사건의 원근법을 통하여 점차 한 명의 개인에게 시대의 굴곡이 당면할 때,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주목한다. 클레오는 자신이 격동하는 사회와 멀리 떨어져 있다 생각하지만, 감독은 이미 클레오의 주변에 여러 장치를 배열한지 오래다. 고용주 가정의 자식들은 아무렇지 않게 군인에게 장난을 쳤다는 이유로 아이가 살해당한 이야기를 하는 등 죽음은 이미 클레오가 머무는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시대의 이미지가 한편으로는 ‘죽음’으로 당면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정체성’으로 가까워져 온다. 시대의 폭력이 사건의 원근법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개인이 머무는 공간은 이미 여러 층으로 분절되어 있다. 고용주가 아무리 고용인을 살갑게 대해도, 고용주와 고용인의 공간은 분리된다. 이 분리는 계급 간의 구도에서 그치지 않고 여성과 남성, 지배민(또는 부역민)과 피지배민, 다수와 소수로 끊임없는 경계로 분할된다. 조각조각 분리된 공간이 개인을 잠식할 때, 멀게만 느껴진 시대의 거리는 개인과 근접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폭력이 대두되어 그(들)을 덮친다. 원근법과 분할법은 서로 긴밀하게 조응하며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이미지는 흑백의 명암과 공간의 대비, 그리고 ‘물’(을 비롯한 액체)의 질감을 통하여 거리와 분할을 더욱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면, 대리석 바닥 위로 물이 반복적으로 오가는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비춘다. 이 롱테이크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뒤에서야 관객은 이 장면이 클레오가 차고 바닥을 청소하는 장면임을 알게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그 장면에서 부터 ‘분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클레오는 계급-직업적으로 차가운 바닥에서 고용인을 위해 봉사를 해야 하고, 그 안에서 빛은 통제되지 않은 채 클레오를 비춘다. 모든 것들이 일정하게 통제된 저택 내부는 클레오가 결코 편하게 머무르기 어려운 공간이며, 그녀의 일상생활은 매우 제한된- 빛이 제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공간에 한정된다. 고용주 집안이 기르는 개 역시 쉽게 그 내부를 오갈 수 없다. 그저 차고 내부 아무 곳이나 용변을 하며, 클레어에게 핀잔과 일거리를 만들 뿐이다. 이러한 분리는 대농장에서 신년을 맞이할 때에도, 클레오가 자신과 관계를 맺은 남자 ‘페르민’을 만나는 여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자연물이 흩날리는 공간이 하층과 소수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공간이다. 그나마 거기에서 자유로운 공간은 ‘극장’ 같은 장소이지만, 그 공간이 유지하는 환상의 유효기간은 무척이나 짧다.


이러한 분리가 극적으로 통합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폭력의 위협이 모두를 덮칠 때이다. 남편을 잠시 도피시켰다고 생각했던 고용주 가정의 아내 ‘테레사’가 진실을 알게 될 때, ‘페르민’이 배우던 무술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습을 보일 때 파편화되어 있던 공간과 거리감은 압축적으로 합쳐진다. 감독은 이러한 사건의 연속을 통해 클레오와 테레사가 맞이한 처지가 어떤 측면에서는 붙어 있음을 통해 유대감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예측할 수 없는 행로로 자신들을 덮치는 베라크루즈 해변의 파도에서 빠져나온 뒤, 서로는 몸을 부둥켜 안는다. 폭력의 강도가 모두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미칠 때, 그 안에서 만남이 가능함을 감독은 말하는 것이다.

그 만남의 과정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영화의 분위기에서 꽤나 극적이지만,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관객들의 호불호를 낳을 수 있을 지점이기도 하다. 아무리 고용주-고용인의 관계가 좋아도, 폭력을 마주한다는 이유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어 젠더와 소수자의 자세로 연대가 가능한가. 동시에 그 계기를 삶과 죽음의 역설을 통해서 표현하는 방식은 얼마나 가능성이 있는가. 물론 이는 알폰소 쿠아론이 <칠드런 오브 맨>이나 <그래비티>에서도 끊임없이 메타포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나 근간하는 배경과 설정이 달라지기에 메타포의 방법론은 비슷해도, 가져올 수 있는 분위기는 사뭇 달라질 수 밖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로마>가 폭력과 권위주의로 점철된 1970년대의 멕시코를 표현하는 방법은 근래 근현대사 소재의 영화가 유행하는 한국에 많은 질문를 던진다. 그저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이상으로, 미시적이며 최대한 절제하여 상을 표현하더라도 초점이 명확하다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진정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로마>는 보인다. 한국의 영화는 어떠한 원근과 이미지로 시대를 바라보는가. 최대한 줌을 당긴 렌즈로만 시대에 근접하는 것을 ‘사회파 영화’로 착각하는 시대에서, <로마>가 택하는 원근의 이미지는 많은 단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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