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색은 언제나 회색이었다
20대 후반부터 짧게는 4년 길게는 5년 정도 나는 정보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 정보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수많은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엮여 하나의 거대한 웹을 이루고 있었다. 공급자와 수요자. 이 둘을 이어주는 중개인. 중개인에 의존하지 않는 플레이어. 이들을 검증하는 검증자와 이들을 추적하는 추적자.
일련의 사건들 사이에 일어난 온갖 연결고리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사람들의 분노를 먹이로 삼는 괴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덩치를 키운다. 더 분노하라. 더 분노하라. 끓어오르는 분노를 바탕으로 권력을 쟁취하자. 권력을 양도하도록 밀어붙인다. 총과 칼로는 이길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하니 사람들의 마음을 설계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조작한다. 우리는 다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수의 지배를 받으며, 소수가 설계한 판 속에 들어가 움직인다.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에 주어진 정보가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분석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못한다. 광범위하게 들이붓는 정보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메시지와 선동 자료들. 그 안에서 선명해지는 것은 누가 가장 돈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지와 누구의 힘이 더 강력한지 정도일 것이다.
여론 조사 전화에는 설계된 질문지가 전달된다. 워딩 하나만 바꿔도 여론의 향방을 가르는 비율을 바꾼다. 45대 55의 싸움이 50대 50 싸움처럼 보이도록. 50대 50 싸움은 55대 45의 싸움으로 보이도록. 판도를 바꾸는 이들이 권력자가 가장 원하는 인재.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일이 이 시대에서 가장 비싼 일. 그렇기에 그들은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자신들의 판으로,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모든 선택지를 펼쳐두고 전시 상황처럼 행동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시 상황이지만 우리에게는 전시 상황처럼 행동해서는 안될 불문율이 존재한다. 아무리 비밀경찰들과 각국의 정보전 인력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인간인지 봇인지 구분하기 힘든 메시지가 판을 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총을 들 수는 없다. 대중에게 공포를 주는 방식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들이 광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판을 까는 것이 중요하다.
권력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공격하는 이가 없는 제왕적 권력이다. 제왕적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류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권력을 분산시키고,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빨을 드러낸 맹견이 되어 서로를 물어뜯어야만 하는 게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삼권 분립을 깨기 위한 정부는 언제나 권력의 균형추를 한쪽으로 몰아 자신에게 위임하였고, 무너진 권력의 추를 바로 잡는 유일한 길은 다름 아닌 언론이었다.
권력자가 언론을 가장 두려워할 때는 그들이 자신들과 거래할 의사가 없을 때이다. 권력자는 이권 사업을 통해 자본을 약속하거나, 인사권을 이용해 권력을 약속하는 방식으로 거래한다. 그러나 진정한 언론인에게는 이 거래가 통하지 않는다. 언론이 거래가 불가능한 상대가 될 때 언론은 가장 빛날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을 탄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탄압받는 언론이 살아남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독재 정부는 모든 명목을 이용해, 법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압수수색하고, 출판을 금지하고, 내용을 편집할 수 있다. 바로 어제 일어난 계엄이 그러한 힘을 가졌다. 언론의 통제, 출판의 통제, 집회와 시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모두 빼앗아갈 수 있는, 신성한 시민 권력의 근간을 흔드는 권력이 대통령에겐 있다.
대한민국은 다행스럽게도 법치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살아남았기에 계엄은 고작 몇 시간의 이벤트처럼 사그라졌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국가에는 표현의 자유도 언론의 불씨도 살아남기 힘든 끔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나라 중국은 가림막도 없는 공개 투표를 진행하며, 그 결과로 시진핑에게 제왕적 권력을 양도했다. 이것에 반기를 드는 이들에 대해서 중국 공산당이 해왔던 일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다. 전체주의 국가, 독재 주의 국가에서는 모두가 하나의 의견만 말해야 한다. 당의 의견과 반대한다? 권력자의 의견과 반대한다? 그것은 곧 반역이며 군법에 따라 심판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기록된다.
국가는 그렇기에 실패했다. 민주주의의 비효율성을 따르는 것이 제왕적 권력자가 만들어낼 부패보다 조금이라도 낫다고 판단하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독재와 항거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와의 전쟁을 표현할 수 있고, 영화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의 의견을 담아 누구라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국가이다. 그러나 중국, 러시아와 같은 초강대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여전히 권력의 지배 하에 표현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상의 자유마저도 박탈당한다. 생각마저도 국가에서 심어준 생각만 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의 세계는 반대의 세상을 그린 것 같지만, 놀랍게도 현시대에 도래했다. 헉슬리가 두려워한 방대한 정보 속에 무관심한 대중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오웰이 두려워한 빅브라더의 시대도 도래했다. 국가마다 감시의 너비와 깊이는 한 없이 다르다. 어떤 국가는 당신의 속옷 색깔까지도 관찰할 것이고, 어떤 국가는 당신의 뇌 속의 사상까지도 감시할 것이다.
팔다리가 절단되는 시에라리온 내전을 보자. 소년병들을 마약에 취하게 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살상을 저지르게 하며, 무고한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마체테로 토막 낸다.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쟁은 1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뤄졌다.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가 존재할까. 이들에게 사상의 자유가 존재할까.
지금도 중동에는 매일마다 민간인 사상자와 부상자에 대한 뉴스가 올라온다. 민간인마저도 모조리 학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에 자본주의에서 가장 힘이 강력하다는 인물들이 후원하며, 그러한 단체가 이들을 보좌하고 있으니 무고한 민간인들의 죽음은 주류 언론들의 메시지에 담기지 않는다. 정의의 편이라 말하면서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면 그것은 정의의 편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어느 날 팔과 다리를 잃은 이가 악에 받쳐 분노를 표현한다고 해보자. 권력자에 대한 분노. 세계의 주인에 대한 분노. 그러면 세상이 바뀔까. 권력자는 그를 찾아 더 큰 고통을 준다. 팔과 다리를 잃은 이가 생각도 말도 못 하도록 생명을 빼앗아 간다. 총알 한 발로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진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힘이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뜻있는 이들을 모아 힘을 기르는 방법 밖에 없다. 뜻있는 이들이 모여 독재와 탄압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들이 모일 장소나 소통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독재의 눈은 이들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며, 권력 찬탈을 막아야 하기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힘을 길러 활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렇기에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서로의 신원이 공개되지 않고, 서로의 물리적 안위가 보장된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
나는 언론의 자유와 검열의 필요성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내 인생을 걸친 고민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붕괴됐을 때 나타나는 폭력과 범죄의 역사는 검열로 인해 얻어진 안전보다 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였다. 독재 국가는 국가에 반기를 드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악을 몰아내기 위한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는 자가 악이다.
그렇기에 나는 악과 싸우기 위한 무기를, 언론의 자유가 무너진 곳에 무차별적으로 뿌릴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하면 빅 브라더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고민 끝에 만든 것이 바로 그레이게이트(Graygate), 회색 문이라는 제품이다.
거대한 지구를 색칠해 보자. 사람들에게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를 색칠해보자.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끔찍하게도 많은 국가가 인간의 기본 권리인 생각의 자유도 허락받지 못한다. 중동의 많은 국가들의 여성들이 여전히 온몸을 가리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도, 이것에 반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권력자에 도전할 생각도 권력자에 반기를 들 생각도 용납하지 않는다. 법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이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니 그것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착취한다.
노예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가난한 국가에서는 주어진 직업 외의 직업을 선택할 자유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그 어떤 것도 목숨을 건 도전 끝에 얻을 수 있다. 운명을 바꾸기 위해 운명과 대항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물과 공기처럼 당연해진 자유가 고작 몇 천 킬로미터 떨어진 땅에선 결코 얻을 수 없는 보물과 같다.
어제의 사건을 통해 한국에서도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이 도래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2024년에 군인들이 좌파 언론인들을 잡아가기 위해 사무실과 자택으로 출동을 하는 상황이 오리라고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좌와 우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를 빼앗긴 시대에서는 거슬리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고,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니 내가 해야 할 일을 더 빨리 해내야 하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자에 대한 사실을 퍼뜨려 경찰과 군인들이 체포하러 오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가득하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토록 흙먼지 속에서 일을 하며, 자신의 삶 하나 건사하지 못하며 착취당하는 이들이 지구상에 가득하다. 권력자가 고기와 샴페인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제대로 된 식사 한 끼 해내지 못하는, 하루에 1달러치의 식량도 구하지 못하는 이들이 가득하다.
세상이 바뀌기 위해서는 뜻이 있는 자들이 모여 힘을 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것이 설령 기존 권력에 도전적일지라도 역사가 판단하리라. 사상과 표현의 결과는 그들의 몫이며, 그 어떤 인간도 타인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조종할 권리를 신으로부터 받지 못했다. 전쟁은 이곳에 있다.